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한국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는 북한을 떠나 한국에 정착한 탈북 작가들의 전시회, '선을 넘어온 이야기'가 진행 중입니다.
이들은 사진과 그림, 만화 등 다양한 작품으로 북한에서의 과거와 남한에서의 현재, 그리고 탈북민으로서 경험하는 정체성의 혼란 등을 예술적으로 표현했는데요. 작품 속 철조망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새는 남북 분단의 현실을 보여주고, 같은 표정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 북한 소녀들의 모습에서는 오히려 ‘슬픔’의 감정을 불러 일으킵니다.
천소람 기자가 직접 전시회를 찾아 탈북 작가들의 ‘선을 넘어온 이야기’를 관람했습니다.
“작품 속 탈북민의 이야기에 공감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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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구] 우러나는 표정이 아니라고 봐요. 만들어진 표정이나 모양을 보여주는 거죠. 어려운 세상에 살고 있고, 같은 동포인데 빨리 같이 좋은 나라에서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나타샤 노엘] ‘세상에 부럼없어라’는 조금 슬펐어요. 소름 끼친다고(creepy) 할까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요. 똑같아 보여요. 현실에서는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지 않잖아요. 근데 북한에서는 이게 현실 같아 보여요. 이 그림에서 작가는 ‘행복한 얼굴(happy face)’을 그렸고, 행복한 얼굴로 노래를 부르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잖아요.
가로 6.5m, 세로 약 2m 크기의 캔버스 유화 ‘세상에 부럼없어라’.
탈북민 화가 선무 씨가 그린 이 작품은 푸른 배경에 열세 명의 소녀가 같은 옷과 신발에, 똑같은 머리 모양을 하고 손을 맞잡은 채 웃으며 노래하는 모습을 표현했습니다.
한국 오두산 통일전망대의 전시관 한 쪽을 온전히 차지하고 있는 이 작품은 관람객들이 가장 인상깊다며 꼽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작품을 관람한 올해 73세의 강정구 씨는 소녀들이 합창하는 모습에서 “마치 만들어진 표정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습니다.
또 오두산 통일전망대를 찾은 26세의 벨기에인 나타샤 노엘(Natacha Noel) 씨도 “이 작품에서 슬픈 감정이 먼저 느껴졌다”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실제 이 그림에는 북한 합창단에 속했던 선무 작가의 경험과 슬픔이 담겨있습니다.
당시에는 지도자를 위해 노래할 수 있는 것이 행복이자 영광이었지만, 훗날 북한 체제를 위해 어린 아이들까지 동원돼 똑같은 표정으로 노래를 부르고, 그것이 결국 이용당하는 것임을 몰랐던 안타까움과 슬픔을 묘사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임진강 너머 북한 땅이 보이는 한국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에 위치한 오두산 통일전망대.
자유아시아방송 기자는 지난 22일, 이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선을 넘어온 이야기’ 전시회를 찾았습니다.
통일전망대의 입구서부터 분홍색과 초록색 바탕에 ‘선을 넘어 온 이야기’(Stories Across the Border)란 문구가 방문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이곳에는 선무, 심수진, 최성국, 강춘혁 등 탈북민 작가와 한국인 작가 조선희, 그리고 외국인 작가인 팀 프랑코의 작품이 전시돼 있는데, 여느 전시회와 달리 작품보다 작가에 대한 설명이 더 크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전시회를 기획한 김도연 한국 홍익대학교 외래 교수겸 예술기획자는 탈북민 작가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한국에 왔고, 왜 이같은 작품을 하게 됐는지 등 이들의 삶을 더 크게 조명해보고 싶었다고 자유아시아방송에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작품에 더 몰입하기 위해서는 ‘공감’이 필요하다고 덧붙였습니다.
