주간 기획 “중국 경제 개혁과 교훈” - 개혁의 배경

주간 기획, “중국의 개혁, 개방이 주는 북한에 대한 교훈”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현재 중국이 지난 70년대 말 개혁, 개방에 나선 이후 전 세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경제적 위상과 당시 중국이 개혁, 개방에 나서게 된 배경 등을 살펴봅니다. 진행에 양성원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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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지난 1978년부터 2000년대 들어서까지 국내 총생산(GDP)이 평균적으로 한 해에 10% 정도씩 성장하는 엄청난 경제 성장률을 보이고 있습니다. 같은 기간의 전 세계 경장성장률이 3%대임을 감안하면 실로 눈부신 성장률입니다. 중국은 현재 에어컨, 텔레비전, 카메라, 전화기 등 여러 가지 공산품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생산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지난해 일본을 제치고 독일과 미국에 이어 아시아의 최대 무역국이 됐습니다. 중국의 경제력은 그 나라 물가 수준을 감안한 구매력(PPP) 환산기준으로 볼 때 외형적으론 미국에 이어 두 번째입니다.

오죽하면 지난 2001년 중국 개혁, 개방도시의 상징인 상하이를 방문한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그곳의 빌딩 숲들을 보면서 ‘천지가 개벽했다’며 감탄했다는 얘기가 전해질 정도입니다. 당시 중국 주방짜오 외교부 대변인은 김 국방위원장이 당시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상하이를 둘러본 소감을 그같이 말했다고 밝혔습니다.

주방짜오: 김 위원장은 ‘상하이가 개혁개방 후 천지개벽을 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상하이를 가본 외국인들은 우뚝우뚝 들어선 고층빌딩이며, 밤이면 불야성을 이루는 네온사인과 서양의 무도회장을 방불케 하는 유흥업소 등을 보면 과연 중국이 사회주의체제인지 의심할 정도입니다. 최근 상하이를 방문했던 한 젊은 미국 관광객 눈에 비친 상하이의 모습입니다.

미국인 관광객: 상하이는 매우 자유스러운 도시라고 느꼈다. 상하이에는 최첨단 기술을 이용한 전자제품과 최신 유행의 옷을 입은 젊은이들이 넘쳐났다. 마치 미국 도시 뉴욕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특히 상하이의 밤 유흥문화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술집과 클럽이 도처에 번성해 있고 여하간 도저히 사회주의 중국에 와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없었다.

중국은 또 2001년에는 WTO 즉,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기에 이를 정도로 국제사회에 대한 문도 활짝 열게 됩니다. 세계무역기구는 지난 95년 발족한 기구로, 이 기구에 가입하면 다른 가입국과 동등한 자격으로 교역상의 편의를 누리며 수출입을 극대화할 수 있는데, 지난 2003년 말 현재 전 세계 143개 나라가 이 기구에 가입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엄청난 중국의 경제 성장이 시작된 지난 1970년대 후반, 중국에서는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전문가들은 중국을 개혁, 개방으로 이끈 지도자 덩샤오핑의 집권을 가장 큰 요인으로 꼽습니다. 당시 중국 내 정치상황을 살펴보면, 1976년 9월에는 지난 30년 가까이 ‘평균주의 낙원’으로 중국을 건설하려던 마오저뚱이 사망하게 됩니다. 그해 10월에는 마오저뚱의 부인인 장칭을 비롯해 10년 동안의 문화대혁명을 주도했던 중국 공산당 내 극좌 세력 소위 ‘4인방’이 제거되기에 이릅니다. 당시 중국 베이징에 살던 한 재미 중국인은 당시 상황을 이같이 설명합니다.

