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 '한반도 톺아보기' 저명한 한반도 전문가인 마키노 요시히로 일본 아사히신문 외교전문기자와 함께 북한 관련 뉴스를 되짚어 보는시간입니다. 최근 급변하고 있는 한반도 정세를 분석하고 전망해 보는 시간으로 대담에 박수영 기자입니다.
<기자>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일본 총리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북일 정상회담에서 평양 선언에 서명한 지 올해로 20주년이 됐습니다. 당시 일본인 납치 문제는 어떻게 협의가 이뤄졌고 또 현재 상황은 어떻습니까?

마키노 요시히로 :고이즈미 전 총리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2년 9월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했습니다. 그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북한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인 납치 사실을 인정하고 사죄했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납치 행위에 대해서 "일부 영웅주의자들의 망동이었다"고 설명했고, 납치당한 일본 사람 5명이 24년 만에 일본으로 귀국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일본과 북한은 북한 핵 문제, 미사일 문제, 납치 문제 그리고 과거에 일어났던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국교 정상화를 조성해 나가겠다는 북일 평양선언을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일본에서 납치 피해자로 가장 유명한 요코타 메구미가 사망했다는 북한 측의 설명은 여러 가지로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습니다. 또 일본인 납치 사건은 충격이 큰 사건이라서 북한을 강하게 비판하는 일본 여론이 급속히 늘어났습니다. 일본과 북한이 2004년 5월에도 정상회담을 열어, 앞서 귀국한 일본인 납치 피해자 5명의 가족도 귀국하게 한 바 있습니다. 북한은 납치 피해자에 대해 재조사도 하고 요코타 메구미의 유골도 반환했지만, 일본 쪽에서 (유골이) 가짜라는 주장이 나오면서 북일 관계가 다시 악화했습니다. 결국,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11년 12월에 사망할 때까지 납치 문제는 진전된 바 없었습니다.
<기자>일본인 납치 사건의 배경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해주시죠.
마키노 요시히로 :일본 정부는 귀국한 5명을 포함해 17명을 공식적인 납치 피해자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17명은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 사이 일본 여러 지역에서 납치당했습니다. 북한은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주도하에 일본 사람에 대한 납치를 추진했다고 합니다. 북한은 남북 분단 이후 군사분계선을 넘어 한국에 직접 침투했었습니다. 그러나 1968년에 김신조 사건도 일어나고 점점 한국에 직접 침투가 어려워지자 제3국 즉, 경유하는 수단이자 대상으로 재일교포가 많이 사는 일본이 표적이 됐습니다. 북한 공작원들이 일본 사람으로 위장하기 위해서는 진짜 일본 사람의 호적을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납치를 강행한 바 있습니다. 납치 피해자들은 공작원들의 일본말 교육국에서 많이 이용당했습니다. 대한항공 폭파 사건의 김현희 씨는 당시 이은혜라는 일본 여자에게 일본말을 배웠다고 증언했습니다. 이은혜 씨는 납치 피해자인 타쿠치 야에코와 동일인이라는 얘기가 있었는데, 북한은 이미 타쿠치 야에코씨가 사망했다고 발표했었습니다. 일본이 인정한 납치 피해자 17명 중 귀국한 5명 외에 12명에 대해서 북한은 8명은 사망했고, 4명은 북한에 입국하지 않았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납치 피해자와 별도로 일본 경찰청이 납치당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 실종자 수는 800명 이상입니다.

<기자>북한은 2012년에도 일본인 납치 피해자 2명이 살아있다며 일본에게 협상을 유도했지만, 결국 결렬됐다면서요. 왜 협상이 결렬된 겁니까?
마키노 요시히로 :김정은 총비서가 권력 승계한 직후인 2012년 초, 북한은 일본 정부에 비밀리에 다시 북일 정부 간 협상을 진행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연락한 바 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북한 쪽에서 1945년 전후에 북한 내에서 사망한 일본인의 유골 문제에 대해서 협상할 생각이 있다고 했고요. 일본 정부로서는 김정은 총비서가 새로 북미 협상을 시작하기 위한 방법을 마련하거나, 아니면 경제 강국을 만들기 위해 일본의 지원을 얻으려는 목적이 있다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동시에 그 협상을 통해서 납치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 일본 정부는 미국 정부에 설명하고 그 협상에 응하기로 했습니다. 북일 비밀 협상은 2012년 동안 제3국에서 몇 번이나 극비리에 진행했다고 합니다. 그때 북한 쪽을 대표하는 사람은 나이 많은 남성이었다고 합니다. 일본 정부 자료에 없는 사람이었지만, 붉은 귀족이라고 불리는 북한 지도층 측근 그룹 중 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 자가 북일 협상 후에 북한 공식 영상에 우연히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그 인물이 화제가 된 바는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북일 협상에서 일본은 1965년에 맺었던 한일청구권협정을 준수해 한국에 무상 자금 3억 달러, 유상 자금 2억 달러 등 5억 달러를 지원한 것도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북한도 이에 큰 관심을 표하고 2012년 말에는 납치 피해자를 재조사한다고 합의했지만, 북한이 2012년 12월에 미사일을 발사하고, 2013년 2월에 핵실험도 했기 때문에 합의는 지연됐습니다. 그 후에도 여러 가지 협상을 진행하면서 2014년 5월에 납치피해자의 재조사나 독재 체제를 부분적으로 해제한다는 스톡홀름 합의가 성사됐다고 합니다.

