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이 해를 넘겼지만, 북한 당국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북한 주민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해 잘 알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북한 주민들은 우크라이나 전쟁뿐 아니라 한국전쟁에 관해서도 왜곡된 정보와 교육을 받고 있는데요. RFA 설문조사에서도 한국에 정착한 탈북민 10명 중 9명은 “북한이 한국 전쟁을 왜곡했다”고 답했습니다.
RFA 한국어 방송이 신년 특집으로 마련한 [해 넘긴 우크라 전쟁],
오늘은 두 번째 시간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여전히 침묵하는 북한 당국의 의도와 정보 전달의 중요성을 짚어봅니다. 보도에 노정민 기자입니다.
북 ,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철저히 침묵 유지
[이시마루 지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 전쟁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있느냐’, ‘북한 당국에서 어떤 설명이 있었냐’ 등을 자주 물어봅니다. 전쟁이 시작된 지 열 달이 됐는데, 아직 일반 주민들에게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전혀 설명이 없었다고 합니다.
일본의 언론매체인 ‘아시아프레스’ 오사카 사무소 이시마루 지로 대표는 (12월15일) RFA에 “북한 취재 협조자들에게 수시로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해 물어보지만, 일반 주민들은 우크라이나가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잘 모른다”며, “일반 간부들과 무역회사 직원들도 자세한 정보는 잘 알지 못한다”고 전했습니다.
[이시마루 지로] 이런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고 한결같이 말합니다. 러시아에서 소수 민족 문제가 발생해 분쟁이 일어나고 있고, 그래서 러시아와 소수민족 간에 큰 싸움이 일어나고 있다는 정도입니다.
실제 북한의 관영매체인 노동신문과 조선중앙통신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해 일절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해 2월 28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이 ‘우크라이나 사태의 근원은 미국과 서방의 패권주의 정책에 있다’고 규정한 것이 사실상 전부입니다.

반면,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에도 러시아와 우호적 관계를 강조하는 기사가 쏟아졌습니다.
북한 노동신문을 분석해 온 이현웅 한국 국가안보통일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RFA에 북한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침묵하는 이유는 그 동안 미국을 비난해 온 이유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모순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현웅] 북한은 그 동안 미국에 대해 '군사력을 동원해 다른 나라의 주권과 영토를 침해하는 제국주의 침략 세력의 우두머리'라고 주민들에게 선전해 왔습니다. 그런데 전통적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러시아의 제국주의적인 불법 침공에 대해서는 합리적인 선전 논리를 마련할 수 없는 상황에서 보도를 통제하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
또 김정은 정권이 지난 10년 동안 ‘국가핵무력 완성’을 최대 성과로 내세웠는데, 최대 핵무기 보유국인 러시아가 전쟁에서 고전하고 있다는 사실도 북한 당국으로서는 숨기고 싶었을 것이란 분석도 있습니다.
[이시마루 지로] 최근에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군대의 강한 저항 때문에 점점 열세에 빠지고 있지 않습니까. (북한 주민들이) 이런 것도 전혀 모른다고 합니다. 우호 국가인 러시아가 전쟁을 일으켰는데, 오히려 열세라는 것을 북한의 입장에서는 알리고 싶지 않은 사실일 겁니다.
[이현웅] 가장 많은 수의 핵무기를 보유한 세계 제2의 군사 강국인 러시아가, 약소국인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에서 목적을 쉽게 달성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주민들이 알려질 경우, 김정은의 ‘핵무기 정치’는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을 크게 우려했을 겁니다.
러시아도 언론 통제를 통해 우크라이나 전쟁의 진실을 제대로 알리지 않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부정적으로 말하면 최대 15년 형에 처할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됐을 뿐 아니라 ‘전쟁’, ‘침공’이란 단어도 사용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전쟁을 보도한 언론기관은 폐쇄되거나 방송이 중단되기도 했는데, 이미 수백 명의 언론인이 러시아를 떠났습니다.
반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지지율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급등했는데, 러시아 내 가장 친서방적 여론조사 기관인 ‘레바타 센터’조차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 약 60%대 초반이던 푸틴 대통령의 지지율이 전쟁 이후 80%까지 올랐다고 밝혔습니다. 지난 9월 말 70%대로 떨어지긴 했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여전히 높은 지지율을 보이고 있습니다.

