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일 평양선언 20주년...“관계 진전 돌파구 난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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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 '한반도 톺아보기' 저명한 한반도 전문가인 마키노 요시히로 일본 아사히신문 외교전문기자와 함께 북한 관련 뉴스를 되짚어 보는 시간입니다. 최근 급변하고 있는 한반도 정세를 분석하고 전망해 보는 시간으로 대담에 박수영 기자입니다.

일본인 납북사건 두고 북일 간 불신감 심해

<기자>오는 17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일본 총리가 '북일 평양 선언'을 발표한 지 20년이 됩니다. 2002년 9월 17일 고이즈미 전 총리가 직접 평양을 방문해 2차례에 걸친 정상회담을 가졌는데요. 당시 회담에서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부터 짚어주시죠.

마키노 요시히로 일본 아사히 신문 외교 전문기자
마키노 요시히로 일본 아사히 신문 외교 전문기자 (사진 제공-마키노 요시히로)

마키노 요시히로 : 2002년 북일 정상회담에서 고이즈미 전 총리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과거 북일 간 불행한 역사를 청산하고, 핵과 미사일 문제 등 여러 가지 현안을 해결하며, 국교정상화를 이룬다'고 하는 북일 평양 선언에 서명한 바 있습니다. 북한은 이 회담에서 처음으로 "일본 사람을 납치했다"고 인정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북일 정상회담 후 납북을 인정받은 사람을 포함해 공식적인 납치 피해자가 17명이라고 주장했는데, 북한은 그중 5명만 살아 있다면서 5명의 일본 귀국을 인정했습니다. 북한은 '나머지 12명이 공식적으로는 사망했다'라거나 '북한에 입국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일본은 공식적인 납치 피해자로 인정된 17명 이외에도 북한에 납치당했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는 사람이 800명 이상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2004년 5월, 두 번째 북일 정상회담이 열리면서 납치 피해자 가족의 귀국도 실현됐습니다. 그러나 2006년 7월 북한이 탄도미사일을 발사했고, 그 계기로 일본도 북한에 대한 독자 제재를 강화하면서 북일 평양 선언은 진전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납치 피해자도 20년 전에 살아 있다고 확인된 5명 외에 단 한 명도 귀국하지 못한 상황입니다.

<기자> 일본은 1991년도부터 일본인 납북 의혹을 제기해왔지만, 2002년 1차 북일 정상회담이 열리기 전까지 북한은 납치 사실을 완강히 부인했는데요.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납치 피해자만 17명, 납치 가능성이 있는 행방불명자가 800명 이상이라고요?

마키노 요시히로 : 일본이 인정한 17명 납치 피해자 중에 아직도 귀국하지 못한 12명의 납치 사건은 1977년부터 1983년에 걸쳐 일어났습니다. 그중 11명의 납치 사건은 1977년부터 1981년의 짧은 기간 동안 발생했습니다. 일본 경찰에서 납치 사건을 담당했던 전 고위직 간부의 말로는 일본인 납치 사건이 1974년 8월 15일에 발생한 '문세광 사건'과 관계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합니다. 문세광 사건은 재일교포인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을 습격하던 중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인 육영수 여사가 사망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의 영향으로 재일교포가 한국에 입국하는 것이 엄격해졌습니다. 그 당시 북한이 일본을 우회해 한국으로 공작원을 보내던 것을 '우회 침투'라고 하는데, 이 공작원들이 신분을 위장할 때 사용했던 게 재일교포 신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세광 사건으로) 재일교포의 한국 입국이 어려워지면서 대신에 일본 사람까지 납치해 신분을 위장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고 일본 당국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피해자들은 대부분 20대에서 40대 사이고, 공작원이 신분을 위장하기 쉬운 사람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편, 1988년 3월 일본 국회의 답변으로써 일본 가지야마 세이로쿠 당시 공안위원장이 "납치 사건은 북한과 관련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북한은 이때 일본이 북한의 범죄 사실을 알게 됐다고 생각하고 그 후에는 행동을 자제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행방불명된 사람이 800명 이상이긴 하지만, 그 숫자는 이러한 상황과 맞지 않는 시기에 납치된 사람도 많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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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전 총리는 북한 평양의백화원영빈관애소 ‘북-일 평양선언’에 서명하고 있다. 아래는 서명한 ‘북-일 평양 선언’ 종이./AP

20년 전 귀국한 5명 외에 일본에 돌아온 납북 피해자는 “0명”

<기자> 납치 피해자로 인정된 17명 중 5명은 1차 정상회담이 열리고 한 달 뒤에 일본으로 귀국할 수 있었지만, 나머지 피해자 중 4명은 사망, 1명은 입북 확인이 불가하다고 밝히면서 추가 귀국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북한의 이러한 주장을 일본 정부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요?