[김도연] 탈북민이 생각보다 훨씬 더 힘든 과정을 거쳐 우리 곁에 오게 되잖아요.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굉장히 당연하게 생각하고, 우리가 불평도 너무 많이 하는 ‘일상’, ‘평범함’을 갖기 위해 얼마나 여러 해 동안 힘든 과정을 거치고 용기를 내서 여기까지 왔는지를 알면…. 그래서 저희 전시회는 좀 더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보여주고, 그 과정을 알고 작품을 보면 훨씬 더 많은 관람객이 작품에 몰입하고 같이 공감하고, 슬퍼하고, 작가님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단계까지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외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탈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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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 입구에 들어서기도 전, 프랑스계 폴란드인 사진작가인 팀 프랑코 씨의 작품이 바깥에 전시돼 있습니다.
검푸른색의 흐릿한 배경에 무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탈북민 여덟 명의 사진입니다.
[기자] 팀 프랑코 작가의 작품들이 전시관 안이 아닌 밖에 전시돼 있잖아요. 그렇게 배치한 이유가 있을까요?
[김도연] 팀 프랑코 작가는 외부인의 시선으로 남한과 북한의 상황, 그리고 그 사이에서 어떻게 보면 중간자처럼 힘든 과정에 있는 탈북민들을 외부에서 바라보고 있는 시선 같아서 작품의 온도가 좀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바깥에 배치해서 그 작품을 보고, 남한과 북한의 작가들을 안에 놓는 것이 전체적으로 관람하기에 더 좋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배치했습니다.
정진아 오두산 통일전망대 전시운영팀장은 무표정의 탈북민 사진이 한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그들의 미래를 보여주는 것 같다고 해석했습니다.
[정진아] 작가의 의도가 공감이 가는 게, 북한 탈북민의 얼굴이잖아요. 그리고 그 뒤에는 검푸른색으로 배경이 칠해져 있어요. 한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탈북민들의 삶이 앞으로 결코 녹록지 않을 거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표정이 아주 밝은 미래만을 꿈꿀 수 없는, 비장한 미도 있잖아요. 내가 정말 벗어나고 싶었던 과거를 떠나 새로운 세상을 찾아왔는데, 여기에서 내가 정말 잘 살 수 있는지. 이제부터는 그런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것을 앞둔 사람들의 얼굴인 거예요.
탈북민들의 사진 오른쪽에는 프랑코 작가가 북한에서 직접 찍은 길거리가, 왼쪽에는 압록강을 따라 중국에서 바라본 북한 공장, 동남아시아의 라오스와 태국을 접하는 메콩강의 사진이 잇따라 전시돼 있습니다.
오른쪽 벽은 탈북민들이 태어나고 자란 북한의 모습, 왼쪽 벽은 북한에서 중국, 메콩강을 건너 한국으로 오기까지 탈북 여정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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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탈북 과정에서 겪은 힘든 시간을 이겨내고 마침내 한국에 도착했지만, 새로운 정체성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탈북민들을 외부자의 시선으로 담아보려 했다고 합니다.
[정진아] 한쪽은 북한의 모습이고 다른 한쪽은 압록강과 중국, 그리고 메콩강의 모습인데요. 그 밑에 서울까지의 거리가 표시돼 있습니다. 압록강이 제일 가깝죠. 중국은 좀 더 멀어지고, 메콩강에서 오는 거리는 더 멀어지잖아요. 정말 가까운 북한에서 한국까지 국경 하나 넘어 20~30km면 오는 거리를 압록강을 건너 반대로 가죠. 또 중국을 얼마나 헤매겠어요. 그 세월을 지나 정말 목숨을 내놓고 매콩강을 건너더라고요. 그런 과정을 겪고 온 이들이 한국에 와서도 결코 안심할 수 없는 삶을 보여주는 게 저는 정말 공감이 됐어요.
“철조망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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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에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작품은 선무 작가의 캔버스 유화, ‘날다2’ 입니다.
분홍색 배경 위에 붉은색과 푸른색의 새들이 철조망으로 추정되는 검은 선을 넘나들고 있습니다.
