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01/20/23 20:10 EST
앵커 : 55년 전인 1968년 1월23일 승조원 83명을 태운 채 공해상에서 북한군에 의해 피랍된 미 해군 정찰함 USS 푸에블로호. 북한군은 당시 푸에블로호가 북한 영해를 침범했다며 나포했고 간첩활동을 인정하는 미국의 공식 사과문을 받아낸 뒤에야 승조원들을 석방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RFA 자유아시아방송이 만난 푸에블로호의 부함장은 당시 자신들이 간첩활동을 하지 않았다고 거듭 밝혔습니다. 그는 또 미국이 북한에 건넨 사과문 원본에 포함됐던 ‘승조원 석방을 위한 사과문 작성’ 문구를 북한이 무단 삭제한 정황을 자세히 증언했습니다. 북한 당국이 주민들을 선전·선동하는 데 이용하기 위해 고의로 문서를 조작했다는 겁니다.
푸에블로호 피랍 55년을 맞아 RFA가 기획한 특집, 오늘은 첫번째 순서로 조작된 사과문의 진실에 대해 박수영 기자가 알아봤습니다.
[옵티머스 프라임 회원들의 노랫소리]
2022년 6월 21일 미국 캘리포니아 샌디에고의 중심가에서 북동쪽으로 약 16km (10마일) 정도 떨어진 라 메사의 한 작은 파이 가게.
나이 지긋한 노인들의 노랫소리가 흘러나옵니다.

탁자에 둘러앉은 노인들 사이에서 깔끔히 정돈된 흰 수염과 머리 그리고 눈썹까지 하얗게 센 미국인 에드워드 머피 씨가 눈에 띕니다.
[에드워드 머피] 격식을 차려 말하자면 제 이름은 ‘에드워드’지만, 편히 ‘에디’라고 불러도 됩니다.
처음 만난 기자에게 첫 인사를 건네는 그는 친절하고 상냥한 ‘친구같은’ 할아버지였습니다.

[에드워드 머피] 50여 년 전에도 언론과 인터뷰한 적이 있었는데, 파도 속에 부서져 가던 게잡이 배에서 어부 두 명을 구조했던 일 때문이었습니다. 저와 다른 선원들이 해군으로 복무하던 중에 우연히 그들을 발견했으니 다행이죠. 아직까지도 그들을 구할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그는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55년 전 북한에 나포됐던 미 해군 정찰함 USS 푸에블로호의 부함장이었습니다.
[에드워드 머피] 저는 한 번도 저 자신을 간첩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뭐, 북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요.
1968년 1월 23일, 그 날의 기억
55년 전인 1968년 1월 22일 북한 원산 앞바다.
USS 푸에블로호는 정보수집을 위해 항해하던 중 수상한 북한 어선과 마주합니다.
[에드워드 머피] 우리는 두 척의 어선을 만났고 그들은 우리 주변을 바짝 따라 항해했습니다. 어선들은 잠시 사라졌다가 나중에 돌아왔습니다. 돌아왔을 때는 USS 푸에블로호를 찍기 위해 수많은 촬영기사를 대동했습니다.
다음날인 23일 오전 11시 30분경.
북한 해군 함정 3척과 미그 전투기 2대가 몰려와 푸에블로호를 순식간에 포위했습니다.
북한군은 USS 푸에블로호를 향해 “멈추지 않으면 발포하겠다”고 경고했고 푸에블로호는 “북한 영토에서 12마일 떨어져 있다”고 답했지만, 곧 총탄이 배를 향해 날아들었습니다.
[제임스 켈] 푸에블로호 선원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상대에게 적대적으로 보이기를 원하지 않았고 총과 탄약을 밧줄 아래 숨겨놨었습니다. 그래서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미 그들은 우리를 향해 총을 쏘고 있었고 밧줄 아래 있던 총을 잡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맞서 싸우려면 밖으로 나가서 밧줄들을 치우고 탄약통을 들고 와서 총으로 장전해야 했으니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죠.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나포된 푸에블로호는 원산항으로 끌려갔습니다. 현장에서 사망한 1명을 제외한 승조원 82명이 견뎌야 했던 11개월에 걸친 억류생활의 시작이었습니다.
[에드워드 머피] 저는 그 기억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결국 힘겹게 입을 뗍니다.

