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궁금증을 풀어드립니다.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나이를 먹으면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아팠던 과거 힘들었던 순간도 왠지 희석이 되고 그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꿈에서 조차 다시보고 싶지 않고 기억에서 지울 수만 있다면 없었던 시간이길 바라는 그런 순간도 있습니다. 오늘은 중국에서 강제북송을 당해 끌려갔던 증산군에 있는 11호 노동단련대에 대해 알아봅니다.
최지애: 무서워요. 다시는 잡혀서 거기 가고 싶다는 생각이 없어요. 그럴거면 차라리 자살해서 죽고싶다는 생각, 그 기억을 떠올리기 싫다는 거예요.
1998년 먹고 살기 위해 두만강을 건넜고 중국에서 공안에게 체포돼 북송됐던 최지애(가명)씨 입니다.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수용소 안에서는 도대체 무슨일이 있었던 것인지 들어봅니다.
최지애: 제가 평안남도 증산군 용덕리라고 거기는 정치범 수용자나 교화생들만 가는 곳인데 저희가 월경자들이죠. 중국에 갔다왔던 사람들로 꾸려진11호 노동단련대라고 그때 당시 처음 생긴거예요. 우리가 1기거든요.
기자: 그때라면 언제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최지애: 2000년도입니다. 우리가 갔을 때는 거기 한 개반에 10명 미만이었는데 우리 도강자들만 모았던 것이 1,600명이예요.
북한에서 꼬빠크라고 불리는 노동단련대에 수감된 것은 2000년 8월입니다. 증산 11호 노동단련대는 당시 교화소와 노동단련대를 같이 운용하고 있었던 듯 보이는데요. 이것은 갑자기 늘어난 도강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최 씨는 알고 있었습니다.
최지애: 우리가 나라 배반하고 월경자들로만 집합하는 11호 노동단련대였어요. 교화생들은 3년에서 15년까지 있지만 우리는 딱 1년 과정에 죄를 씻고 나가라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과정이 교화생보다 몇배로 힘들게 일하는 거죠.
북한의 교화소는 정치범, 경제범, 강력범이 함께 수용되는 구금시설로 남한의 교도소에 해당 됩니다.
죄인은 정식재판을 통해 수감여부가 결정되고 정치범수용소와 같이 온 가족이 수감되는 일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구타와 고문이 만연하고 수감기간동안 공민으로서의 모든 권리가 박탈당하게 되는 것은 마찮가집니다. 반면 노동단련대란 1995년 8월 기존의 노동교화소가 노동 단련대로 개편 되면서 시.군급 감옥의 역할을 맡게 됩니다. 노동단련대는 당의 지시를 잘 따르지 않는 자들을 교양 시키기 위해 쉬게 말해 죽도록 강제노동을 시키는 겁니다. 여기서는 농장지원, 건설현장 작업, 학습과 생활총화가 매일 반복 됩니다.
최지애: 우리는 이름은 불렀어요. 교화생들은 번호를 갖지는 우리는 이름을 부렀는데 월경자, 도강자로 부르기도 했고요.
기자: 교화생과는 함께 생활하나요?
최지애: 따로 분히돼있어요. 마주칠 수가 없어요. 일하는 장소는 가까운데 얘기를 못해요. 교화생들은 옷이 초록색으로 단체복을 입는데 우리는 자유복이예요. 교도소 옷이 없고 자기가 가지고 간 옷을 입고 사계절을 나야했어요. 들어가자 마자 내가 배치 받은 곳에 가서 짐을 몽땅 검수 하고 반을 갈랐어요. 반에는 여자 교도관이 서서 총을 메고 지키는 거예요. 신체검사처럼 깐깐하게 다 하는 거죠.
기자: 용덕리 11호 단련대가 이쓴 곳이 산에 있는 겁니까?
최지애: 산 근처 밑이라고 보면 되요. 산도 아니고 벌도 아니고 나무가 하나도 없는 그런 산이죠.
기자: 민가하고는 얼마나 떨어져 있습니까?
최지애: 그 근처는 민가가 없어요. 금방에는 동네 자체가 없어요. 민간인을 만날 수가 없어요. 보안원과 우리를 지키는 초소 가족만 있어요.
기자: 그분들은 수용소 안에 사는겁니까? 밖에서 사나요?
최지애: 우리 수용소 옆에 보면 집들이 몇 개씩 있어요. 그것이 보안원들의 집이예요.
기자: 노동단련대에서 얼마나 가야 마을이 나오나요?
