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모범사례 우크라 위기 속 북한의 이유있는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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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러시아와 서방 국가 간 군사적 긴장이 지속되는 가운데, 북한은 우크라이나 사태에 계속 침묵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러시아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면서 내부 문제에 집중하는 한편, 미사일 시험 발사와 군사력 증강의 기회로 삼고 있다고 분석하는데요.

한때 북한 핵 문제 해법의 모범 사례로 꼽혔던 우크라이나의 위기가 북한에 주는 시사점을 노정민 기자가 보도합니다.

“우크라이나 사태, 북한 간부∙외교관들에게 교훈 될 것”

[채널 A 보도 (12일)]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에 전행이 임박했을 수 있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미국은 자국민뿐 아니라 대사관 철수까지 준비 중입니다.

[YTN 보도 (12일)] 미국과 러시아 정부가 우크라이나 주재 자국 대사관 직원들에게 철수를 명령하면서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는 가운데 미국과 러시아 정상이 전화 회담을 벌였지만, 성과 없이 끝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연일 일촉즉발의 위기에 직면한 우크라이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다는 구체적인 날짜까지 공개되고, 미국과 유럽 각국은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에 있는 대사관 직원들의 철수와 함께 자국민에게는 즉각 그곳을 떠날 것을 경고했습니다.

전쟁을 막기 위한 미국과 러시아, 국제사회의 외교적 노력에도 사태 해결을 위한 근본적인 진전이 없는 가운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미국과 러시아가 맞붙는다면 이는 세계 대전’이라고 말하는 등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군사적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러시아는 15일 우크라이나 접경지대에 배치했던 일부 군병력을 철수한다고 밝혔지만, 바이든 대통령은 같은 날 ‘러시아군의 철군을 확인하지 못했으며, 여전히 우크라이나 침공 가능성이 높다’고 말해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했습니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우크라이나는 당시 1천800기가 넘는 핵탄두와 대륙간탄도미사일 등을 가지고 독립했지만, 열악한 경제와 핵 관리 능력 부족에 직면했고, 이 핵무기들이 국제 테러조직에 넘어갈 것을 우려한 미국의 제안에 따라 우크라이나는 체제와 주권 보장을 대가로 핵을 포기했습니다.

안전보장과 경제적 보상을 통해 평화적인 방식으로 핵무기를 해체한다는 ‘넌-루거 방식’은 북핵 문제 해결의 모범 사례로 꼽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침공에 이어 또 다시 전쟁 가능성이 커지자 우크라이나 위기가 북한 김정은 정권에는 나쁜 교훈이 됐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핵을 포기했더니 영토를 뺏기고 침공 위기에 직면했다는 겁니다.

러시아 출신 북한 전문가인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는 (2월 11일) RFA에 실제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을 낮게 보면서도 북한에는 ‘절대 핵을 포기하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이 더 굳건해졌을 것으로 관측했습니다.

[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 ] 제가 10년~15년 전부터 우크라이나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똑같은 내용을 강조하고 있는데요. 우크라이나는 1990년대 초 소련 해체 이후 핵보유국이 됐습니다. 하지만 1994년에 미국, 영국, 러시아의 약속을 믿고 핵무기를 반납했습니다. 지금 결과는 어떻습니까. 북한 입장에서 보면 우크라이나 사태는 매우 중요한 교훈입니다. 비핵화된 우크라이나는 영토 일부(크림반도)를 러시아에 빼앗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침공을 받는다면 우크라이나를 지킬 의지가 있는 강대국이 없습니다. 이 점을 고려하면 북한은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면서 핵을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결심이 더 강해졌을 거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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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의 한 노인이 방위군 특수부대 아조프가 주관하는 민간인 기본 전투 훈련에 참여해 소총을 들고 있다. / AP

한국 국가안보 전략연구원의 박병호 책임연구위원도 지난 달 (1월 4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우크라이나가 안보와 주권 보장을 대가로 핵을 맞교환한 1994년의 ‘부다페스트 각서’는 이미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으로 휴짓조각이 됐다’고 꼬집었습니다.

박 책임연구위원은 ‘이미 이라크와 리비아 정권의 몰락을 지켜본 김정은 정권이 우크라이나의 고초를 보면서 절대 핵을 포기하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을 더 굳힐 수 있다’고 내다봤습니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앞으로 북한 핵 문제와 한반도 정세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반면, 우크라이나 위기와 북핵 문제의 연관성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있습니다.

