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북한 당국이 사회 전반에 걸쳐 언어와 옷차림을 비롯해 외부 문화 유입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을 제정하고 비사회주의 현상을 척결하는 데 나서면서 한국 드라마와 가요, 한국 제품 등 이른바 한류 소탕 작전이 한창입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은 한류가 북한 사회에 미친 영향과 당국의 단속 배경, 향후 전망 등을 조명해보는 시간을 마련했는데요. 특별 기획 '분단을 넘은 한류, 북한을 깨우다,' 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 북한 내에서 한류의 확산 정도를 직접 한국 문화를 경험한 북한 주민과 탈북민들의 입을 빌어 살펴봤습니다. 노정민 기자가 보도합니다.
"요즘은 방탄소년단 인기... 한국 제품, 북한에도 똑같이 있어"
2019년 북한을 떠나 이듬해 한국에 정착한 김선영(신변 보호를 위한 가명 요청) 씨는 북한에서 한국산 제품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무역업에 종사하면서 제법 돈을 벌었던 김 씨는 샴푸나 화장품은 물론 옷까지 한국 제품을 선호했고, 한국에서 유명한 '오뚜기 카레와 케첩', '태양초 쌈장' 등도 자주 사 먹었습니다. 지난해 한국 생활을 시작하고 보니 북한에서 이미 경험했던 제품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김선영(가명) 씨] 일단 한국 옷은 엄청 비싸요. 그런데 돈 있는 사람들은 다 한국 상품을 쓰려고 하죠. '태양초 쌈장', '오뚜기 카레' 등도 많이 들어오고요. 여기 와보니 '내가 다 먹던 거네' 이런 말이 나오더라고요. 북한에서는 세관을 통해 한국 물건을 들여가는 개인들이 있거든요. 잘 사는 사람들은 장사꾼을 다 알고 있죠. 한국 물건이 들어왔다고 하면 판매가 이뤄지는 거죠.
개성에서 살다 2016년에 탈북한 김진아 씨도 북한에서 한국 드라마 시청은 물론 한국 상품을 많이 써 봤습니다.
김 씨는 많은 북한 주민들이 봤다는 '천국의 계단', '가을 동화' 외에도 '아들 찾아 삼만리', '하늘이시여', '신기생뎐' 등 한국 드라마를 즐겨봤습니다. 또 개성공단에서 만든 한국산 의류와 속옷, 가정용품 등을 사용하면서 품질이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느꼈는데, 심지어 개성공단에서 나오는 천 조각 하나도 버리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김진아 씨] 주방용품 같은 것, 한국산 옷과 속옷 등 개성공단에서 나오는 것을 많이 썼죠. 저희는 천 조각 하나도 버리지 않았거든요. 북한에서는 찰칵탄이라고 해서 얇은 탄을 땠는데, 그것 하나면 밥, 국, 반찬을 다 했습니다. 그걸 살리는 불쏘시개감으로 개성공단에서 나오는 천 조각이 매우 효율적이었어요.
한국에서 트로트 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탈북 여성 노수현 씨는 (노수현 TV) 1990년대부터 북한에서 한국 노래를 들었습니다. 함경남도 함흥 출신인 노 씨에 따르면 당시 북한에서 가수 김종환의 '존재의 이유'를 시작으로 김범룡의 '바람바람바람', '겨울비는 내리고' 등을 즐겨 불렀는데, 자신의 고향인 함흥에서는 '바람바람바람'이 공식 환영가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세월이 흐른 지금은 방탄소년단과 같은 아이돌, 즉 젊은 가수 그룹의 노래가 큰 인기를 끄는 것으로 안다고 노 씨는 설명했습니다.
[노수현 씨] 요즘은 북한에서도 방탄소년단이 엄청 뜬다고 하더라고요. 방탄소년단 등 아이돌 노래가 USB를 통해 많이 들어가서 한국말 흉내까지 내면서 노래를 부르고 표현한다고 합니다. 아이돌 노래를 부르는 애들은 좀 있어 보인다는 느낌을 받기 위해서죠. 북한 사회도 한국에서 무언가 유행하면 장사하거나 밀수하는 사람들이 다 퍼 나릅니다. 한국에서 유행하면 북한에서도 똑같이 유행이 됩니다.
실제로 북한 북부 지역에 사는 한 주민(일본 '아시아프레스' 취재 협조자)도 아이돌 가수의 인기를 확인해줬습니다. 그는 최근 경험했던 한류 문화를 묻는 자유아시아방송(RFA)에 지난 8일, "여성 가수 그룹의 노래와 춤을 재미있게 봤다"라며 "요즘은 북한에서 한국 아이돌 가수들이 인기가 있고, 많이 듣고 다닌다"라고 답했습니다.
