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에블로호 피랍 55년] <2>여전한 트라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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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 55년 전 공해상에서 북한에 의해 강제 피랍돼 11개월간 억류됐던 USS 푸에블로호 승조원들은 당시 거짓자백을 강요당하며 고문까지 당했다고 증언합니다. 하지만 북한은 여전히 돌려주지 않고 있는 푸에블로호를 이용해 주민들을 상대로 거짓 반미선동에만 골몰하고 있습니다. 승조원들과 가족들이 제기한 손해 배상 청구에도 북한은 묵묵부답인데요.

푸에블로호 피랍 55년을 맞아 RFA가 기획한 특집, 오늘은 두 번째 순서로 여전히 그 날의 고통스런 기억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승조원들의 삶을 박수영 기자가 직접 짚어봤습니다.

11개월 간의 고문 생활로 머릿속에 각인된 북한 말투

[김용필] 저희가 가게 할 때부터 그 분이 굉장히 친근하게 대했습니다. 언제나 모든 손님이 다들 친근하고 친절합니다만, 특히 머피 씨 같은 경우는 저희한테 특히 더 친절했던 것 같아요.

미국 샌디에고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재미 한인 김용필 씨는 에드워드 머피 씨와 처음 만났던 순간을 또렷이 기억합니다.

[김용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꼭 오실 때마다 인사를 한국말로 하는데 그 한국말이 북한 말투로 “안녕하십니까?”라고 하면서 들어오시니까, 그게 가장 인상깊었죠. 그래서 그런 말을 어디서 배웠는지 여쭤보게 됐고 그분의 과거사를 듣고 고맙게 생각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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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머피 씨가 김용필 씨와 권은경 씨 부부가 운영하는 세탁소에 들러 인사하고 있다. /RFA Photo

에드워드 머피 USS 푸에블로호 부함장은 11개월에 걸친 납북 기간 동안 북한 말을 자연스레 배웠습니다.

[에드워드 머피] 젊은 북한 군인이 들어와서 제가 신문에서 오려 모아둔 제 아내 사진을 보고는 “섹시하냐?”고 물었습니다. 그가 제 아내에 대해 그렇게 말할 권리도 없었고 이는 굉장히 모욕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얼마 후 통역사가 방에 들어와서 제가 그에게 “북한군이 개인적인 질문을 하는 것이 정말 싫다”고 말했어요. 그러자 통역사는 무슨 일이냐 물었고, 저는 그에게 제 아내 사진을 가리키며 “섹시하다” 했다고 말했죠. 통역사는 크게 웃으며 ‘섹시하다’의 ‘섹시’가 아니라 아내를 뜻하는 한국말 ‘색시’라고 말해줬어요. 오늘날 한국어로 색시를 뭐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전 그렇게 들었죠.

김용필 씨는 머피 씨에 관해 한 켠에 미안함과 고마움이 공존한다고 털어놓습니다.

[김용필] 어린 나이에 북한에 납북돼서 거기서 꽤 (오래) 생활했었는데 나쁜 기억도 많이 있지만 지금은 좋은 기억으로 많이 생각하고 있다고 말씀하실 때 참 감동적이었던 것 같아요. 굉장히 고생하셨을 텐데….

김 씨와 함께 세탁소를 운영하는 아내 권은경 씨는 머피 씨가 북한에서도 사람 간에 나눈 정을 간직해왔다고 말합니다.

[권은경] 북한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참 좋았다고 얘기하셨던 것 같아요. 정치적인 상황을 떠나서 사람들에게 정을 느끼지 않으셨나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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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한인 김용필 씨. 에드워드 머피 씨와 오랫동안 알고 지냈다. /RFA Photo

"푸에블로호에 의해 죽었다며 북한 어부 사진도 보여줘 "

머피 씨는 억류 기간 동안 미국인이라는 이유로 멸시 받기도 했다고 털어놓습니다.

[에드워드 머피] 북한 사람들은 훈련받은 방식대로 별다른 이유 없이 증오심에서 나오는 행동을 보이곤 했습니다. 미국인이라는 이유 외에는 저희에게 그렇게 화풀이할 이유가 없었어요.

북한 당국은 나아가 ‘푸에블로호가 무고한 북한 어부를 죽였기 때문에 나포한 것’이라고까지 주장했습니다.

[에드워드 머피] 북한은 미군이 죽였다고 주장하는 한 어부의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어부 중 한 명이 배의 갑판에 누워있는 사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진을 토대로 미군의 침략이 얼마나 흉악한지 떠들었습니다. 하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저희는 한 발도 쏘지 않았어요.

역사학자인 미첼 러너 오하이오주립대 교수는 푸에블로호를 나포하는 순간부터 북한 당국은 이를 선전용으로 이용해왔다고 설명했습니다.