제성훈 한국 외국어대학교 노어학과 교수는 RFA에 푸틴 대통령의 지지율 상승에는 전쟁에 대한 정보 통제가 일정 부분 기여했다고 분석했습니다.
[제성훈 교수] 영향을 끼쳤다고 봅니다. 만약 전쟁에 대해서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이 가능한 상황이었다면 여론이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는 거죠.
러시아 출신 한반도 전문가인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도 RFA에 과거 소련의 공화국이었던 두 나라가 대규모 전쟁을 벌였다는 점은 북한 주민에게 나쁜 영향을 주기 때문에 이는 알리고 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이라고 꼬집었습니다.
“6.25전쟁이 남침인 것을 알았을 때 너무 억울했어요”
전쟁에 관한 북한의 정보 통제와 역사 왜곡은 6.25 한국전쟁도 예외가 아닙니다.
RFA는 한국의 민간 단체인 ‘새롭고 하나 된 조국을 위한 모임’과 함께 탈북민 174명을 대상으로 한국전쟁에 관한 인식 조사를 (지난 해 5월) 실시했습니다.
설문에 응한 174명의 탈북민 중 ‘북한에서 한국 전쟁에 관해 교육받은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다수인 145명이(83.3%)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또 ‘북한에 있을 때 한국전쟁을 일으킨 쪽은 ‘남한’이라고 생각했다’는 응답은 122명으로 전체 응답자의 70%였고, 21명은 ‘미국’이라고 답해 한국전쟁에 대한 역사 왜곡이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한국에 정착한 이후 한국전쟁을 일으킨 쪽은 북한이라고 생각한다’는 응답이 137명이어서 상당수 탈북민의 생각이 바뀐 것으로 나타났으며, 전체 응답자의 92%(161명)는 ‘북한이 한국전쟁의 역사를 왜곡했다’고 답했습니다.

설문조사에 응했던 한국 정착 10년 차 탈북민 강하나 씨는 한국전쟁이 남침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던 당시를 지금도 기억합니다.
[강하나] 저는 중국에 넘어와서 알게 됐어요. 조선족 사람의 집에 머물게 됐는데 , 그때 조선족분들이 "아주마이, 김일성이 6.25 전쟁 일으킨 거 아오?" 이렇게 물어보는 거예요. 저는 그때 깜짝 놀라서 이렇게 말했어요. "아저씨 비록 제가 탈북을 했지만, 나라를 배반한 건 아닙니다. 아무리 그래도 같은 조선 사람인데 어떻게 그렇게 얼토당토않은 터무니없는 말을 나한테 합니까. 내가 그거에 넘어갈 것 같습니까" 이렇게 말했어요.
하지만 강 씨의 확신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한국에 정착하고 한국전쟁이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한 것을 알게 됐을 때는 울컥했다고 강 씨는 말했습니다.
[강하나] 그 여운이 계속 남아 있는 거예요. 한국에 들어와서 국정원 조사를 마치고 하나원에 가기까지 대기하는 시간이 약 한 달 반인데요. 그 기간에 제가 책을 찾아서 정확하게 알았어요. ‘아 사실이구나’ 하고 느끼는 순간에 울컥했어요. 억울해서요. ‘왜 우리는 수십 년을 이렇게 모르고 살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현웅] 북 한은 한국 전쟁의 원인과 이유 , 전쟁 개시와 과정, 결과에 대해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게 '김씨 왕조'의 입장에서 정리해 통치이념인 주체사상의 기본내용으로 못 박아 놓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통치이념에 대한 원칙을 위배할 경우, 세습 권력으로서의 정당성을 상실할 수 있으며 세습 권력 유지에 위협이 초래될 수 있습니다.
[강한나] 만약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킨 것을 우리가 그대로 교육받았다면 , 그 유일사상 체제에 조금이라도 혼란이 오지 않았을까요. 그게 다 김일성의 전략이라고 봐야죠.
또 설문에 응한 탈북민 중 70%인 122명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서 한반도에도 다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답해,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 고조에 대해 크게 우려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북 , 우크라이나 전쟁 보도로 '열린 사회' 동력 가능성
전문가들은 북한 주민에게 우크라이나 전쟁의 진실을 알려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로 ‘국민의 알권리’를 꼽습니다. 특히 인접국의 전쟁은 자국의 안보는 물론 국민 개개인의 생명과 자유, 일상생활과 직결돼 있기 때문에 그만큼 우크라이나 전쟁 보도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하지만 북한은 진실을 알리는 대신 정보를 독점하고 왜곡해 이를 권력 유지에 악용하고 있다고 이현웅 연구위원은 지적합니다.
[이현웅]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진실 보도는 주민들에게 전체주의 독재자들의 군사적 모험주의와 권력 야욕의 실상을 정확하게 인지할 기회를 제공하게 됩니다 . 이런 측면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정보는 북한 주민들에게 가감 없이 전달될 필요가 있습니다 .

또 국민의 알권리와 여론을 무시한 국가 지도자가 잘못된 판단을 했을 경우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전쟁에 관한 정확한 정보가 중요하다는 지적입니다.
[안드레이 란코프] 물론 갈수록 실망이 커지고 있습니다. 러시아에서도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지지는 놀라운 정도로 높습니다. 하지만 갈수록 상황이 어려워지고 있는데, 이 지지도 갈수록 줄어들고 있습니다.
북한 관영 언론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소식을 전하지 않으면서 북한 주민들이 우물 안 개구리가 됐다는 지적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정보 전달을 통해 전쟁에 대한 여론의 장이 형성된다면, 폐쇄 국가인 북한을 열린 사회로 변화시킬 수 있는 작은 동력이 생길 수 있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습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노정민입니다.
기자 노정민, 에디터 박정우,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