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특집: ‘한국전 예수’ 카폰 신부의 귀향] ① 70년만에 기적처럼 확인된 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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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남북한 사이에 벌어진 6.25 한국전쟁의 비극 속에서 인류애의 사랑을 몸소 실천했던 미 육군 장교 에밀 카폰 신부의 유해가 70년 만에 확인됐습니다. 성공 확률 50%에 불과한 DNA 검사와 흉부 엑스레이, 치아 비교 등을 거친 끝에 기적적으로 신원이 밝혀진 겁니다.

카폰 신부가 숨질 당시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정보가 공식 기록에서 누락된 탓에 그의 귀향까지는 70년이나 걸렸는데요. 하지만 카폰 신부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렸던 사람들에게는 가장 기쁜 소식이 됐습니다.

[RFA 6.25 특집] '한국전 예수' 카폰 신부의 귀향, 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 유해의 확인 과정부터 그의 생애를 노정민 기자가 돌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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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카폰 미 군종 신부

DNA 분석∙흉부 엑스레이 등 흥분됐던 유해 확인 과정

[진주현 박사] 대부분 한국전 실종자의 유해는 나이가 어립니다. 18~23세인데, 이분의 유해는 나이가 적어도 30세는 넘은 것으로 추정됐고요. 키도 상당히 컸습니다. 이렇게 나이가 많고, 키가 큰 사람이 많지 않아서 어느 정도 범위를 좁힐 수 있었는데, 놀랍게도 DNA 검사 결과가 나왔고 '한국전 실종자 데이터베이스에 딱 한 사람이 맞는다. 이분이 카폰 신부님이다'라는 이메일이 왔어요. 그 이메일을 보다가 순간 '아~ 이분이구나.' 아직도 그 기억이 납니다.

미 국방부 산하 실종자 확인국(DPAA)에서 유해 발굴과 신원 확인을 총괄하는 한국계 진주현 박사는 지난 2월, '한국전의 예수'라 불리는 에밀 카폰(Emil Kapaun) 신부의 유해가 확인된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2018년 여름부터 미국 하와이의 펀치볼 국립묘지에 있는 867구의 무명 용사의 묘를 개장하고 유해를 꺼내 신원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고, 키가 큰 유해를 발견한 것이 역사적 만남의 시작이었습니다.

진 박사는 모든 유해 감식 과정이 그렇듯이 이번에도 키와 나이, 성별, 사망 이유 등을 먼저 분석했습니다. 동시에 DNA 샘플을 채취했는데, '검사 결과가 잘 나올까'라는 불안함도 있었습니다. 펀치볼 국립묘지에 안장된 유해는 이미 방부 처리됐기 때문에 유전자 검사가 성공할 확률이 50%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유해에서는 DNA 분석 결과가 나왔고, 실종자 명단에 있는 카폰 신부와 유일하게 일치했습니다.

이때부터 실종자 확인국은 흥분과 긴장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한국 전쟁 당시 포로수용소에서 자신보다 다른 병사들을 지극정성으로 돌봤고 수많은 생명을 구하며 이웃사랑의 정신을 몸소 실천했던 카폰 신부의 유해 확인이 70년 만에 이뤄지지는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으로부터 최고 영예인 명예 훈장(Medal of Honor)까지 받았고, 연방의회에서도 여러 해 전부터 유해에 대한 문의가 꾸준히 이어지면서 기대감이 큰 탓도 있었습니다.

[진주현 박사] 일단 내부에서 먼저 소문이 돌죠. 이분의 신원이 확인될 것 같다. 그런데 저는 정말 조심스러웠어요. 왜냐하면 항상 유족이 먼저 알아야 하거든요. 이 케이스는 워낙 관심이 컸기 때문에 혹시 신원 확인 절차가 끝나기 전에 소문이 나면 안 되거든요. 그래서 매우 쉬쉬하면서도 너무 기쁘잖아요. 이 케이스를 담당했던 직원에게도 제가 DNA 결과를 알려주지 않고, 다시 분석해서 가져오라고 해서 또 확인했더니 그 신부님이 틀림없다는 거예요.