최지애: 거의 70리 정도 가야 된다고 들었어요. 직접 가보지는 못 했는데 어떤 사람은 50리라고도 하고…
완전히 사람사는 마을과는 외떨어진 산중턱에 있는 자리잡은 수용소. 이곳에서 무슨일이 벌어지는 지 북한일반주민이 알기는 어렵습니다. 오직 죄인이라 불리는 수용자와 이들을 감시하는 보안원이 있을 뿐입니다.
최지애: 자기 말을 안 듣거나 일을 제대로 못 하면 보안원이 사정없이 때려요. 짓밟고 때리고 주먹으로 치고 …배가 고프면 주워 먹을 수도 있잖아요. 그게 안되는 거예요. 내 눈에 거슬리면 사정없이 맞아야해요. 우리는 죄인이니까.
증산 11호 노동단련대에서 수감자는 인간의 권리를 말할 수 없습니다. 죄인은 사람으로 보지 않았고 죄인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이들을 감시하는 보안원은 수감자의 생살여탈권도 쥐고 있는 절대자입니다.
최지애: 선생님이라고 불러야 돼요. 보안원들이 우리에게는 선생님이예요.
기자: 그 사람들은 항상 총을 쥐고 있는 겁니까?
최지애: 네, 항상 총을 메고 있어요. 다 총가지고 있어요. 도망치면 무조건 쏴 죽이라는 거예요. 쥐고 있어요. 여자들은 장총을 메고 있어요. 보초 서는 선생님은 여자예요. 별박은 여자, 특사 박은 여자, 담당 보안원은 별 두 줄에 하나, 두 줄에 둘 이정도 박은 그러니까 시내에서 일할 수 없는 인물이 못 났다던가 아니면 키가 작다든가 아니면 다리를 좀 전다든가 하는 이런 사람들
기자: 너희들은 죄인이니까 인간 대우 받을 권리가 없다. 선생님은 때려 죽여도 죄인을 때렸기 때문에 그것은 교화차원이다. 이렇게 하는 겁니까?
최지애: 교양차원이다. 이러죠. 딱 보는 앞에서 때려요. 너희가 이런 행동을 하면 이렇게 맞는다 도망치면 쏴 죽인다. 때리는 것은 발로 차고 내차고 이런 것은 크게 맞는 것도 아니고 장총 총탁에 맞아봐요. 얼마나 아픈지… 죄인이니까 대응을 못 하잖아요. 그냥 맞아야 해요. 그 사람 손움직임에 따라 맞아야 해요. 때릴때 그냥 맞는게 낫지 피하면 오히려 더 맞아요. 남자 보안원은 자기 눈에 잘 못 걸리면 정신없이 때려요. 술먹고 출근할 때도 있더라고요. 그때 잘 못걸리는 날에는 뼈도 못추리는 거죠.
단순하게 짜여진 하루일과 일어나서 잠자리에 들때가지 매일 하는 일이 똑같습니다. 또 다른 악몽이 시작되는거죠.
최지애: 기상해서 한시간 내에 밥을 다 먹고 세수를 끝내야해요.
기자: 밥 먹고 나서는요?
최지애: 밥 먹자마자 가면서 세수를 하는 거예요. 조그만 그릇에 물받아서 수건으로 대충 닦고 양치를 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그냥 얼굴만 대충 닦고 7시까지 집합해요. 1반부터 7반까지 줄을 딱 서야해요. 그러면 거기 총반장이 그날 할 일을 지시하는 거예요.
기자: 그 다음에는요?
최지애: 그 다음은 줄 맞춰서 철문을 열고 나가는 거예요. 자기가 맡은 담당구역에 가서 그때부터 일을 시작하는 거예요. 6시까지.
기자: 저녁 6시 까지요?
최지애: 네, 단련대에 7시에 들어와요 들어오면서 각 조장이 몸에 뭘 숨기고 들어왔나 검수를 해요. 그리고 자기 숙소로 가는 거예요. 숙소에 오면 거의 8시가 되고 그 다음 밥 먹고 방에 들어와서 똑바로 앉아서 점검을 하는 거예요. 인원 점검을 다하고 1시간 사상교육을 해요. 노래를 하던가 기초준수 사상을 공부해요. 도망치면 무조건 총살당한다. 이런 것이 벽에 빨간 글자로 해서 벽에 액자로 해 붙였어요. 엄청 많아요.
궁금증을 풀어드립니다. 오늘은 탈북여성이 말하는 증산11호 노동단련대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노동단련대 시설과 수감자가 하는 일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전해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