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보릿고개를 맞아 힘든 상황에 빠진 북한 주민이 늘고 있는 가운데 김정은 정권도 나름 대책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지원이 턱없이 부족한 데다 지원 대상의 선정 기준도 모호하고, 당국이 져야 할 부담을 주민에게 전가해 불만만 커지는 분위기입니다.
이런 가운데 북한이 식량난 극복의 해결책으로 ‘과학 기술’을 접목한 농업기술 개발을 내세우고 있지만, 정작 북한 주민과 전문가들의 반응은 시큰둥합니다.
[RFA 긴급진단, 북한 보릿고개] 오늘은 세 번째 시간으로 보릿고개를 맞아 북한 당국이 내세운 대책과 이에 대한 문제점은 무엇인지 한덕인 기자가 짚어봤습니다.
북 당국 , 세대별 조사 거쳐 식량 지원
자유아시아방송(RFA)은 일본 ‘아시아프레스’의 북한 내부 취재협조자를 통해 지난 4월 초부터 10일까지, 보릿고개 시기에 대한 북한 당국의 대책을 들어봤습니다.
‘도시주민 가운데 취약계층을 중심으로 사망자가 나올 만큼 심각한 상황인데, 북한 당국은 어떤 대책을 내놓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양강도의 취재협조자는 “인민위원회 지시로 동사무소에서 인민반별로 나와 생활이 어려운 집들을 조사한 다음 부양가족이 없는 경우에만 식량을 준다”고 답했습니다. 인민반장이 지원 대상을 선정하고 일주일 치 옥수수를 가져다준다는 겁니다. “하지만 모두 생활이 어렵기 때문에 기준을 제대로 정하지 못하고 있다”고 이 취재협조자는 덧붙였습니다.
양강도의 또 다른 취재협조자도 “농촌에도 생활이 어려운 사람이 많은데, 농장 당위원회가 생활이 어려운 농장원과 문제가 있는 대상을 잘 관리하라”는 상부의 지시가 있었다고 전했습니다. 이에 따라 당위원회가 봄철을 맞아 각 분조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조사하고 있다는 것이 이 취재협조자의 설명입니다.
하지만 당국의 대책이 오히려 주민들의 불만을 불러오는 분위기가 내부에서 감지됐습니다. “다 똑같이 힘든데 왜 저 사람만 도와주냐”는 겁니다.
‘아시아프레스’ 오사카 사무소의 이시마루 지로 대표는 (4월 11일) 자유아시아방송에 당국이 져야 할 부담을 주민들에게 전가하는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 이시마루 지로 ] 지역마다 제일 어려운 사람들을 정부 기관에서 도와주라는 지시가 있어서 (대책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고, 제일 어려운 사람들에게 조금씩 식량을 주기도 합니다만, 지금은 도시 주민 전체가 어려워지고 있으니까 "왜 그 집만 주고 우리 집은 안 주는가"란 불만도 있고, 그것도 충분하지 않아서 주민들에게 부담시킵니다. 당국에서 "어려운 집을 도와줘야 하니까 옥수수 몇 kg씩 내라"든지, "기업소에서 당원들이 어렵게 사는 노동자 가정을 지원하라"든지, 그러니까 정부가 책임져야 하는 부분을 포기하고, 지역 주민들에게 무리하게 지원을 강요하고 있는 셈이죠.
또 혼자 살거나 가족이 집을 나간 경우 혹은 부양할 가족이 없는 취약계층에 식량을 준다는 말도 있지만, 조사 당시까지 아직 공급받지 못한 가정도 있는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오히려 인민반과 공장기업소마다 농촌지원 사업을 진행하는 가운데, 기업소는 호미와 삽 등 영농물자를 마련하고, 인민반은 장갑과 작업복 등을 준비해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주민들의 부담이 더 커진 것으로도 전해졌습니다.
북 당국은 '과학영농'만 강조, 전문가들 "그게 아닌데…"
이런 상황에서 북한 당국은 식량난의 대책으로 ‘과학영농’을 내세우는 모양새입니다.
최근 북한 매체에서 나오는 보도들을 보면 북한은 식량난 해결을 위해 '과학 농업', '과학 축산' 등 식량 생산 체계의 전반에 걸쳐 ‘과학’을 접목한 ‘첨단 기술 개발’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부터 북한 농업체계를 주시해 온 전문가들은 북한 당국이 강조하는 ‘과학적 방식’이 만성적 식량난의 대책이 될 수 없다고 지적합니다.
특히 북한 당국이 ‘첨단농사 기술 개발’을 대내외적으로 피력하고 있지만, 실제 언급된 관련 기술은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지적도 많습니다.
식량안보 전문가인 제리 넬슨(C. Jerry Nelson) 미국 미주리대 명예교수는 (4월 11일) 자유아시아방송에 “앞서 북한이 추진한 여러 농업 정책들은 ‘사람들은 먹이는데’ 있어 여러 가지 면에서 실패했고, 이제 그 실수를 바로잡기 위한 당국의 노력이 진행되는 것으로 보인다”는 말했습니다.
