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북한 여성 오늘] ① 틀에 갇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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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남성중심의 봉건적 사회관념이 강한 북한에서 연애와 결혼, 출산 등 젊은 여성들이 느끼는 전통적 여성상에 대한 중압감은 여전히 무겁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압박을 넘어서 자아를 실현하려는 욕구 또한 어렵지 않게 엿보입니다. RFA자유아시아방송은 평양에서 특권층 여성들과 교류했던 영국 외교관 배우자와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탈북 여성을 통해 북한 내부에서 싹트고 있는 여성들의 의식 변화를 짚어보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여성의날 특집기획 3부작, '북한 여성 오늘,' 첫 번째 시간으로 북한 여성들이 느끼는 사회적 압박과 불평등의 현실을 천소람 기자가 살펴봤습니다.

-- 결혼은 '자발적' 선택 아닌 '강요된' 의무

[린지 밀러] 결혼을 위해 연애를 하고 부모님이 신랑감을 찾는 등 정말 압박감을 많이 받는다고 제게 털어놓곤 했어요. 이런 이야기는 다른 평양 여성에게서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에게서 (결혼에 대한) 부담을 받는다고 말이죠. 나이가 들면 신랑감을 찾고 결혼을 하고 가족을 꾸려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으니까요.

외교관인 남편을 따라 2017년부터 2년 동안 평양에서 생활했던 린지 밀러 씨는 북한의 특권층 미혼 여성들이 결혼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고 있었다고 회고합니다.

당 간부 등 고위 관료 집안 출신의 젊은 평양 여성들은 가부장적인 북한 사회에서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강요당하며 압박감을 호소하곤 했습니다.

[린지 밀러] 제가 북한 여성들과 나눴던 대화에서 그녀들이 느꼈던 가장 큰 압박감은 연애를 하는 것이었어요. 일과 연애 사이의 가장 큰 충돌이 일어날 때는 일하면서 사람은 언제 만나냐는 것이었어요. 사람들 (남자친구)는 어떻게 만나는지 물어보면 선을 통해, 부모님 혹은 가족을 통해 소개를 받는 다는 것이었어요. 사촌의 친구라든지 말이죠. 근데 한번은 (어떤 북한 여성이) 정말 이러한 관계가 진실되지 않고 강요당하는 (fabricated and forced) 느낌이 들었다고 제게 말했습니 다.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를 거쳐 손자에게 3대째 권력이 대물림된 '21세기 봉건 왕조체제' 북한에서 결혼은 여성들에게 여전히 자발적 선택이 아니라 강요된 의무였습니다.

무직 미혼 여성은 단속 대상

노동이 당과 인민을 위한 무급 봉사로 간주되는 북한에서는 직업을 갖지 않은 미혼 여성은 '2중 의무 위반자'로 간주돼 처벌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20대 탈북여성 박가은(신변보호를 위해 가명 요청)씨는 결혼하지 않고 직장도 나가지 않는 여성은 당국의 단속 대상이라고 증언했습니다.

2019년 탈북해 한국에서 살고 있는 박 씨는 이 때문에 간혹 원하지 않는 직장을 피해 결혼을 도피처로 삼는 여성이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박가은] 직장 다니면 뭐 합니까. 월급도 안 주는데. 그래서 직장을 다니지 않고 그냥 놀고 있는 여자들도 있는데, 그러면 담당 경찰들이 자꾸 찾아오고 이야기를 하니까(직장 안 다닌다고) 그래서 어떤 여자들은 할 수 없이 일부러 결혼을 하기도 해요. 부양이 되면(결혼해서 부양 가족이 생기면) 그런 걱정 안 해도 되거든요. 결혼을 해서 부양이 되면 가정에 종속돼서 살아가니까 굳이 직장을 다니라고 안 해요. 그런데 여맹원 (한국의 동사무소 같은 곳)에서 관리를 하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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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FA 그래픽

결혼한 북한 여성들에게 출산 역시 피할 수 없는 의무로 여겨집니다.

30대 탈북여성 이수영(신변 보호를 위해 가명 요청)씨는 아직도 북한 여성들 사이에서 결혼과 출산은 당연하다는 인식이 남아 있다고 말했습니다.

