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주민도 몰라야 하는 북한의 실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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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궁금증을 풀어드립니다.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북한주민은 누구보다 북한의 현실에 대해 잘 알겁니다. 하지만 당국에서 보여주는 것 그리고 들려주는 것만이 진실이라 알기 때문에 이들이 북한을 나왔을 때는 심한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오늘은 미국과 영국 등 세계 여러 나라를 방문해 북한의 인권실상을 증언하는 요덕 정치범 수용소 생존자 김영순 여사를 통해 북한의 실세들에 대해 알아봅니다.

김영순: 정말 허심탄회하게 만나주고 자연스럽게 이야기 하고 하는 모습을 보니까 감개무량했고…

김 여사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초청으로 지난달 2월 백악관을 방문했습니다. 김 씨는 해외방문은 이번이 25번째였습니다. 미국, 영국, 스위스 등지에서 각국 지도자들을 만나 북한인권 실상에 대해 증언을 했는데요. 김 씨는 북한에서 조선인민군 협주단 무용배우 예대 1기생으로 김일성 주석의 연회에도 참석했던 인물입니다.

김영순: 북한에는 수령에게는 어떻게 말하고 자세는 어떻게 한다는 것을 경호들이 붙어서 그 내용이 복잡하게 하거든요. 중앙당에 감히 어떻게 들어가요. 김일성 주석궁에 못 들어 가거든요. 그런 차원에서 생각을 했는데 한국이나 전세계를 다니면서 보면 대통령이나 장관급들도 허심없이 탈북자들을 만나주고 하는 것을 보면 자유 민주주의의 우월성을 많이 느끼고 등급과 차별없이 전세계 인류는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면서 다닙니다.

김 씨는 1970년 8월 신의주로 가는 출장 명령서를 받고 서평양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던 중 보위부 직원에 의해 강제연행됩니다. 그리고는 보통강 구역에 있는 보위부 312호 예심과에서 꼬박 60일을 조사받고는 조선인민경비대 제5군분대, 즉 제 15호 요덕 관리소로 갑니다. 김정일 위원장의 두 번째 부인 성혜림과 친구라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김영순: 성혜림하고 친구고 김정일 사생활을 알고 있다고 했는데 저는 외국 여행자 상점에 있을 때 망경대 칠골할머니 저고리도 해다 입히고 허담 외무상 부인 그 사람이 김일성이 사춘 누이인데 그 사람도 준비해주고 정일이 정희 상점에 오면 물건 꾸려서 차까지 갖다주고 했어요. 나는 오빠가 애국 열사기 때문에 저는 당원으로서 왼발에 맞춰 거침없이 한 번도 삐뚫어 걸어본 적이 없이 정직한 생활을 한 사람이거든요. 정치범 수용소 갈때까지 있는 줄도 모르고 간거예요. 그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란 호칭이 있어 다 내다 쏴 죽이지 못하기 때문에 정치범 수용소를 만든 것이거든요.

요덕 수용소에선 눈에 보이는 것은 다 잡아 먹어야 살 수 있는 생지옥이었다고 말하는 김영순 씨. 9년 후인 1979년 1월 요덕 수용소를 나옵니다. 정치범 수용소 가기 전까지 북한 엘리트 생활을 했던 김 씨는 일반 북한주민은 상층부 사람들의 생활을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김영순: 북한은 김씨 왕조를 위한 8,9호 배라는 것이 따로 있거든요. 그것은 아무리 원유가 없어도 출항해 고기를 잡아야 해요. 어선에서 잡은 꽂게는 20kg씩 만들어 올려보내고요. 또 왕새우, 대하 빨간물 약간 올라오도록 익혀서 평양에 직송돼요. 금골 평양행이 매일 실어가요. 그것을 하루라도 빠지면 안 됩니다. 명태도 최고 문어, 광어도 최고 새우, 명태, 어물들 머리와 꼬리 잘라서 중간 토막만 다 평양에 직송돼요. 금수산 기념궁전에서 불순물이 있는가 검증을 하고는 주석궁하고 관저에 들어가거든요.

기자: 70년대에 벌써 그렇게 1호 가계에 들어가는 것은 그렇게 철저히 했군요?

김영순: 다 했어요. 계속 합니다. 금수산 기념궁전에서 검증해서 들어가는 데 거기 가는 해물, 육류, 명치젖깔…그것도 중앙당 공급소에서 한 상자에 3원 50전에 팔아줘요. 그리고 함경북도 남도 간부들은 평양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옛날 빨치산을 제외 하고는요. 87년에 다 지방으로 내려보냈어요. 그 방침이 있어요. 김정일 내려보낸 방침이 있습니다. 정수분자 500만명만 있으면 통일할 수 있습니다. 자강도 인민들만 가지고도 통일할 수 있습니다. 양강도 청년들은 통일의 걸림돌입니다. 함경북도 남도가 다 없어진다 해도 혁명의 가는 길은 꺼떡없다고 했어요. 김정일이 중앙당 조직지도부 앞에서요.

