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마키노 요시히로 일본 히로시마 대학교 객원교수 겸 아사히신문 외교전문기자와 함께 북한 관련 뉴스를 되짚어 보는 '한반도 톺아보기'입니다. 최근 급변하고 있는 한반도 정세를 분석하고 전망해 보는 시간으로 대담에 한덕인 기자입니다.
<기자> 태양절(김일성 생일, 4월 15일)과 함께 북한에서 가장 중요한 명절 중 하나로 꼽히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일인 광명성절(2월 16일)은 북한에서 중요한 정치 행사 중 하나인데요. 올해 광명성절을 맞아 북한에서 어떤 행사가 준비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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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노 요시히로]북한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평양에서는 공연회나 우표전시회 등 다양한 행사가 시작됐습니다. 또한 해외에서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82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메시지가 전달되고 있다고 합니다. 겨울철에 열리는 행사인 만큼 대부분 실내에서 비교적 소규모로 진행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작년에는 김덕훈 총리와 최룡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등이 금수산태양궁전을 방문했으나, 당시 김정은 총비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김정은 총비서가 권력을 계승한 이후 매년 열리는 주요 행사들, 예를 들어 2월 8일 북한군 창설 기념일, 4월 15일 태양절, 7월 27일 전승절, 9월 9일 건국기념일,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기념일 등과 비교할 때, 2월 16일 광명성절 행사는 대규모라고 평가하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김 총비서는 할아버지인 김일성 주석과 비슷한 옷차림과 머리모양을 하고 있으며, 매년 태양절에 대규모 행사를 진행해왔습니다. 이를 비교해보면, 김 총비서는 자신의 아버지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기념행사에 대해서는 다소 냉정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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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김 총비서가 김일성 주석에 비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업적에 더 냉랭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지적하셨는데요. 그 배경은 무엇인가요?
[마키노 요시히로]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김 총비서 입장에서는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북한 주민 사이에 긍정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는 김일성 주석과 유사한 이미지를 연출함으로써 북한 주민의 지지를 더 쉽게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반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90년대 '고난의 행군'을 주도한 인물로서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합니다. 탈북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고난의 행군 시절 갑작스럽게 배급 제도가 중단돼 많은 주민이 절망했다고 합니다. 또 2009년에는 화폐개혁을 강행해 주민들을 심각한 혼란에 빠트렸습니다. 이러한 사건들로 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강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본인도 주민들의 반발을 우려해 현지지도 시 일반 주민들 앞에 나타나지 않고 주로 공장이나 군 관계자들만 만났다고 합니다.
또 다른 이유로는 김 총비서가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해 개인적인 반감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김일성 전 주석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 총비서의 어머니인 고영희 사이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김 총비서는 김일성 주석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김 총비서가 스위스에서 유학한 것도 엘리트 교육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일반 주민로부터 자신을 숨기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으로 볼 때, 김 총비서는 아버지 김정일에 대해 “어머니를 고생시킨 나쁜 아버지”로 인식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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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김 총비서가 아직 어린 딸 김주애를 벌써 대중에 공개한 것도 김 총비서의 과거 경험과 관련이 있다고 보시는지요?
[마키노 요시히로]네, 김 총비서가 권력을 승계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그가 2010년 가을에 공식적으로 등장하기 전까지 그의 과거 행적에 대해 공개된 정보는 거의 없습니다. 즉, 김 총비서가 태어난 지 20년이 넘도록 그가 어떤 일을 해왔는지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는 겁니다. 이로 인해 김 총비서는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주변 인물들이 그를 잘 모르기 때문에 때때로 그를 가볍게 보거나 경시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실제로 토마스 섀퍼 전 북한 주재 독일대사는 평양에서의 경험을 통해 북한 당국자가 김 총비서에 대해 반말을 사용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불안정한 권력 기반 때문에 김 총비서는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그리고 자신의 이복형 김정남 등 여러 인물을 숙청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김 총비서의 불완전한 권력 기반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 총비서는 자신의 딸이 같은 어려움을 겪는 것을 원치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김주애를 공개적으로 자주 등장시키는 것은 일반 대중에게 '김주애'라는 인물을 인식시키고, 이를 통해 앞으로 권력 승계 과정을 원활하게 진행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기자> 김 총비서가 과거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절 추진된 남북협력법 등 남북관계 개선 노력의 일부를 부정하고 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특히 최근에 철거를 지시한 ‘조국통일 3대 헌장 기념탑’도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절에 건립된 것이죠. 김 총비서의 이러한 결정들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마키노 요시히로] 네, 과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여러 차례 남북 협력을 추진했으며, 2000년과 2007년에는 남북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2007년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당시 노무현 한국 대통령에게 개성공업단지 건설에 소극적이었던 북한 관계자들을 자신이 설득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제 생각에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역할은 구소련과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의 붕괴, 자연재해 등으로 북한 체제가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떻게든 생존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일본, 미국, 한국 등과 접근을 시도했고, 이로 인해 북한은 체제 붕괴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지만, 시장경제의 확대와 한국, 서양 문화의 유입이라는 부작용이 발생했습니다.
김일성 시대에는 북한 주민들이 가족 식사 시간에 주로 김일성 주석의 업적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였지만, 김정일 시대에는 시장에서 무엇을 저렴하게 살 수 있는지 등의 이야기가 중심이 됐고, 최고지도자에 대한 관심은 크게 줄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 위기감을 느낀 김 총비서는 한국을 '적'으로 규정하고, 한국과 관계를 맺는 북한 주민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주민들을 협박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 총비서의 이러한 정치적 행보는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기보다는 체제 유지를 위한, 즉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 해석될 필요가 있습니다.
<기자> 한편, 김 총비서의 경제정책은 그간 북한이 사실상 묵인해온 시장경제 활동을 차단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오늘날 김 총비서가 제시하고 있는 북한의 경제 노선이 성공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마키노 요시히로]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성공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합니다. 시장경제는 북한 최고 지도자에게 역사적으로 큰 고민거리였습니다. 최고 지도자의 입장에서 이상적인 경제 모델은 배급제와 같은 통제 경제일 겁니다. 이는 국가가 경제 분야에서 모든 권한을 가질 수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완전한 통제 경제가 성공한 사례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김일성 주석도 시장경제에 대해 국가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보완하기 위한 이른바 '필요악'으로 인식하고 어느 정도 묵인했습니다. 특히 고난의 행군 시기에 배급제가 붕괴된 이후 북한에서 시장경제 활동이 활발해지고 '돈주'라 불리는 자본가 계층이 등장했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시장경제의 발전으로 자본을 가진 돈주들이 최고 지도자의 권위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해 2009년 화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주민들의 반발을 샀고 결국, 당시 재정경리부장이었던 박남기를 처형하는 사태에 이르렀습니다. 김 총비서는 이러한 과거의 경험과 2017년까지 중국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던 상황을 고려해 시장경제의 일부 도입을 지휘해 왔습니다. 그 결과 돈주들의 영향력이 다시 강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 총비서는 이러한 돈주들의 힘을 위협으로 느끼고 있으며, 현재 시장경제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 주민의 생활 속에서 이미 시장경제가 정착돼 가고 있기 때문에, 김 총비서가 시장경제를 과도하게 통제하려 할 경우 결국, 주민들과의 충돌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기자> 네, 마키노 기자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워싱턴에서 RFA 자유아시아방송 한덕인이었습니다.
에디터 노정민,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