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호실 리정호의 눈] “잘 나간다는 평양 시민도 돈 없고, 배고파”

0:00 / 0:00

"안녕하십니까 . 저는 북한 노동당 39호실 대흥총국 고위 관리 출신 리정호입니다"

[북한 전직 고위 관리의 경험을 바탕으로 김정은 정권과 핵심 권력층의 비밀을 파헤치고, 오늘날 북한 정책의 허와 실을 짚어보며 정치, 경제, 사회를 분석해 보는 ‘39호실 리정호의 눈’, 리정호 코리아번영개발센터(KPDC) 대표와 함께 합니다.]

“제가 평양에 있을 때, 명절에 지인들을 데리고 외화 식당에 가서 불고기와 냉면을 대접하고, 맥주를 마시게 해주니까 그중 한 사람이 “자기는 일 년 만에 처음 이런 곳에 왔다”라고 털어놨습니다.”

북한의 수도 평양에 사는 주민은 다른 지방보다 배급도 잘 받으며 잘 산다고 인식하고 있는데요. 정말 잘 사는 사람은 극소수일 뿐, 외무성 관리와 의사, 대학교수, 공장 기업소의 근로자들은 돈과 식량이 없어 빈곤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 또 북한의 명문대인 평양 외국어대학교에서 교수를 하다 우리 회사에 입사한 한 일꾼은 첫 배급을 받고 나를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했습니다 . 그는 "자기 대학의 교직원들은 몇 년째 식량 배급도 받지 못하고, 학부모들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간다"면서 "교수들이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평양이라 장사도 마음대로 할 수 없고, 당장 사는 것이 힘들어 평양을 떠나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하는데요. 북한 관영 매체가 선전하고, 북한 지방 주민이 알고 있는 평양의 모습이 전부는 아닌 듯합니다.

평양에서 잘 사는 사람은 전체 시민의 극소수

[ 기자 ] 리정호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자유아시아방송(RFA)의 취재를 통해 북한 경제가 지속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고, 특히 겨울철 혹한기에 주민들의 고통이 더욱 가중되고 있다는 사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대부분 지방에 대한 소식인데, 그렇다면 평양 시민은 이 추운 겨울을 어떻게 견디며 살아가는지 궁금합니다. 대표님의 경험담을 전해주시겠습니까?

[ 리정호 ]네, 겨울이 되면 평양은 도시 전체가 거대한 냉동 창고로 바뀝니다. 그래서 저는 겨울이 되면 가장 먼저 '평양 사람들은 이 혹독한 추위를 어떻게 이겨낼까'를 걱정합니다. 평양시에는 '평양 고려호텔'이나 '보통강 호텔' 등 외국 손님이 숙박하는 곳을 제외하고는, 어느 기관이나 공공시설에 들어가도 온기 없이 냉기만 흐릅니다. 심지어 중앙당 강연회와 주요 국가 행사를 진행하는 '인민문화궁전'도 너무 추워서 참가자들이 다 동복을 입고 있습니다. 평양시는 중앙 난방 시설이 갖춰져 있다고 하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난방열을 공급하는 '동평양 화력발전소', '평양화력발전소'의 노후화와 연료 부족 등으로 인해 제대로 가동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이 발전소들의 용량은 평양시 전체의 난방 수요를 충족하기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 결과 정전과 난방 중단은 평양 시민에게 일상이 됐죠.

또 일부 아파트는 실내 온도가 영하로 떨어지면서 물탱크가 얼어붙거나 상하수도관이 동파돼 수개월 동안 수돗물을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이로 인해 화장실조차 사용할 수 없을 만큼 일상생활이 마비돼, 주민들은 극심한 고통을 겪죠. 방 안이 추우니까 일부 가정에서는 집 안에 비닐하우스를 설치하고, 그 안에서 동복을 입은 채 살아갑니다. 또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두꺼운 동복과 양말, 심지어 동화까지 신고 냉기가 가득한 방에서 긴 겨울을 버텨내는데, 사람들이 뜨거운 물통을 껴안고 잠을 청하며 혹독한 겨울밤을 견디고 모습은 이들의 절박한 생존 투쟁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래도 조금 힘 있는 일부 사람은 방안에 석탄을 태우는 난로를 들여놓거나, 온수 보일러를 설치해 자체적으로 난방을 해결하기도 하죠. 그나마 경제적 여유가 있는 소수 가정은 중국산 태양광 패널을 설치해 전기를 확보하고, 전기 매트(장판)를 이용하거나, 일본산 석유난로를 수입하기도 하는데, 이것이 혹한을 이겨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평양 시민의 생존 모습입니다.