DNA가 일치한다는 결과 이후에도 진 박사는 신중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흉부 엑스레이 사진과 치아 비교까지 거친 뒤 카폰 신부의 신원이 최종 확인됐습니다.

[진주현 박사] DNA가 일치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분의 유해는 아닙니다. 저희가 사용하는 DNA 특성상 다른 요인들도 추가로 확인해야 합니다. 카폰 신부님이 살아계실 때 찍었던 흉부 엑스레이가 있어요. 저희가 가지고 있던 유해의 엑스레이를 찍어서 비교했더니 이것이 완벽하게 같은 사람이라는 결과가 나왔고요. 치아 분석도 했습니다. 유해의 치아와 카폰 신부님의 치아 기록을 다 비교했더니 이분의 유해가 확실하다는 결론이 나와서 신원을 (최종) 확인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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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카폰 신부(오른쪽)가 포로로 붙잡혔을 때 부상당한 병사를 부축하며 100km 이상 떨어진 포로수용소까지 걸어가는 모습. / U.S. Army 제공

"북한에도 카폰 신부 아는 사람 있을 것"

1916년 미 캔자스주에서 태어난 카폰 신부는 세계 2차대전에 이어 1950년 육군 대위이자 군종 신부로 한국전쟁에 참전했습니다.

제1기병사단 8기병연대에 배치된 카폰 신부는 전쟁 당시 부상병들을 돌보고, 숨을 거두는 장병을 위해 임종 기도를 드리는가 하면 총탄이 빗발치는 상황에서도 낙오된 병사를 구출하면서 참전 용사들에게 힘과 용기를 줬습니다. 또 전쟁 중에 직접 미사를 집전하거나 병사들에게 세례를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1950년 11월, 북으로 진격하던 미군이 중공군의 기습 공격을 받고 후퇴할 당시 카폰 신부는 탈출 명령을 거부하고 부상병들을 돕다가 중공군의 포로가 됩니다. 이후 중공군이 운영한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카폰 신부는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헌신적으로 수감자와 부상병들을 돌보며 삶의 희망과 의지를 북돋아 주게 됩니다.

한국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허영엽 대변인은 카폰 신부의 업적과 선행이 많은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줬고, 그를 통해 목숨을 구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소개했습니다.

[허영엽 신부] 포로수용소는 인간성이 말살되는 비참한 곳이잖아요. 그곳에서 자신의 편안함을 마다하고 부상자들과 포로들, 특히 적군과 아군 할 것 없이 사람들을 옆에서 간호하고, 음식을 가져다주면서 사랑을 실천하신 것으로 알고 있고요. 포로수용소로 가게 되었을 때 총상이 심하거나 몸을 가누지 못하는 환자들을 부축해서 먼 길(100km 이상)을 걸어가셨다는 이야기가 책에 잘 나와 있습니다. 한두 가지가 아니라 포로수용소에서 다른 사람을 위한 신부님의 선행이 큰 울림을 주는 것 같고요. 다른 사람들이 삶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도록 희망을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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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카폰 신부와 함께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던 동료 병사가 전쟁이 끝난 뒤 카폰 신부의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카폰 신부의 사망 소식과 함께 생전 어머니를 회상한 카폰 신부의 마음이 담겨 있다. /천주교 캔자스주 위치토교구 (Catholic Diocese of Wichita) 제공

오랜 수감 생활과 구타, 혹독한 추위와 영양실조 등으로 병에 걸린 카폰 신부는 1951년 5월 23일, 당시 35세의 나이로 포로수용소에서 숨을 거뒀고, 이후 그의 시신은 어디에 묻혔는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포로수용소에서 생존한 사람들이 카폰 신부의 업적과 그가 보인 헌신을 증언했고 이를 바탕으로 '카폰 신부의 이야기 (The story of Chaplain Kapaun)'가 1954년에 출간됐습니다.

또 카폰 신부로부터 도움을 받고 생존한 병사들의 노력으로 2013년에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군인 최고 영예인 '명예 훈장 (Medal of Honor)'을 받게 됩니다.

허 대변인은 북한에도 카폰 신부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말합니다.