[에드워드 머피] 제…, 제 오른쪽 귀의 귓불은 고문관들의 발차기와 총 개머리판으로 내려 찍혀 말 그대로 피부 조각이 볼까지 내려와 덜렁거렸습니다. 또 고문으로 인해 약 30일 동안 기절했었다는 말도 들었어요. 아예 움직일 수조차 없었죠.
영문도 모른 채 자백을 강요받았고 고문도 계속됐습니다.
[에드워드 머피] 북한은 (간첩 활동을 했다는) 저의 자백이 필요했으니까요.
공식사과문에서 사라진 마지막 문장
억류 11개월째인 1969년 12월 23일.
길버트 우드워드 미 육군 소장은 나포된 82명의 승조원과 시신 한 구를 송환받기 위해 미국을 대표한 공식 사과문에 서명했습니다.
[에드워드 머피] 미국은 그 사과문에 서명해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결코 하지 않았던 간첩 활동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사과문에요. 하지 않았던 일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그리고 선원들 역시 이 모든 일에 대해 사과해야 했습니다.

북한이 요구했던 서명 후 승조원을 송환하기 전 2시간의 공백 동안 머피 씨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에드워드 머피] 다른 사람들은 못 봤을지도 모르겠지만, 사과문은 분명 4 문단이었어요.
북한의 전리품이자 반미 상징물로 평양에 전시하고 있는 이 공식 사과문에는 3문단이지만, 미국이 서명한 공식 사과문은 1문단이 더 있었다는 겁니다.
[에드워드 머피] 북한군은 저희를 풀어주기 전에 우드워드 장군이 서명한 사과문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사과문에는 애초에 하지도 않았던 일을 인정하고 이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적혀있어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믿기 어려웠어요. 그래서 사과문을 매우 자세히 살펴보았고, 저는 네 번째 단락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북한군 관계자가 맨 아래 문장을 다른 종이로 덧대 가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드워드 머피] 종이 너머로 글자들 위쪽 부분이 보였어요. 그래서 저는 한 단락이 더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복사기에 넣기 전에도 종이를 계속 덧대고 있었습니다.
북한이 사과문 원본을 보관하고 미국이 사본을 보관하는 조건이어서 북한은 우드워드 소장이 서명한 원본 문서의 복사본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사과문에서 사라진 문장은 “본 문건에 서명하는 동시에 하기인은 푸에블로호의 승무원 82명과 시체 한 구를 인수함을 인정한다. (Simultaneously with the signing of this document, the undersigned acknowledges receipt of 82 former crew members of the Pueblo and one corpse.”는 것이었습니다.
미국 정부가 애초 작성한 사과문에는 이 문장이 포함된 반면, 북한 측에서 공개한 문서에는 해당 문장이 사라졌습니다.
자세한 경위를 묻는 RFA의 질의에 미 해군부 관계자는 (19일) “북한 측이 제시한 미국의 공식사과문에 마지막 문장이 삭제된 이유에 대해 아는 것은 없다”고만 답했습니다.
미 국무부, 국방부도 (20일) “오래된 자료라 확인하기 어렵다”고 답했습니다.