재미 중국인: 우리는 당시 고등학생이었는데 덩샤오핑이 다시 집권하자 베이징에서는 큰 환영 행사가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76년 이전 적어도 두 번 이상 권력에서 밀려났었던 덩샤오핑은 중국 경제를 어떻게 이끌어갈 지 아는 자오쯔양과 후야오방 같은 인물을 등용해 개혁 정책을 주도해 나갔습니다. 그 결과 베이징 주민들의 생활수준도 80년대 들어 크게 좋아졌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마침내 지난 1977년 복권돼 정치 일선에 나선 덩샤오핑은 중국의 경제발전을 방해하는 모든 제도나 방법을 과감히 개혁해 나갔습니다. 그 방향은 간단히 말해서 공산주의식 계획 경제를 축소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그의 유명한 말이 바로 ‘흑묘백묘론’입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말로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경제만 발전하면 된다, 다시 말해 어떤 방식으로라도 중국 사람들이 보다 잘 먹고 잘 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그는 ‘선부론’이라고 해서 일부 중국 사람들, 해안에 면한 상하이 등 대도시 사람들이 먼저 부자가 되는 것을 인정하고 내륙의 가난한 사람들이 이를 따라 배우게 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중국 사람들 사이에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격차가 좀 생기더라도 이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덩샤오핑의 개혁 사상의 핵심은 ‘실사구시’였습니다. 그는 모두가 가난해지는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무기 생산에 주력한 중공업 우선 정책과 문화대혁명으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중국의 경제 살리기를 지상 목표로 설정했습니다. 중국과 북한의 경제개혁 비교 전문가인 남한의 박정동 인천대학 교수는 덩샤오핑의 개혁 배경과 관련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박정동: 북한과 중국은 두 나라 모두 고질병에 빠졌다. 하지만 중국은 북한과는 달리 그 탈출구로 과감한 개혁, 개방을 시도했다. 고질병이라는 것은 경제가 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농민, 노동자의 생산물과 농산물 등 축적된 것을 모두 무기 중심의 중화학공업에만 투자한 것이다. 원래 중화학공업은 농기계라든가 경공업 기계를 만들어 농업과 경공업을 뒷받침해야 되는데 그 돈을 가지고 무기 중심의 중화학 공업에만 투자하니 돌아가던 농업과 경공업이 마비되는 현상이 생겨났다. 중국도 그렇게 문화 대혁명까지 쭉 해왔기 때문에 경제가 도탄에 빠진 것이다.

박 교수는 특히 경제, 개혁에 대한 당시 중국 지도부의 의지를 높게 평가합니다.

박정동: “덩샤오핑 스스로가 개혁, 개방을 주도하면서 경제 특구를 만들어서 홍콩, 대만, 마카오 주변에 경제자유구역을 만들어 해외자본을 유치하고 각종 제도개혁을 시행했다. 당 내부에 있어서도 모든 것은 경제제일주의에 입각해 불협화음이 없도록 조치했다. 빈부격차 문제에 대해서도 ‘선부론’이라고 해서 불균형 발전을 덩샤오핑 스스로가 밀고 나갔다. 당 내에서도 거의 반감이 없었다.

지난 78년 말 덩샤오핑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은 제11기 중앙위원회 3차 회의를 소집해서 이렇게 경제건설을 최우선 목표로 정하는 동시에 ‘4개 현대화’ 정책이라는 것을 발표했습니다. 이는 농업, 공업, 국방, 또 과학기술의 현대화를 일컫는 말입니다. 또 이를 위해 사상해방, 체제개혁, 그리고 대담한 문호개방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이 같은 개혁, 개방 정책은 오늘날 중국의 눈부신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됐다고 볼 수 있으며, 오늘날 덩샤오핑을 중국 개혁, 개방의 아버지로 꼽는 이유도 그런 까닭입니다.

주간기획 중국 개혁, 개방이 주는 북한에 대한 교훈. 오늘은 중국 경제의 현재 위상과 중국이 개혁, 개방에 나선 배경 등을 살펴봤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중국이 개혁, 개방을 시작할 당시 중국에서 살았던 재미 중국인으로부터 당시의 경험담을 들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