과거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으로부터 직접 ‘리비아식 핵 포기 방식은 절대 수용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던 로버트 킹 전 미 국무부 북한인권특사는 (2월 15일) RFA에 북한과 우크라이나, 리비아는 매우 다른 상황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독립 이후에도 스스로 핵보유국임을 선언한 적이 없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핵무기를 개발하지도 않았다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와 협력을 통해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려 했기 때문에 애초 핵무기의 배경과 목적, 정치체제 등에서 북한과는 다르다는 설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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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 전 특사에 따르면 2011년, 김계관 전 북한 외무성 부상은 직접 “북한은 절대 리비아의 모델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 /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사태에 침묵하는 북한

흥미로운 건 북한 관영 언론매체에서 우크라이나를 언급하는 내용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최근 몇 주 동안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적 긴장이 고조하는 가운데에도 북한 노동신문의 국제면에는 전 세계적 코로나비루스 대유행에 관해서만 전하고 있습니다.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는 북한이 우크라이나를 언급하지 않는 이유로 러시아와 관계를 꼽았습니다.

[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 ] 북한은 러시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때문에 북한은 러시아의 대외정책을 공개적으로 분석하거나 비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하지만 북한 간부들, 국제관계 전문가들, 외교관들은 마음속에서 우크라이나의 위기를 잘 분석하고 교훈을 많이 얻었습니다.

로버트 킹 전 북한인권특사는 우크라이나 사태는 당장 북한에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지적했습니다. 오히려 경제를 비롯한 내부 문제가 더 심각하다는 겁니다.

[로버트 킹 전 특사] 우선 러시아와 우호 관계는 북한에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아마도 북한으로서는 이 사태를 다루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을 겁니다. 만약 무슨 일이 발생하거나 러시아가 성명 또는 선언문을 발표했을 때는 이를 다루겠지만, 현재 북한으로서는 큰 관심을 둘 사안이 아니라고 봅니다. 오히려 식량 부족을 비롯한 내부 문제가 더 심각한 상황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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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11일, 김정은 북한 총비서가 극초음속 미사일 시험 발사를 참관하는 모습. /AP

다만 북한이 올해 들어 도발 수위를 높이고 있는 시점이 우크라이나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때와 겹치는 점은 흥미롭습니다.

레이첼 리 미국 스팀슨 센터 연구원은 (2월 9일) RFA에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집중하는 동안 북한은 최대한 무기 시험을 감행하고, 군사력을 극대화하는 등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활용하려는 것 같다고 분석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우크라이나 사태는 미국이 북한 문제에 관심을 쏟기 어렵도록 만들고 있다고 란코프 교수는 지적합니다.

[ 안드레이 란코프 ] 변화가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미국 행정부는 중국 문제, 우크라이나 위기에 집중하기도 복잡합니다. 이 때문에 북한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습니다. 미국은 그래요. 북한이 미국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 지난 1월 탄도미사일 발사를 여러 차례 반복했지만, 미국의 관심을 끌어내는 데 실패했습니다. 놀라운 것이 아닙니다. 만약 관심이 있다 하더라도 한반도에 사용할 외교 역량이 없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워싱턴에서 한반도는 여전히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로버트 킹 전 특사 역시 코로나 방역과 경제난으로부터 북한을 안정되게 유지하는 것이 김정은 총비서의 최우선 과제라고 말했습니다.

[로버트 킹 전 특사] 김정은 총비서의 최대 관심은 북한 상황을 관리하는 겁니다. 경제적으로 너무 어렵기 때문에 최근 북중 화물열차 운행도 재개한 것처럼 북한의 근본적인 문제는 식량 부족 현상을 해소하는 겁니다. 또 코로나 방역도 중요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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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21년 6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미러 정상회담에서 서로 마주 보고 있다. / AP

많은 전문가들은 우크라이나 사태로 미국과 러시아가 충돌하면 중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더 긴밀해지면서 한반도를 중심으로 신냉전 국면이 더 가속화할 수 있다고 우려합니다.

이같은 세계사적 전환점에서 앞으로 미국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사태를 놓고 어떻게 타협하느냐에 따라 한반도 정세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전망입니다.

기자 노정민, 에디터 박정우,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