2019년 탈북해 한국에서 살고 있는 이 씨는 북한에서 무역일꾼으로 비교적 자유롭게 살았지만 전통적인 여성상에 의구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이수영]일단 여자는 출산을 못하면 안 되는 거 라고 생각하거든요.

밀러 씨 역시 북한에서 대화 도중 아이가 없다는 말을 할 때마다 놀라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던 상대방의 표정을 떠올렸습니다.

[린지 밀러] 길을 지나가다 엄마와 아이가 같이 있는 모습을 본 북한 친구가 제게 아이가 있냐고 물어봤어요. 제가 아이가 없다고 하면 많은 북한 여성들이 놀라곤 했어요. '왜 아이가 없어?'하고 되묻기도 했어요. 그럼 전 '난 아직 아이를 가질 준비가 안됐어. 이건 선택이잖아?'라고 대답하곤 했어요.

그녀는 한 특권층 집안의 중년 여성이 이른 나이에 결혼하는 딸이 손주를 안겨줄 기대감에 환호했던 모습을 기억했습니다.

[린지 밀러] 한번은 평양의 한 여성이 자신의 딸이 결혼을 해 정말 기뻐했던 기억이 납니다. 평양에서 딸의 결혼을 계획하는 것을 정말 즐거워 했고 손주를 곧 보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굉장히 기뻐했습니다. 그녀의 딸이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 굉장히 좋아했죠.

끊이지 않는 여성 동원

북한 여성들을 짓누르는 무거운 짐은 결혼, 출산만이 아닙니다.

결혼 이후에도 주부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경제적 활동에 내몰리곤 한다고 박 씨는 말했습니다.

[박가은] 어휴, 여자들은 정말 힘들어요. 북한에서는 남자들이 나가서 돈을 벌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 (풍요롭게 살려면) 어쩔 수 없이 여자들이 나가서 돈을 벌어야 하고, 가정 일도 해야 하고,….

50대 탈북여성 김혜영(신변 보호를 위해 가명 요청)씨는 여성들이 직장에 나가는 남편 대신 각종 행사에 강제 동원돼 더 고단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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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FA 그래픽


[김혜영] 아침 출근 시간에는 여맹원들이 북을 치며 노래를 부르는 선동 활동도 해야 하고요. 인민반에서 내라는 여러 가지 할당들도 감당해야 합니다. 한 예로 새벽마다 온 마을 청소부터 시작해 눈이 오면 큰길도 치워야 하고, 제설작업도 해야 하고요.

2002년 탈북해 한국에서 살고 있는 김 씨는 북한 여성들이 한겨울에도 얇은 전통 한복을 입고 대규모 군중대회에 강제 동원돼 추위에 떨어야 한다고 증언합니다.

[김혜영] 외국 정상이 평양을 방문하거나 큰 정치행사가 있으면 추운 날에도 한복을 입고 나가 환영식에 참석해야 합니다. 여성들이 온전히 가정생활에만 전념할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물이 잘 나오나요. 전기가 잘 들어오나요. 주부의 역할만 하기도 힘든데, 각종 사회적 역할까지 강요하니까 여성들의 삶이 더 힘들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북한 여성들이 겪는 차별은 교육의 기회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박가은 씨는 모두에게 균등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사회주의 구호와 달리 여성들은 남성에 비해 고등교육을 받기가 쉽지 않았다고 털어놨습니다.

[박가은] 북한에서도 여자들이 대학을 가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여자들이 공부하는 것을 아직은,…. 봉건시대인 것 같아요.

북한 당국은 여성을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혁명의 한 쪽 수레바퀴를 밀고 나가는 힘있는 역량"이라고 치켜세워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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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FA 그래픽


하지만 북한 당국의 주장과 달리 혁명의 수도 평양에서 살고 있는 특권층 여성들조차 봉건적인 사회관념 속에서 기본적인 인권도 누리기 힘든 현실이라고 밀러 씨는 지적했습니다.

[린지 밀러] 제 생각에는 북한은 (인권이 있다 고) 주장하고 있지만 주민들은 그 뒤에서 자유와 인권없이 방치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 중 하나가 여성인권이죠,…(중략) 북한이 여성도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여성을 포함한 북한주민들은 어떠한 기본적인 인권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천소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