북 , 주민들 선동하려 "해군 인수 영수증" 단어 삭제…문서 조작
[미첼 러너] 특히 북한과 김일성 주석의 입장에서는 마지막 한 문장의 존재 여부가 사과문의 의미를 극적으로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역사학자, 미첼 러너 오하이오주립대 교수는 가려진 한 문장만으로도 사과문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미첼 러너] 마지막 문장이 없으면 사과문은 미 해군들을 돌려받기 위해 작성된 것 즉, 거래(trade for the men)라는 의미가 없어집니다. 북한이 왜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에 대한 여러 가능성이 있지만, 선전 목적이라면 그 문장이 내포한 의미를 없애 북한 내에서 선전하기에 더 용이하도록 조작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과문에 서명하는 대신 미 해군을 풀어준다’는 내용의 문장을 삭제하고 미국이 스스로 간첩 활동을 자백하고 이를 전부 인정한다는 내용만 남겼다는 겁니다.
[미첼 러너] 북한은 분명 푸에블로호 사건을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선전·선동에 이용하고 있습니다. 1968년 9월 협상 과정에서 마지막 문장과 관련해 우드워드 장군과 북한 박중국 장군 간에 논쟁이 있던 적이 있습니다. 우드워드 장군은 사과문이 아닌 “해군 인수 영수증 (acknowledges receipt)”에 서명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을 때 북한은 이를 사과문이라 착각하고 처음 거래는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10월에 북한은 사과문이 아닌 영수증이라는 것을 깨닫고 거래를 다시 파기했습니다. 그 이후로 북한은 “영수증”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것을 극도로 꺼렸습니다. 추측건대, (해군 인수 영수증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사과문을 작성하기로 협의가 끝났음에도) 김일성 주석은 이를 거부했기 때문에 북한 내부에서 이 문장을 공식적인 모든 자료에서 지워버렸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한국 군사편찬연구소 이신재 조사연구부장은 (20일) 사과문에 승조원 송환 내용을 포함하게 되면 북한의 ‘온전한 승리’라고 선전할 수 없게 되어 해당 내용을 삭제했으리라 분석했습니다.
[이신재] 승무원 인수 내용이 들어가는 것이 북한 입장에서 보면 온전한 승리라고 할 수 없었던 것이죠. 이걸 삭제하고 미국이 얘기한 ‘영해 침범의 인정’ 또 ‘이에 대한 사과 재발 방지 약속’과 같은 내용들을만 남겨놓음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 미국의 사과문 또는 사죄문이라고 선전할 수 있게 된 것이라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미국의 민간연구기관인 민주주의수호재단의 데이비드 맥스웰 선임연구원은 미국에 대한 불신과 선전·선동 그리고 사망자 발생에 대한 북한 측의 책임회피를 그 의도로 꼽았습니다.
[데이비드 멕스웰] 북한 정부는 부정과 기만의 대가입니다. 북한 당국이 하는 선동은 대중에 그들 입맛대로 조작한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입니다. 나포 도중 사망자가 발생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았고 미국을 신뢰할 수 없었고 또 미국의 관료적인 절차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문장이 포함되기를 거부했으며 또 그 문장을 멋대로 삭제한 채 평양 푸에블로호 전시관에 전시했다고 생각합니다.
머피 중위를 포함해 82명의 푸에블로호 선원에 북한이 씌운, 간첩 활동 누명은 5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공식 자료의 조작과 날조로 북한 주민들에게는 여전히 간첩으로 기억되는 것에 그는 씁쓸해 했습니다.
[에드워드 머피] 북한의 선전·선동은 아주 능숙하게 이뤄졌어요. 그리고 북한 사람들은 그런 지도자라는 하나의 통로를 통해서만 이야기를 들었죠. 북한 정부는 사람에게 미국에 대한 증오와 그들의 선전을 듣지 않고 당 비서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닥칠 것에 대한 두려움까지 심어줍니다.
평양의 푸에블로호 전시관에는 북한 당국이 조작한 미국의 공식 사과문이 버젓이 놓여있습니다.

미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는 1968년 1월 23일 북한에 나포되어 원산항으로 끌려갔고 현장에서 사망한 1명을 포함한 83명의 승조원은 11개월간 북한에 억류됐습니다.
북미간 밀고당기는 비밀협상 끝에 미국은 북한에 공식사과문을 전달했고 북한은 승조원 82명과 시신 1 구를 미국에 송환했습니다.
미국 워싱턴DC 연방법원은 2021년 2월 북한 정권이 푸에블로호 승조원과 가족들에게 23억을 배상할 것을 판결했습니다.
기자 박수영, 에디터 박정우, 웹팀 이경하
*정정합니다: ‘1958년 1월13일’을 ‘1968년 1월 23일’로, ‘박청국’을 ‘박중국’으로 정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