북한은 그사이 물밑에서 납치 피해자 17명 중 실종 당시 28살이었던 타나카 미루 씨와 당시 26살이었던 카네다 류코우 씨가 살아 있다는 정보를 전달해왔다고 합니다. 일본 납치문제대책본부의 홈페이지에 따르면, 다나카 씨는 효고현에 살고 있었고 1978년 2월쯤 납치됐습니다.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다나카 씨는 북한에서 지시받은 재일 교포에게 사기를 당해 해외에 나간 후 북한에 입국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북한은 과거에 다나카 씨가 입국한 사실이 없다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다나카 씨를 북한으로 유인했던 재일교포가 20년 전에 일본 정부 관계자에게 "다나카 씨가 일했던 음식점의 주인이 북한 공작원이며, 그가 호주 비엔나로 (다나카 씨를) 데려가 북한 쪽 담당자에게 인도한 후에 모스크바를 거쳐 평양에 데려갔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는 재일 교포가 북한 납치 담당자에서 들은 이야기라며 "다나카 씨는 일본에서 같이 데려온 여성과 결혼해 통역하는 일도 하면서 잘살고 있다"는 증언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효고현 경찰본부 홈페이지에 따르면 카네다 류코우 씨는 1979년 11월쯤 가족에게 "이제야 도쿄에 올라간다"고 전화한 뒤 행방불명됐습니다. 카네다 씨는 다나카 씨와 같은 음식점에서 일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두 사람이 살아있다는 정보를 검토했지만, 북한은 이 두 사람이 살아있다는 정보를 마지막으로 납치 문제는 완전히 해결했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두 사람만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 일본 여론이 도저히 납득하지 못할 것이라 판단해 북한과 충돌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본은 두 사람의 생존을 확인하는 것에서 재조사를 종료하지 말고, 계속 조사를 진행해야 한다고 협상했는데 북한은 스톡홀름 합의를 한 다음 해에 재조사 중지를 선언하면서 최종적으로 종료됐습니다. 그 후 1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지만, 일본도, 북한도 현재까지 다나카 씨와 카네다 씨 두 사람의 정보에 대해 발표한 바 없습니다. 일본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다나카 씨와 카네다 씨에게는 가족도 없기 때문에 일본 여론의 관심도 높지 않고 계속 문제로 남아있다고 합니다.
<기자>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최근 (21일) 열린 미일 정상회담에서 일본인 납치 문제 해결에 대한 미국의 강한 지지를 받았다고 했지만, 북일 간 진전은 없어 보입니다. 또 이는 일본의 대북정책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요. 북일 간의 입장이 팽팽한 가운데 납치 문제의 전망은 어떻다고 보십니까?
마키노 요시히로 :옛날에 김일성 주석과 정상회담을 했던 가네마루 신 전 일본 부총리의 아들인 가네마루 신고 씨에게서 들은 이야기로는 가네마루 씨는 2019년 9월에 평양에서 송일호 국교 정상화 협상 담당 대사와 만났습니다. 그때 송일호 대사는 스톡홀름 합의에서 "일본 사람들은 북한이 조사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북한이 중간보고를 전달하려 했을 때 일본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면서 "일본 정부 관계자는 일본 납치 피해자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일본과 북한 사이의 신뢰 관계는 완전 붕괴된 상황입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조건 없이 북일 정상회담을 하자고 제안하고 있지만, 이는 북한의 실상에 맞지 않은 제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정부는 북한이 독재국가이기 때문에 김정은 총비서가 납치 피해자의 정보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2년에 납치 문제에 대해 사죄하고 "일부의 영웅주의 제도의 망동이었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북한에서 납치 사건의 관계자들은 처벌당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따라서 납치 피해 관계자들도 (처벌당할까 봐)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김정은 총비서가 모르는 사실도 많을 것 같습니다. 저는 실무자 수준에서 정보나 의견을 교환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그 후에 정상회담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는 미국 바이든 정권이 주장하고 있는 것과 같은 '실용적 접근'이라고 봅니다. 아쉽게도 일본 정부의 접근법으로는 일본인 납치 문제 해결이 너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기자>북한은 지난 19일, 제6차 정치국 회의에서 미국에 대한 신뢰 조치를 재고하고 중지했던 모든 활동에 대한 재가동을 검토하겠다며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 발사 가능성을 시사했고요. 지난 25일에는 순항 미사일 두 발을 발사했습니다. 북일 관계에 어떤 영향이 있으리라 보시는지요?
마키노 요시히로 :일본 정부의 기본적인 외교와 안전 보장 전략은 미일동맹입니다. 미국과 다른 안전 보장 전략은 있을 수 없습니다. 바이든 정권은 북한에게 무조건으로 대화하자고 주장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북한이 비핵화 조치를 취하지 않는 한 경제제재도 유지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지금 북한 내에서 대미 대결 자세가 강해지고 있기 때문에 미국이 당장 제재를 완화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정부도 당연히 미국의 방침을 따라가리라 생각하고요. 북한도 유엔 제재를 완화되지 않는 한 일본 쪽에서 국교 정상화에 따른 경제 지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이 지금 비핵화하고 싶다는 계기가 생기기는 너무 어려운 것 같습니다.
<기자>네, 마키노 기자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기자 박수영, 에디터 노정민,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