[미첼 러너] 실제로 푸에블로호를 나포한 순간부터 북한 당국은 이를 선전 목적으로 사용했습니다. 북한은 강력한 미국인들이 김일성 주석이 두려워 사죄하고 있다는 것을 주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푸에블로호 선원들을 이용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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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에 참석한 에드워드 머피 씨 (가운데)와 USS 푸에블로 승조원들 (오른쪽 앞 두 명). /RFA Photo

55년이 지난 현재도 남아있는 트라우마…”아직 극복 중”

북한에 억류되면서 생겨난 트라우마를 견뎌내는 것은 머피 씨에게도, 그의 동료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납북 5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들은 그 날의 기억에 매몰되지 않으려 애씁니다.

머피 씨가 정기 모임에 참가하고 있는 배경입니다.

[에드워드 머피] 한평생 이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은 옵티미스트 모임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과거의 아픔을 지우기 위해 마약과 다른 것들에 의존하기도 하죠.

USS 푸에블로호의 고급하사관 제임스 켈 씨도 피랍된 지 50년이 넘었지만, 당시 기억은 삶에 큰 상처로 남아있다고 말했습니다.

[제임스 켈] 그 닭장 같은 곳에서 빠져나왔지만, 아직 우리들 대부분은 여전히 많은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는 고문당하던 순간과 그 방법들을 아직도 낱낱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임스 켈] 가끔 권총을 들고 와 보는 앞에서 해머를 뒤로 젖혀 내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곤 했는데, 장전되지 않은 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럴 때마다 심장을 내려앉게 했습니다. 다리로 의자를 들어 올리거나 팔을 때리는 식으로도 고문했어요.

USS푸에블로호 고급하사관 제임스 켈 씨. /RFA Photo
USS푸에블로호 고급하사관 제임스 켈 씨. /RFA Photo

납북됐을 당시 머피 씨에게는 1명의 어린 아들과 둘째 딸을 임신한 지 7개월인 아내가 있었습니다.

아내인 캐롤 머피 씨에게도 그의 자녀에게도 그 사건은 여전히 흉터가 돼 남았습니다.

[캐롤 머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남편이 납북됐을 때) 아이들을 쭉 혼자서 키울 수 있을까? 남편이 집에 돌아오긴 할까? 그날들은 눈물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제 딸은 신생아였어요. 따라서 전 제 딸에게 제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 했지만, 딸은 엄마의 그 슬픈 감정을 이미 알고 있는 듯했어요. 딸도 당시 비정상적인 수준으로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그땐 1백만 달러를 주고서라도 제 남편을 되찾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머피 씨는 당시 가족에게 소식을 전할 수도 없었습니다.

[에드워드 머피 ] 전 그 당시 아내에게 인사하지도, 갓 태어난 딸에게 말을 건네지도 못했어요. 자유는 잃기 전까지 이에 대한 감사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전 포로로서 제 아내에게 말을 건넬 수 있는, 화장실을 자유롭게 갈 수 있는 자유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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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USS 푸에블로호 피랍 당시를 기억하는 캐롤 머피 부인. /RFA Photo

켈 씨는 용서 대신 연민의 감정을 느낀다고 털어놓습니다.

[제임스 켈] 제 아내는 계속 저에게 그들을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용서하기가 정말 힘들고 절대 잊지 못할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그들을 용서한다면 한가지, 일반 북한 주민들은 이 일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입니다. 정부가 모든 사람의 삶을 통제하고 있고, 심하게 억압받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에드워드 머피 씨와 그의 아내 캐롤 머피 씨도 북한 주민들이 겪는 고통도 잊지 않고 있다고 말합니다.

[에드워드 머피] 자유가 주어지지 않으면 자신이 그 자유와 권리를 잃었는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자유를 누려본 적이 없으니까요. 이는 북한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들은 특정한 직업을 스스로 선택할 자유가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살고 싶은 곳을 선택할 자유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매일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북한 사람들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머피 씨를 가까이서 지켜봐온 김용필 씨는 답답하고 속상한 마음을 내비쳤습니다.

[김용필] 지도자들은 전쟁하면서 어떻게 살 수 있지만 그 피해는 일반 학생과 어린아이들과 국민들이 고스란히 (받는 거죠). 왜 이렇게 가까운 나라에서 (차이가 나야 하는지), 지도자의 잘못 부패 시스템의 붕괴 같은 것들 때문인데 이는 북한도 똑같거나 좀 더 심하다고 하니까 참 굉장히 좀 안타깝죠.

마무리되지 못한 USS 푸에블로호 피랍 사건

머피 씨가 고통스런 기억을 잊기 위해 참석해온 옵티미스트 모임.

참석자들은 “우리 함께 모여”를 입 모아 부릅니다.

[합창 가사] 우리가 더 많이 함께 모이면 우리는 더 행복해져요. 왜냐면 네 친구도 내 친구가 되고 내 친구도 네 친구가 되니까요. 우리가 더 많이 함께 모이면 우리는 더 행복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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옵티미스트 모임 참석자들이 “우리 함께 모여”를 합창하고 있다. /RFA Photo

기자 박수영, 에디터 박정우,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