[김도연] 우리가 흔히 ‘새들은 38선을 넘어 자유롭게 넘나드는데, 우리는 갈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곤 하잖아요. 사실 오두산 통일전망대에 오면 정말 공감하거든요. 굉장히 가까이에 북한 땅이 보이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전망대에 올라와서 북한을 보며 느끼는 어떤 슬픔 같은 것이 이 작품에 굉장히 잘 표현돼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직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 때문에 얼굴 없는 작가로 활동하는 선무 작가의 이름은 ‘선이 없는’, ‘경계 없는 삶’을 뜻합니다.
그는 북한에서 그림을 공부하고 선전 포스터를 그리곤 했지만, 탈북 후 중국과 라오스를 거쳐 2002년 한국에 정착한 뒤 국내외 전시회에 활발히 참여하는 대표적 탈북 화가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선무 작가의 거대하고 화려한 색감의 작품을 지나면 어두운 배경에 오래되고 낡은 물건을 찍은 사진들이 걸려 있습니다.
군복과 아코디언, 모자, 가방, 담뱃갑, 신발, 책, 술.
이 작품을 만든 조선희 작가는 북한에서 볼 수 있는 특별한 사물을 사진에 담았습니다.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낡은 물건이지만, 지금은 닿을 수 없는 선 너머의 장소와 기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정진아] 이 사람들에게는 과거지만, 지금 북한에 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이 옷을 입고 훈련을 하고 있을 것이고, 저 담배를 뇌물로 쓰고 있을 것이고….
조 작가는 탈북민들의 기억이 담긴 물건의 사진을 찍을 때 의도적으로 한 곳에만 초점을 맞추고 그 이외에는 초점을 맞추지 않았는데, 이는 사물에 담긴 아련한 기억을 드러냄과 동시에 잊혀져 가는 기억을 표현하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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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이야기에 공감할수록 관람 시간도 길어져”
이 밖에도 북한에서 태어나 학창시절까지 연대기를 한 캔버스에 붓펜으로 담아낸 강춘혁 작가의 작품, 한국에 정착하면서 느꼈던 문화적 차이를 만화로 그려낸 최성국 작가의 작품, 그리고 탈북 후 한국에서 시한부 판정을 받았지만, 간이식 수술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심수진 작가의 작품도 관람객들의 시선을 빼앗았습니다.
작품마다 탈북민들이 한국 생활에 적응하며 겪는 어려움과 기쁨, 그리고 꿈과 희망이 생생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전시회를 찾은 강정구 씨는 작가들이 북한에서 이겨냈던 과거와 오늘날 북한의 실상, 그리고 그의 후손들이 살아갈 미래에 대한 속상함에 눈물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강정구] 전에 남북 관계가 좋아질 때는 그랬거든요. 개성에 함흥냉면 먹으러 놀러도 가고, 묘향산에도 갔으면 좋겠다고 친구들과 얘기했어요. 가보고 싶네요. 하지만 바람이고, 희망 사항이죠. 같은 동포인데 빨리 같이 좋은 나라에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우리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우리 아들과 손자들은 그런 세상에서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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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산 통일전망대의 방문객은 5월 19일 기준 약 15만 8천 명.
이곳을 찾는 방문객의 연령층은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다양합니다. 또 내국인뿐 아니라 외국인 관람객도 적지 않습니다.
이들이 오두산 통일전망대를 찾는 이유는 먼 북녁 땅의 전망을 보기 위해서지만, 탈북민 작가들의 삶을 표현한 작품 앞에서, 그들의 생각과 이야기에 공감할수록 머무는 시간도 점점 길어져 갑니다.
[정진아] 이번 전시는 현실이잖아요. 지금 우리랑 같이 살고 있는, 우리 이웃인 탈북민이 살았던 현실을 보는 거잖아요. 확실히 관심도 높고, 관광객들이 작품 앞에서 이야기하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천소람입니다.
에디터 노정민,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