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부터 10일까지 남한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리는 북한 홀로코스트전 행사와 더불어 북한의 인권과 관련한 세미나도 함께 열리고 있습니다. 8일 오후 2시부터 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는 북한정치범수용소 출신으로 북한민주화운동본부에서 북한인권운동을 펼치고 있는 강철환, 안 혁 공동대표와 김영순 씨의 북한정치범수용소실태에 관한 증언이 있었습니다.
수감인들 죄목,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어

탈북자 김영순 씨는 지난 1970년도부터 78년까지 북한 요덕수용소에서 수감생활을 했고 지난해 탈북, 남한에 입국했습니다. 김영순 씨는 고위층과 많이 접촉하는 직업 때문에 결국 수용소로 끌려가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고위급들하고 많이 대상하고 또 김일성가문과 많은 대상을 하다 보니까 그에 대한 가정을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성혜림문제와 김경희, 장기순, 장성택, 이러 저러한 문제로 해서 요덕수용소로 가게 됐습니다.”
김영순 씨는 당시 서른 네 살의 나이에 7식구가 모두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15호 수용소라는 정말 피에 사무친 원한의 수옹소로 끌려갔습니다. 철조망이 쳐지고 경찰들이 지키는 그런 무시무시하고 어마어마한 그런 곳은 난생 처음 봤습니다. 서른네 살에.. 저희 식구 7명이 갔는데 어머니 아버지 아이들 넷이서 갔습니다.”
죄도 아닌 죄명 쓰고 8-10년 인간 이하의 수용소 생활
김영순 씨는 수용소에 와 있는 많은 사람들의 죄목은 그야말로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서로 불신임을 해서 서로 물고 뜯게 만들고 그 안에서도 총살을 하고, 그 안에 감옥이 있어서 또 끌어가고 이렇게 죄아닌 죄... 거기 온 사람의 죄명을 서로 아는가 물어보면 죄 있는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김일성 목에 혹이 났다고 말해서 온 사람, 또 성혜림이 하고 살았다고 온 사람, 아들을 낳았다고 온 사람, 김일성 석고상을 깨서 온 사람, 또 김일성 초상화가 있는 신문으로 장판을 해서 온 사람, 형형색색의 정말 다른 나라로 할 것 같으면 죄도 아닌 죄명을 쓰고 그런 데 가서 8년, 10년을 구류시키고 인간 이하의 벌레만도 못한 생활을 시키는 북한 당국자들이 그렇다는 걸 여러분이 잘 아셔야겠습니다.”
요덕수용소의 노동시간은 정해진 것도 없이 새벽부터 밤까지 사람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일을 시키는 곳이었고 사람이 죽어나가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식독걸린 아이 먹이려고 부모들 쥐 잡으려 애써
“거기서 장본인들은 죽으면 그날로 가마니에다 둘둘 말아서 저희 식구가 어디다 끌어 묻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아이들은 식독이 올라서 배가 볼록 나오는데 쥐의 배에 든 새끼를 잡아 먹이면 배가 좀 가라앉기 때문에 그 부모네들은 어떤 짬 시간에든지 그 큰 쥐, 어미쥐를 잡자고 애를 씁니다. 애를 먹이자고...”
두 번째 증언에 나선 안혁 씨는 대학생활 중 친구들과 중국으로 몰래 놀러갔다가 발각이 돼 요덕수용소로 갔습니다. 안혁 씨는 2년이 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수감 당시 이곳저곳 수용소를 오가던 사람들의 정보를 종합해 북한의 여러 수용소에 대한 윤곽을 알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북한에는 지금 다섯 개 이상의 정치범 수용소에 약 15만 명 정도의 정치범이 수용돼 있는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알려진 수용소는 평남 개천, 함경남도 요덕, 함경북도 화성, 회령, 청진수용소를 들 수 있습니다.”
안혁 씨는 또 함경남도 요덕수용소 출신인 사람들이 평양을 중심으로 2-3만 명 정도가 살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이들은 수용소출신자들에 대한 사회의 배타적 분위기 때문에 일단 나오면 자기들끼리 연대해 서로 협력하며 사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습니다.
