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 당국의 단속과 통제 강화로 정보의 공유가 차단된 북한에서 오늘은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내부 취재협조자를 통해 북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현상 등을 신속하고 깊이 있게 전하는 '북한 통신', 일본 '아시아프레스' 오사카 사무소의 이시마루 지로 대표와 함께합니다.]
북한이 전국적으로 ‘통일’ 지우기에 나선 가운데 북한 군인들이 직접 페인트를 사서 ‘통일’ 문구를 지우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양강도 혜산시에는 지난 4월부터 페인트를 구매하려는 군인들로 붐볐다고 하는데요. 혜산 시내부터 백두산 밀영, 삼지연 등 주요 혁명유적지와 김일성, 김정일의 교시 등에 적힌 ‘통일’ 문구 지우기 작업에 투입됐다고 합니다. 정작 북한 주민은 당혹감 속에 혼란스러워한다고 하는데요.
뿐만 아니라 함경북도 라선시에는 한국 현대자동차로 운영하던 택시가 큰 인기를 끌었는데, 최근 이 택시를 모두 폐차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이는 단순히 ‘통일’ 지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한국과 철저히 단절함은 물론, 선대로부터 김정은 총비서를 차별화해 신격화하려는 움직임일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혜산시에 중국산 페인트 구매하려는 군인들로 붐벼
[ 기자] 이시마루 지로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요즘 북한에서 '통일' 문구 지우기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요. '아시아프레스'에서 북한의 통일 지우기 노력에 대해 알아보셨죠? 실질적으로 어느 지역에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 이시마루 지로] '아시아프레스'에서 처음으로 '통일' 지우기에 관한 구체적인 움직임을 파악한 때가 지난 4월 하순이었습니다. 북한 양강도, 함경북도에서 소식을 전해왔는데, 우선 양강도 혜산 시내에 군대 병사들이 페인트를 구매하기 위해서 많이 올라왔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군대가 왜 이렇게 페인트를 많이 구매하려고 올라왔냐'고 물어보니까 처음에는 '군부대 꾸미기'라고 했었대요. 그런데 자세히 조사해 보니까 그게 아니고요. 사실은 '조국 통일'과 관련된 문구나 구호 등을 페인트로 지우기 위해서, 아니면 문구를 새로 쓰기 위한 작업을 위해서 군대가 혜산 시내에 들어와 페인트 구매에 나선 거죠. 또 그 인원수가 많았다고 하니까 아마도 넓은 범위에서 작업에 들어간 것 같아요.
사실 코로나 대유행 이후 군대와 일반 주민 사이에 접촉이 많이 제한됐습니다. 시내를 돌아다니는 군인의 모습도 최근에는 많이 줄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4월 중순 이후 군인들이 많이 나타나서 뭔가 이상하다 싶어 알아봤더니 통일 문구를 지우기 위해서라는 거였어요.
또 우리 북한 내부 취재협조자가 더 자세히 알아봤는데, 양강도는 아무래도 혁명유적지가 많지 않습니까. 백두산이 있고, 삼지연도 있고요. 그런데 백두산 밀영 같은 곳에는 조국 통일과 관련한 비석도 많고 김일성, 김정일의 말씀, 교시 등을 그대로 써놓은 여러 기념비나 시설 등에 통일 관련 문구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걸 다 없애라’는 지시가 있어서 비석, 구호는 물론 실제로 김일성, 김정일이 말했던 교시와 말씀까지 통일과 관련된 것은 일단 다 없앴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혜산 시내도 마찬가지로 지난 4월부터 통일에 관한 구호를 다 없애는 작업에 들어가서 지금은 거의 없어졌다고 합니다.
[ 기자] '통일'이라는 단어를 하나하나 다 지우려면, 그 작업량이 상당했을 것 같은데요.
[ 이시마루 지로] 그렇겠죠. 그래서 시간도 오래 걸리고, 페인트도 상당량이 필요할 겁니다. 물론 북한에도 국산 페인트가 있다고 하는데, 질이 나빠서 중국산 페인트를 구하기 위해 혜산시까지 많이 들어왔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최근에는 장마당에서 중국산 페인트를 판매하지 않는답니다. 중국산 물품이 거의 없어졌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이건 제 개인적인 견해인데, 아직 중국산 페인트를 갖고 있는 기업소나 조직, 기관 등을 돌면서 페인트 구매에 나섰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 기자] '통일'이라는 문구가 있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중에서도 좀 특이한 지역이라든가, 상징적인 건물 등에서도 통일 지우기에 나선 움직임이 있었나요?