하지만 넬슨 교수는 “현재 북한에서 말하는 ‘고급 농업 기술’은 선진국이 말하는 기술과는 많이 다르다”며 “북한의 것은 초보적이고 매우 일반적인 정도”(elementary and very generic)라고 평가했습니다.
한국의 권태진 GS&J 인스티튜트 북한∙동북아연구원장도 같은날 RFA에 “북한이 추진하고 있는 첨단농사는 '첨단'이라고 할 수 없는 '중간' 수준의 기술을 적용하는 것”이라고 평가절하했습니다.
권 원장은 북한이 곡물 육종뿐만 아니라 채소, 원예, 과수, 축산 등 관련 분야 전반에서도 여러 선진국에서 일반화된 기술을 아직 활용하지 못하는 등 전반적인 기술 수준이 낮다고 꼬집었습니다.
또 그는 “겉보기에 그럴듯하다고 해서 무조건 첨단은 아니다”라며, “북한은 아직도 농사에 필요한 종자와 비닐, 비료, 농약, 농기계조차 부족해 목표로 한 농산물을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라고도 말했습니다.
미국의 북한경제 전문가인 마커스 놀랜드(Marcus Noland)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 부소장도 (11일) 자유아시아방송에 과거부터 북한은 특유의 ‘주체사상’ 아래 농업뿐 아니라 경제 분야 전반에 걸쳐 과학과 기술 발전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를 중요하게 여겨왔다며, 북한의 첨단 농업 기술에 대한 강조도 지난 70년 동안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놀랜드 부소장]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북한이 농업 생산력을 회복하고 , 이를 늘리거나, 전반적인 번영을 되찾는 것이 과학적 발전이나 기술적 진보에 기반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북한은 예전부터 이런 개념을 강조해 왔습니다. 사실 그 중요성을 더욱 과장해서 강조해 왔고, 물질적 보상의 역할은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키노 요시히로 일본 아사히신문 외교전문기자도 (12일) 자유아시아방송에 농업 기술의 수준을 떠나 북한의 배급제도와 같은 ‘불공정한 사회 운영 체제’가 문제의 뿌리라고 지적했습니다.
[마키노 요시히로 ] 북한 농업은 문제가 많이 있죠 . 일단 중국에서 비료와 같은 여러 가지 농자재를 수입해야 하는 문제가 있고 요 . 그런데 이런 무역과 같은 경제적인 활동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너무 심각한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 그것은 북한의 배급제도 같은 , 사회를 너무 불공정하게 운영하는 체제입니다 . 그러니까 사람들이 일하면 일할수록 좋은 결과를 얻어낼 수 있다는 당연한 논리가 통하지 않는 나라라서 말입니다 .
전문가들은 북한의 식량난이 단순히 생산량 부족으로 생긴 문제가 아니라,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방면의 지식과 경험을 종합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외부 식량 지원이 ‘최선의 대책’”
일부 전문가들은 김정은 총비서도 보릿고개에 대한 고민이 깊을 것으로 관측합니다.
북한 당국이 지난 2월, 이례적으로 농업 문제만을 논의하기 위해 당 전원회의를 소집할 만큼 북한이 마주한 식량난의 수위가 매우 심각한 것 같다는 분석도 제기됐습니다.
특히 보릿고개 시기에는 군대뿐 아니라 돌격대와 건설 전문 일꾼들에게 줄 식량까지 부족할 수 있는데, 오는 9월 수확 때까지 국가가 보유한 쌀이 바닥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보입니다.
따라서 김정은 정권이 하루빨리 국제사회의 인도적 지원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최선의 대책일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이시마루 지로] 중국을 중심으로 해외에서 도입하지 않는 한 (식량난은)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국내 생산만으로 식량도, 일반 소비품도 충분치 않은 시기가 지금부터 9월까지 지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많이 걱정합니다. 이제부터 북한 당국에서 어떤 정책을 취하려고 하는지, 그에 따라 인도적 위기가 더 심해질 수도 있고요. 그래서 지금부터 한 몇 개월 동안은 북한 내부 상황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권태진 원장도 북한이 가장 현실적으로 식량난을 해결하는 방법은 ‘농법의 변화’보다는 ‘정책의 변화’를 통해 외부에서 부족한 양의 식량을 도입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권 원장은 “북한이 핵 문제를 해결 가능한 방식으로 풀어가면 곧바로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국제사회의 협력이 실행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또 북한 주민이 스스로 식량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국제사회의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지만, 북한 당국도 국제사회와 교류와 협력을 통해 식량난을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는 전문가들의 지적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보릿고개 시기를 겨우 버텨가고 있는 북한 주민에게 김정은 정권이 실질적이고 효과적인 대책을 내놓아야 할 시점입니다.
기자 한덕인, 에디터 노정민,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