[허영엽 신부] (북한에도 아는 사람이) 아마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포로수용소에서는 정말 유명한 분이셨다고 해요. 특이한 경우죠. 실제로 적군인 중공군이나 북한군을 돌보는 데 똑같이 힘썼기 때문에 도움을 받은 사람은 기억할 것이고, 분명히 이야기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북한에서도 분명히 신부님에 관한 이야기는 전달됐을 거라고 봅니다. 하지만 공적으로는 많이 퍼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고요. 이번 기회에 이런 내용이 잘 알려져서 적과 아군을 떠나 사람에 대한 사랑, 도움을 원하는 사람에게 누구든지 도움을 줬다는 점에서 좋은 모범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진 박사는 실종자 확인국 내에서도 종교를 떠나 카폰 신부의 유해 발견에 매우 기뻐했다며 마치 카폰 신부가 함께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밝혔습니다.

[진주현 박사] 이전에 DPAA(실종자 확인국)에 근무하셨지만, 지금은 전역하신 해병 대령분께서 전역 전에 저에게 오셔서 (카폰) 신부님의 이름을 적어주면서 혹시나 한국전 프로젝트에서 이분을 찾게 되면 정말 의미 있는 일이 될 거라면서, 자신이 캔자스주 출신인데, 본인의 모든 조카가 카폰 신부님의 이름을 딴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매년 그곳에서 카폰 신부님의 고향까지 걸어가는 행사에 참가했었는데, 자신에게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니까 꼭 알려달라고 신신당부하셨거든요. 그분께도 신원이 확인된 이후 연락을 드리게 돼 매우 기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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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FA 그래픽

더 빨리 찾지 못한 미안함과 아쉬움

유족인 조카 레이 카폰 씨에 따르면 카폰 신부의 어머니는 희망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사망 소식에도 언제가 그가 반드시 집으로 돌아올 것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70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나면서 희망이 사그라질 무렵 카폰 신부의 유해가 발견됐다는 소식은 믿을 수 없는 놀라움과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레이 카폰] 특히 할머니는 오랫동안 삼촌이 결국 집으로 돌아올 거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나중에 삼촌이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을 때도 할머니는 삼촌의 유해가 집으로 돌아올 거라 굳게 믿었습니다. 하지만 70년은 매우 긴 시간이고, 삼촌의 유해가 어디 있는지에 대한 수많은 말들이 오갔습니다. 사실 우리가 실제로 삼촌의 유해를 볼 수 있을까에 대한 희망은 없었습니다. 유해 발견 소식을 전혀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저희가 (유해 신원 확인) 전화를 받았을 때는 정말 많이 놀랐습니다.

카폰 신부의 고향인 캔자스주는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카폰 신부의 유해는 오는 9월 29일, 캔자스주 위치토교구 성당에 안장될 예정입니다.

이런 가운데 진 박사는 신원 확인이 늦어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입니다.

[진주현 박사] 카폰 신부님이 압록강 인근의 중국군이 운영한 포로수용소에서 돌아가셨어요. 평안도에서 거기까지 걸어서 올라가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 부상자들과 함께 갔다는 기록이 있고, 실제 포로수용소에서 몇 달을 다른 포로들을 돌보면서 지내셨다는 기록이 확실히 있어요. 그런데 당시 군대 기록에는 이분이 평안도에서 '실종됐다'고만 되어 있어요. 그리고 포로수용소에 간 기록이 정식으로 남아 있지 않은 겁니다. 그러다 보니 아마 1950년대에 북한이나 중국에서 유해를 돌려줬을 때 '이 유해는 포로수용소에서 찾은 유해입니다'라고 하고 돌려주니까 당시 저희가 비교할 때는 포로수용소에 있었던 사람들만 비교했거든요. 그래서 카폰 신부님이 포로수용소에 있었다는 공식 기록이 없기 때문에 그 당시에 신원 확인이 안 된 것 같습니다. 그 부분은 좀 안타깝죠, 틀림없이 그곳에 계셨는데 기록상에 오차가 있었어요.

비록 7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지만, '한국전 예수'라 불리는 영웅은 가족과 조국의 품에 안겼습니다.

전쟁의 비극 속에서 인류애의 사랑과 헌신을 몸소 실천했던 카폰 신부를 오랜 시간 기다린 만큼 그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마음도 더 커질 전망입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노정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