또 "북중 국경지역에서 밀반입한 중국 휴대전화로 한국 드라마를 보고 이를 복사해 유통하는 사람도 있는데, 몇 번 보다가 요금 때문에 더는 보지 못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2013년 탈북해 지금은 미국에 정착한 20대 탈북 여성 에블린 정 씨도 이미 10대 때부터 남자친구와 함께 한국 음악을 즐겨 들었습니다. 당시 한국 음악을 듣고, 드라마를 보면서 느꼈던 감정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에블린 정 씨] 남자 친구가 MP3에 (한국 음악을) 다 담고 자전거를 타면서 귀에다 꽂고 들으면서 다녔대요. 저는 들었을 때 정말 좋았어요. 색다른 한국만의 매력이 느껴졌고요. 드라마는 '해를 품은 달'을 봤는데, 정말 새로웠고요. 그냥 다 퍼진 것 같아요. 평양에 갔을 때도 그곳에서 한국 드라마를 보고 있더라고요.

유행을 낳는 한류... 시장화 속 암거래 통해 확산
이처럼 북한에서 한국 드라마와 가요, 제품 등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재미와 멋, 고품질과 편리함 등을 갖췄기 때문입니다.
한국 드라마와 가요를 즐겨보고 들었다는 탈북민들은 한결같이 체제 선전 없이 순수한 사랑과 인간적인 삶을 다룬 한국 문화에 매료됐다고 설명했습니다. 북한에서는 젊은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국 드라마를 몰래 돌려보거나 한국 노래를 부르는 현상이 이전보다 더 많아졌는데, 그만큼 단속도 심해졌지만, 몰래 보고 듣는 한류 문화의 열풍은 식지 않았습니다.
[김진아 씨] 옛날에 불렀던 '잊지 못할 빗속의 여인', '바람바람바람' 등의 노래는 김일성, 김정일 이름이 안 들어가 있잖아요. 순수한 사랑과 우정, 긍정적인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는데, 처음 들었을 때 '이거 어떤 노래야?'라고...
[노수현 씨] 북한에는 혁명적 성격의 노래가 많은 데 반해 한국 노래는 정서적이고, 사람 사는 세상을 그대로 담은 듯한 가사가 많잖아요. 굳이 표현하자면 연인 관계에서 내가 그대로 불러주고 싶은 가사가 담긴 노래가 많고, 우리 생활에도 많이 와 닿으니까 좋아하는 것 같아요.
[김선영 씨(가명)] 한국 드라마는 사랑에 대해서 많이 그렸고, 사람들이 진실해 보이잖아요. 북한 사람들이 보기에 '저란 사랑도 있구나'라며 신기해하고요. 또 드라마 속 한국의 모든 것이 수준이 높고 잘 사니까 배경, 스타일 등을 많이 보는 거죠.
탈북 여성 노수현 씨는 북한에서 한국 제품에 대한 인기는 기본이라고 덧붙였습니다. 한국에 정착한 지 일 년 된 지인의 말에 따르면 오늘날 북한 시장에도 한국 물건이 그대로 들어오기 때문에 유행의 기준이 따로 없을 정도라는 겁니다.
[노수현 씨] 한국에 입국한 지 일 년 된 친구가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한국에 있는 물건 중에 북한 시장에 없는 물건이 없대요. 북한에서 먹어본 것이 여기에도(한국) 똑같이 있다는 겁니다. 자신들의 봤을 때 별다르게 느껴지지 않더라는 거죠.
한국 드라마에 나온 옷차림과 신발, 액세서리 등은 북한에서도 금세 유행이 됩니다. 드라마에서 본 옷이 멋있게 느껴지면 비슷하게라도 만들어 입을 정도입니다. 언론인 출신의 북한 경제 전문가인 문성희 박사도 북한에 있을 당시 여성들의 옷차림을 통해 한류의 유행을 체감할 수 있었다고 최근 자유아시아방송에 밝혔습니다.
[문성희 박사] (제가 북한에 있을 때) 한국 드라마인 '가을 동화'에 출연했던 여주인공이 신었던 구두를 다 신고 있었어요. 누군가 드라마를 보고 그 구두를 신기 시작하면 그게 유행이 되는 거죠. 여성들은 유행을 따라가길 좋아하니까요. 당시 북한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구두를 모두 신고 있었거든요. 나중에 보니까 '가을동화'라는 한국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인 송혜교 씨가 신고 있었던 구두를 모두가 따라 신고 있었어요. 그때가 2010년 상황이었어요.
일본 '아시아프레스' 오사카 사무소의 이시마루 지로 대표에 따르면 한류 문화가 북한에 유입된 지도 약 15년이 넘었습니다. 재미와 멋, 고품질을 앞세운 한국 문화와 제품 등이 크게 유행하면서 북한 주민들은 물론 이를 단속하는 사람들까지도 여기에 매료됐고, 시장화 물결 속에 암거래를 타고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한 겁니다.
미 카톨릭대학의 앤드류 여 교수에 따르면 한류 문화에 접근했거나 지식을 가진 엘리트와 젊은 세대 사이에서 북한 체제 중심이 아닌 것에 대해 논의할 수 있게 됐다는 점과 주민들이 북한과 한국을 비교하게 된 것 등 두 가지 면에서 한류 확산은 북한 시민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