요덕수용소외 다른 수용소에는 한번 들어가면 못 나와
안혁 씨는 다른 수용소는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데 유일하게 요덕수용소만 나올 수 있기 때문에 남한 정착 탈북자들 중에도 요덕 출신이 많다고 말했습니다. 안혁 씨는 또 평안남도 개천에 있는 수용소에 대해서도 증언했습니다.
“평안남도 개천에 14호 관리소가 있는데 60년대 말 사이에 김일성 체제를 반대했던 당 고위관리들, 가족들 수용이 만5천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15호 관리소는 월남자, 지주자본가, 재일교포, 당과 국가에 불만을 품을 사람들 5만 명 정도가 있습니다. 제가 수감돼 있을 때는 국가보위부 부부장, 해군사령관, 장관급들 그런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리고 월북자나 납북자들도 들어와 있었고 그래서 남한에 와서 월북자 납북자 13명을 그 안에서 봤다는 증언을 한 적이 있습니다.”
15호 관리소에서 월북자, 납북자 13명 봐
안혁 씨는 수용소안에서 각종 질병으로 사람들이 죽어 나가지만 늘 상 있는 일이어서 사람의 죽음은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거기서 폐결핵, 간, 늑막 이런 걸로 죽는 사람들이 매일 죽고 제 친구들도 많이 죽었고 거기서, 매일 죽어나가니까 오늘도 누가 죽었다 그러면 그 사람 옷이나 벗겨서 쓸 생각하지 그게 큰 문제가 되는 그런 부분은 아니었고...”
안혁 씨는 또 자신의 수감시절 있었던 공개처형에 대해서도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도망가려다 잡히면 공개처형하는데 한동안은 그랬었습니다. 그 후에 우리가 온 다음에는 어떻게 진행되는지 모르겠지만... 전체 수감자들을 다 모아놓고 총살하고 지나가면서 돌을 던지게끔 합니다. 전체 수감자들이 지나가면서 돌을 던지게 합니다.”
탈옥수 공개처형한 후 모든 수감자가 시체에 돌 던지게
안혁 씨와 현재 북한민주화운동본부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강철환 씨는 요덕수용소에서 10년을 보내고 안혁 씨와 함께 탈북해 1992년 남한에 왔습니다. 강철환 씨는 북한을 탈출한 목적은 자신이 수용소에서 보았던 만행을 폭로해야겠다는 일념에서였다고 말했습니다.
강철환 씨는 북한의 정치범수용소가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후계자가 바뀌면서 수많은 숙청자들을 가둬놓을 장소가 필요해서였다고 말했습니다.
“김정일이 후계자가 되면서 숙청된 사람들 가둬놓을 장소 필요했고 6.25때 국군과 미군을 도왔던 사람들, 기독교인들 엄청 많거든요.”
강철환 씨는 예전보다 수용소 숫자는 줄었지만 수용소내의 인권유린은 더 심해졌다고 말합니다.
“정치범수용소가 12개에서 5개정도로 줄어들었지만 나머지 5개 수용소는 더 확장이 됐고 그 수용소 내에서 가해지는 반인륜적인 만행들은 더 심각해진 거죠. 특히 90년대 중반 중국으로 나갔다가 대량으로 끌려 온 사람들 중 상당수가 정치범수용소에서 희생당했습니다.”
김정일 정권해체만이 유일한 방법
강철환 씨는 이날 북한정치범수용소의 해체방안에 대한 주제로 발표를 했지만 그 대안은 김정일 정권해체만이 유일한 방법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실은 북한수용소 해체라는 것은 김정일 정권이 해체되기 전에는 불가능하다는 것은 다 뻔 한 일이거든요.”
강철환 씨는 북한인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북한과의 교류나 지원에서 인권문제를 개입시켜 압력을 넣는 방법이 가장 최선을 방법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모든 대북지원과 북한과의 교류에 인권문제가 개입되진 않고서는 교류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강한 압력수단만이 북한을 변화시킬 수 있고, 특히 북한정치범수용소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어쩌면 북한이 경제적으로 아주 심각한 상황에 있기 때문에 대북지원의 조건을 인권문제로 하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판단하게 되는 거죠.”
서울-이장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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