마키노 요시히로 : 북한은 현재도 '납치 문제는 해결됐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이러한 주장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스스로 고백한 바 있었습니다. 첫 번째로 2008년 6월 중국 북경에서 열린 북일 실무자 협의에서 북한이 '납치 문제는 해결됐다'는 입장을 변경하고, '납치 문제 해결을 위해서 다시 조사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2008년 8월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일본의 후쿠다 야스오 전 총리도 그만두는 상황이 겹치면서 북한은 '납치 문제가 해결됐다'는 입장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 다음으로 2014년 5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북일 정부 간 협정에서 북한은 납치 피해자를 포함해 일본 사람에 관한 포괄적이고 전면적인 조사의 실시를 약속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이 2016년 1월 핵실험을 한 영향으로 스톡홀름 합의도 백지화됐습니다. 즉, 북한은 북일 협상을 진전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납치 문제에 대한 태도를 바꾸면서 여러 협상을 제안해왔기 때문에 일본은 북한의 주장에 대해 강한 불신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한편, 일본 내에서 북한이 2004년 11월에 제공한 납치 피해자 요코타 메구미 씨의 유골이 가짜라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면밀히 보면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요코타 메구미 씨의 유골이 아닌 DNA를 검출했다”고 했지만, 최종적으로 전부 가짜라고 단정한 바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를 명확히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일본 쪽의 태도에 북한도 불신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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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 미노루(田中実, 좌)와 카네다 류코우(金田龍光さん,우) 사진. /효고현 경찰본부 홈페이지 캡쳐

<기자> 2012년 김정은 총비서가 집권한 이후 다나카 미노루 씨와 카네다 류코우 씨가 살아 있다면서 일본 정부에 연락을 보낸 적도 있죠?

마키노 요시히로 : 스톡홀름 합의 후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납치 피해자라고 인정한 다나카 미노루 씨와 납치됐을 가능성이 있는 카네다 류코우 씨가 살아 있다고 북한이 전달한 바 있습니다. 두 사람은 납치되기 전에 일본 고베시에 있는 같은 중화 요리점에서 일했던 사실이 있습니다. 이 중화 요리점의 주인이 북한과 관계있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북한이 일본 정부에 통보한 바에 따르면, 다나카 씨와 카네다 씨는 따로 결혼해 평양에서 편하게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다나카 시와 카네다 씨가 살아있다고 하지만, 더 이상의 납치 피해자 조사를 종료시키고 (이 문제에 대한 추가 작업을) 그만두겠다는 생각도 전달했다고 합니다. 일본 정부가 내부적으로 검토한 결과, 다나카 씨와 카네다 씨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지만, 일본 납치 피해자 관계자들은 (다나카 씨와 카네다 씨가 북한에 남고 싶다는 사실을) 납득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북한 쪽의 (조사 종료) 신청을 거절했다고 합니다. 결국 일본도, 북한도 최근까지 이에 관한 사실을 공식적으로 발표한 바 없습니다. 다나카 씨와 카네다 씨는 가족도 없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납치 피해자 가족 모임이나 여러 관계 기관에 문의하거나 항의하는 일도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북한은 그 두 사람이 일본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설명한 바 있다고 합니다. 그래도 혹시나 그 두 사람이 일본에 돌아가고 싶어 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결과적으로 두 사람을 구출하지 못했다는 책임을 추궁받을 가능성도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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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DLELIGHT FORMATION TO MARK FIRST ANNIVERSARY OF PYONGYANG DECLARATION IN TOKYO. Hundreds of a community group members from Japan and South Korea form giant candlelit Korean Hangul characters (second line) and the Japanese kanji character (bottom-L) at Meiji Park in Tokyo September 17, 2003. The event marks the first anniversary of the signing of the "Pyongyang Declaration" by Japanese Prime Minister Junichiro Koizumi and North Korean leader Kim Jong-il. Both Japanese and Korean words mean "friend". REUTERS/Issei Kato IK/FA (Reuters Photographer/REUTERS)

세계 정세 변화 없이는 북일 관계 진전 막막

<기자> 일본 정부는 북일 관계에 있어 일본인 납북 문제를 우선으로 두고 있는데요. 양국이 납북 문제와 북일 관계에 진전을 이끌어낼 수 있으리라 보시는지요?

마키노 요시히로 : 과거 북일 관계가 진전될 가능성이 있었던 것은 모두 북한이 일본에 접근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일본이 북한과 대화하고 싶어도 북한이 이에 응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아쉽게도 대화의 주도권은 북한이 잡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이 과거 일본에 접근하려고 했을 때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1990년 9월에 일본 가네마루 신 전 부총리가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북일 국교 지원 사업화를 추진하겠다"고 합의한 바 있었습니다. 그때는 소련이나 동유럽 나라들의 지원도 거의 사라져 새로운 지원을 구하려는 북한의 노림수였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02년 진행했던 북일 정상회담은 2001년 세계 동시다발 테러인 '9∙11'을 계기로 미국의 부시 전 정권이 북한을 악의 축 (Axis of Evil) 중 하나라고 심하게 비난했기 때문에 북한이 겁나서 일본에 접근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계 정세에 어떤 움직임이 없으면 북일 관계도 진전되기 어려운 상황이 아닌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기자>네, 마키노 기자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기자 박수영, 에디터 박정우,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