[ 기자 ] 상대적으로 지방 주민보다 부유하게 사는 것으로 알려진 평양 시민이 이렇게 겨울을 보낸다니 놀라운데요. 대표님께서는 평양에서 오랫동안 생활하셨는데, 외부에서 보는 것처럼 평양 시민이 실제로 '잘 산다'고 볼 수 있는지, 그들의 생활 수준은 어떤지 직접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 리정호 ] 말씀하신 대로 상대적 관점에서 보면, 평양의 생활 형편이 지방보다 더 좋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 매체가 선전하는 모습이나 외부 사람들이 겉만 보고 말하는 것과는 크게 다릅니다. 평양에도 빈부의 격차가 상당한데요. 실제로 평양에서 잘사는 사람은 전체 시민의 몇 %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무역이나 외화벌이를 해서 돈을 버는 사람들, 장사를 크게 하거나 해외를 드나들며 돈을 버는 사람들, 또는 뇌물을 받는 당 일꾼 등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도 남한의 중산층과 비교하면 생활 수준이 낮은 편이지요. 일부 사람은 이들이 지도자의 특별한 혜택을 받아 돈을 벌며 공생한다고 하는데, 그건 절대 아닙니다. 그동안 북한의 독재자들은 그 누구도 돈을 벌어 부유하게 살도록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북한은 제도적으로 사유재산권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에 개인이 자신의 능력으로 외화를 벌었다고 해도 그것을 저축하는 것은 불법입니다. 그래서 북한 지도자는 이것을 불로소득으로 규정하고, 잦은 검열과 숙청을 단행했죠. 이 때문에 돈을 번 사람들은 권력을 가진 자들과 먹이 사슬을 형성하며 걸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살아갑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잡혀가지요.

0122-2.jpeg
북한의 이탈리아 요리 전문 식당 / 연합뉴스

[ 기자 ] 북한 관영매체의 선전과 일부 외국인 관광객이 촬영한 평양시의 모습은 화려하기도 하고, 사람들이 외국인 식당이나 호텔에서 잘 먹으며 유흥을 즐기는 것으로 비칩니다. 실제 그런 모습이 맞나요?

[ 리정호 ] 실제 그런 모습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것은 평양 시민의 일상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외국인 관광객이 평양에서 찍은 영상에는 북한 주민이 식당에서 불고기와 냉면을 먹거나, 맥주를 마시고 피자를 먹으며 여유 있어 보이지만, 이는 극히 소수의 잘 사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런 식당에서 불고기를 먹고 맥주를 마시는 사람 중에는 일 년에 한두 번 갈까 말까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가 실례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제가 평양에 있을 때, 명절에 지인들을 데리고 외화 식당에 가서 불고기와 냉면을 대접하고, 맥주를 마시게 해주니까 그중 한 사람이 “자기는 일 년 만에 처음 이런 곳에 왔다”라고 털어놨습니다.

또 북한 텔레비전을 보면 평양 ‘문수 물놀이장’에서 아이들이 물놀이를 즐기는 모습이 나오는데, 제 조카가 하는 말이 “아이들이 그곳에 간다고 하면, 어머니들이 돈 걱정부터 한다”고 합니다. 문수 물놀이장의 입장료가 아이들은 미화로 2.5달러인데, 이 돈은 어른들이 두 달 일해서 받는 월급입니다. 그래서 한 학급에서도 어떤 아이는 물놀이장에 가고, 어떤 아이들은 못 가는 현상이 벌어져 울고불고 난리가 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외무성 직원, 대학 교수, 교원, 의사도 굶주려”