[ 이시마루 지로]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는 건물인지, 어떤 기념비인지 등의 설명은 없었습니다. 다만, 김일성, 김정일의 말씀이나 업적, 유훈 등과 관련된 것은 그 누구도 다치게 할 수 없는, 다시 말하면 북한에서 '제1호 문구'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을 지우고 있다는 것이 북한 주민에게는 매우 당황스럽고 상당한 충격이었다고 합니다. 군대에서도 '통일 구호를 지운다', '김일성, 김정일의 말씀과 지시, 유훈을 지운다'는 것은 당연히 독단적인 판단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김정은 총비서의 승인과 지시가 없으면 못 할 일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민들이 아주 혼란스럽고, 당황해하면서도 '왜 이런 일을 할까'라는 말을 조금씩 한다고 합니다.
교양 사업에서도 ‘통일’ 지우기… 라선시에서는 ‘현대차’ 택시도 폐차
[ 기자] 지금 북한에서 진행하는 '통일' 지우기 노력에 대한 북한 주민, 취재협조자들의 반응을 전해주셨는데요. 단순히 문구를 지우는 것 외에 어떤 노력이 있나요?
[ 이시마루 지로] 눈에 보이는 '통일' 구호와 문구를 지우는 것뿐만 아니라 지난 5월 초순부터는 여러 조직과 기관에서 통일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반통일', '반한국'에 관한 교양 사업이 상당히 많아졌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혜산시에서는 지난 5월 11일 토요일에 여성동맹 토요 강습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여기에서도 통일 지우기 내용이 있었다고 하고요. 이걸 '김정은의 위대성'을 선전하는 것과 함께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다시 말해 조국 통일이라는 것은 김일성, 김정일 시대에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구호이자 이념이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제는 선대의 유훈, 업적을 지우게 된 겁니다. '이는 지나간 이야기고, 새로운 김정은 시대가 지금부터 시작됐다', '우리는 김일성, 김정일보다 위대한 김정은 원수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도 동시에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통일 지우기는 자연적으로 김일성, 김정일을 격하시키는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고, 동시에 김정은에 대한 격상, 그러니까 더 위대한 시대가 시작됐다는 식의 선전이 함께 진행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구체적인 정보가 들어왔는데요. 함경북도 라선시에 아마 2015년 이전에 들여온 한국의 현대자동차를 택시로 사용해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최근 이 현대자동차 택시를 다 폐차시켰다고 해요. 사실 2015년 이전에 들여왔다 해도 아직 현역으로 사용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현대자동차가 성능이 좋아서 라선시에서도 인기가 많았다고 하는데요. 그걸 모두 폐차시켰다는 이야기를 라선시에 사는 사람에게서 들었다고 함경북도에 사는 취재협조자가 전해왔습니다.
[ 기자] 대표님, 이것은 단순한 통일 지우기가 아니라 김정은 총비서를 할아버지, 아버지와 차별화하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하나의 수단일 수 있고요. 또 하나는 북한 주민들로부터 한국에 대한 환상과 이미지를 완전히 떨쳐버리려는 의도가 있는 것 같거든요. '이제 한국과 통일은 꿈도 꾸지 마라', '한국에 대해서는 이제 생각도 하지 말라'는 시도인 것 같은데요.
[ 이시마루 지로] 작년 말부터, 그리고 지난 1월 15일 최고인민회의에서 김 총비서의 연설을 보면, '반통일', '반한국', 그리고 '(한국은) 같은 민족도 아니다'라는 것을 분명히 하지 않았습니까. 역시 한국과 관계를 100% 철저히 단절하려는 것을 실행 중임을 이번 조사를 통해 알 수 있었다고 봅니다. 한국에 관한 정보, 물건, 통일이라는 구호 자체를 아주 철저하게 없애고 있는 거죠. 그만큼 김정은 정권에서 한국에 대한 경계심, 다시 말해 공포심일 수도 있고요. 이대로 한국에 관한 정보 유입을 방치하면 정말 체제에 위험이 생길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겠죠. 그런데 이렇게 짧은 기간에 싹쓸이하듯이 철저히 없앤다는 것 자체가 충격적인데요. 그건 주민들 반응도 마찬가집니다. 특히 김일성, 김정일의 말씀까지 다 없앤다는 것은 지금까지 있을 수 없던 일 아닙니까. 일반 북한 주민도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당황할 수밖에 없고, 실제로 그런 작업에 대한 지시가 있었던 것에 대해 많은 사람이 '이게 뭐냐'라는 말도 있었고, 아주 혼란에 빠지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 기자] 지난 4월부터 이런 움직임이 시작됐으면, 지금쯤 거의 작업이 끝났을까요?
[ 이시마루 지로]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삼지연과 백두산 밀영 등에는 여러 기념물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 비석 자체를 없애거나 문구를 바꾸는 것은 상당히 큰 작업이 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조금 더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생각하는데요. 아직 작업이 끝났다는 소식은 없습니다.
[ 기자] 네, 오늘은 일본 '아시아프레스' 오사카 사무소의 이시마루 지로 대표와 함께 최근 북한에서 진행 중인 '통일' 문구 지우기에 대한 노력과 움직임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이시마루 대표님,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에디터 박봉현, 웹 한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