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MZ세대 “한국 드라마로 ‘프로포즈’ 배웠어요”

북한 신부와 신랑이 북한 평양의 모란봉 언덕에서 결혼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북한 신부와 신랑이 북한 평양의 모란봉 언덕에서 결혼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 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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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지난해 목선을 타고 탈북한 30대 탈북민은 북한에서 텔레비전으로 직접 한국 드라마를 시청했고, 당시 '프로포즈'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MZ세대’라 불리는 북한의 젊은층 사이에서는 여전히 한국 드라마를 접하고, 연인에게 꽃다발을 선물하거나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등 남녀 간의 연애 문화가 많이 바뀐 것으로 나타났는데요. 한국 문화가 북한 젊은이들의 생각과 행동 변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줬다는 분석입니다.

자세한 내용을 서혜준 기자가 보도합니다.

" 집에서 텔레비전으로 한국 드라마 시청했어요"

2023년 5월 7일, 북한 황해남도 해주시에서 목선을 타고 탈북한 김일혁 씨.

그는 최근(5월 31일) 자유아시아방송(RFA)에 “군사분계선과 가까운 황해도에서는 한국 방송 수신이 가능했다”며, “고향에 살면서 텔레비전으로 한국 드라마를 봤다”고 밝혔습니다.

[ 김일혁] 제가 본 방식과 다른 분들의 방식이 좀 다른 게 뭐냐하면 저는 채널을 이용해서 봤거든요. 다른 분들은 USB를 통해서 보더라고요. 제가 살던 곳이 황해도라, 한국의 파주 위쪽이거든요. 38선이랑 가까운 위치라 한국에서 나오는 방송이 잘 잡힙니다. 그러니까 TV를 시청한 거죠.

김 씨는 한국 드라마에서 접한 남녀 간의 연애 방식이 가부장적인 북한 사회와 달랐다며, 이 같은 내용이 북한의 ‘MZ 세대’, 즉 젊은층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 김일혁] (한국 드라마에서) 여자친구를 배려해주고 차문까지 열어주는 남자들이 있잖아요. 그런 내용을 보면서 그게 그냥 좋아 보이더라고요. (북한이) 가부장적인 게, 북한에서는 흔히 '여자는 50% 짜리'라고 표현합니다. 근데 저도 한국 콘텐츠(드라마)를 보면서 배우고 받아들인 점이 많거든요. 그걸 놓고 볼 때 이 콘텐츠를 본 사람들은 저처럼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또 그는 최근 북한에서 남성이 여성에게 청혼하는 것을 뜻하는 ‘프로포즈’에 대한 단어도 처음 알게 됐다고 덧붙였습니다.

[ 김일혁] 원래 '프로포즈'가 어떤 말인지 몰랐죠. 근데 젊은 애들은 '프로포즈'가 뭔지 알았어요. '프로포즈 받았어?' '프로포즈 어떻게 했어?' 이런 이야기를 하거든요. 공공장소에서 노골적으로 하는 얘기는 아니고, 가까운 친구들끼리 모여 앉으면 그런 얘기를 하는데 흔히 '프로포즈'라는 개념을 압니다. 여자에게 꽃다발을 안겨주면서 '오빠랑 결혼할래?'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그런 남자 애들도 있고요.

RFA가 접촉한 또 다른 북한 내부 소식통도 “한국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려진 매력적인 남성들의 애정표현이 북한 시청자에게 영향을 미쳤다”라며 “젊은 북한 남성들이 요리와 청소, 연애 등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특히 북한의 젊은 세대가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 내용이 북한 상황과 완전히 반대이기 때문이란 게 이 소식통의 설명입니다.

2017년까지 북한에 있었던 20대 탈북 여성 장재인(신변안전을 위해 가명 요청) 씨도 과거 북한에서 생일이나 기념일 등에 남성이 여성에게 꽃다발을 몰래 준비해 ‘깜짝 축하’를 해주는 경우도 있었다고 회상했습니다.

장 씨는 특히 북한 연인들 사이에 “애정표현은 어색하다”는 인식이 있어 표현에 서툴렀지만, 한국 드라마의 영향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하는 연인들도 많았다고 덧붙였습니다.