[ 기자 ] 또 탈북민의 말을 들어보면, 일반적으로 평양 시민은 국가로부터 식량을 정상적으로 배급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이 배급 체계가 원만히 작동하는지, 또 평양 시민이 식량을 안정적으로 공급받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대표님께서 경험하신 현실은 어땠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 리정호 ] 수십 년간 국가의 식량 배급에 의존해 살아가던 평양 시민도 1994년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배급이 중단돼 기아 상태에 직면했습니다. 처음에는 식량 배급을 한 달에 15일 분씩 주다가 점차 10일분으로 줄었고, 나중에는 아예 배급이 끊겼습니다. 어떤 때는 햇감자와 옥수수를 조금씩 나눠주기도 했는데, 시민들이 굶주려 쓰러진다는 항의 신고가 빗발쳤죠. 그 신고를 받은 김정일은 무엇보다 평양 시민부터 먼저 배급을 주라며, 황해남도 곡창 지대의 식량을 우선 배정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그럼에도 양곡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그 지시는 관철될 수 없었습니다.

이후 평양 시민은 적은 양의 식량을 배급받거나 아예 배급을 받지 못하는 것이 관례가 됐고, 이것이 2000년대와 2010년대까지 쭉 이어졌습니다. 그나마 배급받은 쌀도 정미가 제대로 안 돼 쌀 속에 벼와 돌, 겨가 많이 섞여 있었는데, 이것마저 받지 못하면 굶어 죽기 때문에 아침부터 쌀자루를 들고 저녁까지 배급소 앞에 길게 줄을 서서 기다렸습니다. 어떤 때는 감자와 강냉이로 배급을 주기도 했죠.

2000년대에는 중앙당에서 퇴직한 간부 7명이 식량 배급을 받지 못하고, 식량도 구하지 못해 굶어 죽는 비참한 참사도 벌어졌고요. 비슷한 시기 우리 아파트에 살던 중구건설사업소 간부의 가족은 성인이 6명이었는데, 하루에 두 끼만 먹는다고 했습니다. 또 평양 빙상관 간부의 가족도 배급을 제대로 받지 못해 식량난과 경제난에 허덕였는데, 오직 배급에만 의존해 살아야 했던 그들은 통제가 심해 장사도 맘대로 못 한다고 한탄했고 텃밭도 없으니, 농사도 할 수 없다며 하소연했습니다. 또 평양 시내 공장, 기업소들의 근로자들과 사무원, 교원, 의사, 연구원들도 배급을 받지 못해 굶주려 쓰러지는 현상들이 매년 발생했는데요. 이런 상황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0122-3.jpeg
쿠바 주재 북한대사관에서 근무하다 2023년 11월에 망명한 리일규 전 참사. 그는 “외무성에 근무할 당시 월급이 미화로 0.3달러”였다며, ‘걸맞은 보수를 받지 못하고 활동하는 북한 외교관은 넥타이를 맨 꽃제비’에 비유했다. / RFA photo

[ 기자 ] 쿠바 주재 북한대사관에서 근무했던 리일규 전 참사도 여러 언론매체에서 "북한 외무성 사람들은 넥타이를 맨 꽃제비"로 비유하기도 했죠. 그렇다면 대표님이 근무했던 노동당 39호실 '대흥총국' 사람들의 식량 공급과 생활 형편은 어땠나요?

[ 리정호 ]제가 근무했던 대흥총국은 본부에 약 400명이 있었고, 무역 부분과 생산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각도, 시군에 수백 개의 산하 단위를 뒀고, 전체 종업원의 수가 수만 명에 달했는데, 거기서 제가 무역선박회사를 운영하는 사장으로 5년, 전체 무역을 책임지는 총사장을 7년간 역임했습니다. 그런데 고난의 행군 시기에 전국의 배급 체제가 무너지자, 김정일은 무역과 외화벌이를 하는 모든 기관은 자체적으로 식량을 수입해 공급하라는 방침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대흥총국'은 김정일의 방침에 따라 1995년부터 식량을 중국에서 자체적으로 수입해 직원들에게 공급했고, 새해를 비롯해 5대 명절에는 직원들에게 식용유, 돼지고기, 사탕가루, 물고기 등을 나눠줬습니다. 그리고 김장 때는 집마다 배추와 무, 소금을 공급했는데, 이는 평양시에서도 다른 기관에 비해 매우 잘해주는 편이었습니다. 실례로 1999년경 외무성 기구가 축소되면서 우리 회사에 두 명이 배치됐는데, 그들은 외무성의 식량 배급과 명절 공급 실태가 매우 한심하다고 토로했습니다. 외무성이 그 정도면 다른 기관들은 더 한심한 거지요.