기자: 함경남북도에 있던 사람들은 그 얘기를 듣고 싫어했겠어요.

김영순: 그것을 간부들에게 하달이 되지 전인민들에게 하달되는 방침이 아니예요. 나는 평양에 99년에 갔다가 보위부장에게 들었거든요. 북한 함경북도 남도는 원래 허가이(소련파), 최창익(연안파), 박창옥(소련파)을 종파로 58년 다 죽였잖아요. 그리고 박금철(갑상파),이효순(갑상파) 오기섭 소련파도 종파로 함경북도 남도가 종파가 쎄니까 다 총살을 했어요. 그래서 다 총살해서 평양에 하나도 없어요. 판매원도 함경도 말씨 쓰는 사람이 없어요.

북한 중앙당 고급 부장들에게만 하달된 거예요. 평양시민이 100만명이던 것을 외곽과 합쳐서 200만명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정규군이 170만명에 노동적위대, 청년근위대 합치면 200만명입니다. 그러면 400만명이죠. 자강도 인민들과 간부하면 100만명이 되거든요. 그러면 혁명한다는 거죠. 그래서 강의 할때면 제가 그럽니다. 인민을 숫자로 논하는 김정일 시대에 살고 있는 북한주민이 불쌍하다고 하는 겁니다.

올해 81세인 김 씨는 어느덧 남한생활도 15년이 됩니다.

김영순: 저는 요덕 수용소 9년을 최고의 인생대학이라고 말해요. 젊을 때인 34살에 가서 43살 청춘을 다 빼았겼지만 그 시기는 그야말로 짐승같은 복장에 짐승처럼 살았어요. 거기서 죽은 가족을 가마니떼기에다 묻는 것을 상상해 봐요. 지금도 추석이나 명절 때면 혼자 앉아서 울면서 글을 써요. 어머니, 어머니를 내가 요덕 수용소에서 죄인이 아닌 죄인으로 뭍어야 했던 어머니의 운명을 생각하면 죄인이라고 용서해달라고 눈물로 글을 많이 써요. 추석은 가족의 날인데 어디 가지도 못하고 있을 때면 부모님 생각, 죽은 아들 생각, 총살당한 막내 아들, 입양한 맏딸. 정말요 탈북자 중에 8식구 모두 기막힌 사연으로 죽었고 중증장애인 아들하나 같이 왔는데 나이는 53살인데 키는 171인데 39킬로 나가요. 그 아들 때문에 좀 더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저는 절대 스트레스 받고 고민 안 해요. 한국 국민으로 살고 있음을 항상 감사합니다 하고 항상 긍정적인 생각으로 웃고 살기 때문에 건강 한거예요. 나이 먹으면 문을 활짝 열고 전화 먼저 하고 사랑과 나눔으로 욕심을 다 내려놨을 때 건강도 유지되고 좋은 거예요.

현재 여러 단체에 소속돼서 바쁘게 생활하는 김영순 여사. 목숨이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비굴하지 않고 도도하게 살고 싶다고 말합니다.

김영순: 춤도 최승희 무용교육원 원장으로 있으니까 예술문화제 같은 곳에서 부르면 춤도 춰주고요. 저 아직도 제자랑은 아닌데 한국전통 무용가들보다는 잘 추거든요. 저는 한국 사람들보다 더 멋지게 살고 있어요. 비록 조그만 집에 살고 있지만 자유가 얼마나 좋아요. 매일 지하철 타고 다니지만 저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등산 하거나 공원을 걷고 건강을 위해서 하는 것 하나 안 해요. 딱 내가 먹고 싶은 것 먹고 내가 내 몸을 사랑해야 해서 반찬 없이는 밥을 안 먹고 밤 늦게 들어와도 반찬 6가지 하고 또 밤 12시라도 불고기 먹고 싶다고 하면 한조각이라도 해서 먹고 자고요. 하기 싫어서 안 먹고 가기 싫어 안가고 그런 것이 없어요. 항상 20센치 하이힐처럼 자기를 긴장 시켜 살거든요. 건강의 비결은 그것이라고 생각해요. 긍정적인 생각하고 절대 비관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스트레스 받지 않고 살아요.

궁금증을 풀어드립니다. 오늘은 함경남도 요덕 정치범수용소 생존자로 북한의 인권실상을 증언하는 김영순 여사의 얘기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