또 과거에는 여성이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면, 최근에는 남성들이 밥을 짓거나 빨래하는 모습도 볼 수 있는데, 이처럼 성별에 대한 인식에도 변화가 생긴 것이 오늘날 북한의 상황이라며, 이는 한국 드라마의 영향을 비롯해 북한의 경제적 상황과 주체가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장 씨는 설명했습니다.

여성들이 장사에 뛰어들고 집안에서 차지하는 경제적 비중이 커지자, 남성들이 집안일을 거들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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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평양의 한 공원에서 배드민턴 라켓을 들고 산책하는 북한 남성과 여성. / AP (Ng Han Guan/AP)

북한 당국의 강력한 통제에도 한국 문화 단절 어려워

이처럼 한국 드라마와 영화 등이 젊은층을 중심으로 북한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커지자, 북한 당국은 ‘반동문화사상배격법’, ‘평양문화어보호법’ 등을 제정하면서 적극적인 차단에 나섰습니다.

탈북민 김일혁 씨는 북한 당국이 외부 정보를 통제하기 위해 최악의 경우 총살형에 처하는 등 처벌이 무거워지자, 한국 드라마와 문화를 접하는 사람이 많이 줄었다고 전했습니다.

일본의 언론매체인 ‘아시아프레스’의 이시마루 지로 오사카 사무소 대표도 지난 3일 RFA에, 과거에는 북한의 젊은 세대가 적극적으로 외부 영상을 접하고 이를 서로 교환하기도 했지만, 지난 몇 년간 북한 당국이 처벌을 강화한 이후 이같은 시도가 현저히 감소했다고 밝혔습니다.

[ 이시마루 지로] 젊은 사람들이 무서운 줄 모르고 아주 적극적으로 (한국 드라마를) 교환도 하고 서로 보여주기도 하고 연습도 한다"라는 말을 북한 주민들이 일반적으로 많이 하더라고요. 그런데 북한의 처벌 강화 때문에 최근에는 많이 조용해졌다고 합니다. 젊은 사람들 조차도 드라마를 보려고 하거나, 드라마를 보고 싶어서 이를 구하려고 하는 등의 움직임이 많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북한이 한국 드라마를 비롯해 외부 정보를 완전히 차단하기는 어려울 것이란 관측도 나옵니다. 여전히 뇌물을 주면 단속과 처벌을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김일혁 씨는 “북한은 ‘뇌물의 왕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안전원 또는 보위원에게 뇌물을 주면 한국 드라마에서 배운 단어나 행동으로 단속이 되었다 해도 쉽게 넘어갈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 김일혁] 뇌물이면 다 통하고 돈이면 다 해결됩니다. 평소에 경찰관들이 제게 빚도 지고 살 정도였으니까요. 오히려 만나면 저한테 "형, 용돈 다 떨어졌어"라면서 매달릴 정도였거든요. 제가 입을 열면 본인들도 피해를 입을 게 뻔한 일이라…, 실수를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괜찮았고 지금까지 처벌받을 위기까지 가보지 않았습니다.

북한의 내부 소식통도 “여전히 돈이 있으면 한국 드라마를 볼 수 있다”고 전했습니다.

이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의 젊은층은 당국의 강력한 단속에도 여전히 외국 정보를 접하고 있으며 단속 요원들에게 눈을 감아주는 대가로 뇌물을 주기도 한다는 겁니다.

또 “안전원, 보위원 등 단속 요원들은 단속을 하면서 뇌물을 받아 생계를 유지하기 때문에 오히려 단속이 강화될수록 더 많은 젊은이들이 한국과 외국 드라마를 시청한다”고 이 소식통은 덧붙였습니다.

한국을 비롯한 외국 문화에 대한 북한 당국의 단속이 강화됐지만, 젊은 MZ세대를 중심으로 여전히 외부 정보에 대한 수요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이들의 행동과 생각, 나아가 북한 사회에 미칠 영향도 계속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에디터 노정민, 웹팀 한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