또 북한의 명문대인 평양 외국어대학교에서 교수를 하다 우리 회사에 입사한 한 일꾼은 첫 배급을 받고 나를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했습니다. 그는 “자기 대학의 교직원들은 몇 년째 식량 배급도 받지 못하고, 학부모들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간다”면서 “교수들이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총국의 일부 사람은 “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수 있느냐”라며 삶의 질을 위해 고기와 수산물, 생필품도 공급해 줄 것을 제기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담배가 없어 농촌에서 잎담배를 구해다 피우기도 했습니다. 같은 청사에서도 무역 일꾼들은 일본산 담배인 ‘세븐’을 피우는 반면, 생산 부분 일꾼들은 여과봉이 없는 낙후한 담배를 피웠습니다. 이는 힘 있는 기관의 평양 사람이라고 해도, 풍족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굶주림과 생활고 이기지 못해 평양 떠나기도

[ 기자 ] 그렇다면 평양 시민은 식량 외에 다른 식료품이나 생필품을 어떻게 해결하나요?

[ 리정호 ] 북한에는 '국가가 주민에게 식량과 기초 생활품을 공급한다'라는 노동당의 정책이 있습니다. 그 정책에 따라 평양시에는 동마다 주민들의 편리를 위한 식료품 상점, 공업품 상점, 야채 상점 등이 있죠. 우리 집이 있던 평천 구역 안산 1동 식료품 상점에서는, 품질은 좋지 않았지만 매달 기초식품인 된장과 간장, 식용유, 당과류를 공급해 줬습니다. 또 공업품 상점에서는 치약, 칫솔, 비누, 세면 수건, 신발, 속옷, 학습장 등을 공급해 줬고, 야채 상점에서는 과일과 채소도 조금씩 보장해 줬습니다.

물론 이 상품들은 한국 기준으로 보면, 질이 형편없고 그 수준이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런 물건조차 받지 않으면, 외화를 갖고 있지 않는 이상 살아갈 방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1994년 이전의 이야기입니다. 그 이후 우리 집은 다른 곳으로 이사했는데, 그때부터 상품 공급이 중단되다시피 했고, 이따금 된장과 간장만 공급됐습니다. 또 명절 때에는 식용유 300~500g, 당과류 500g, 고기 500g, 술 한 병 등을 보장해 줬는데, 이것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4.jpg
대규모 신규 주택이 들어선 북한 평양 화성지구 / 연합뉴스

[ 기자 ] 그래도 북한 주민 중에는 평양에 사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거나, 또 평양에서 살고 싶은 주민도 있겠죠. 평양 시민의 삶도 그렇게 녹록지 않다고 말씀하셨는데, 김정은 정권에 평양은 매우 중요하고, 특별한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평양이 이렇게 달라져야 한다'는 대표님의 조언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 리정호 ]대부분 북한 사람이 수도 평양에서 사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평양은 생활 환경과 상업, 교통, 교육 조건 등이 지방보다 훨씬 좋기 때문에 식량난, 경제난 등으로 고통을 당해도 '혹시나' 하는 희망을 가지며 버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 평양 시민은 당장 사는 것이 힘들고, 돈벌이도 마음대로 할 수 없어 평양을 떠나 지방으로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평양은 이동과 경제 활동이 자유롭지 않은, 폐쇄된 도시입니다. 김정은 정권도 평양을 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으면,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D.C.나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처럼 도시를 전면 개방하고 북한 사람에게 이동의 자유와 경제 활동의 자유를 보장해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자]네. 지금까지 북한 노동당 39호실 고위 관리 출신인 리정호 코리아번영개발센터 대표와 함께 '외부에서 인식하는 평양의 모습과 실제 평양 주민의 생활'에 대해 짚어봤습니다. 리정호 대표님,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노정민입니다.

에디터 박봉현, 웹편집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