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송 재일교포- 우린 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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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궁금증을 풀어드립니다.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1960년대 일본에 사는 재일교포들이 북한으로 갔습니다. 북한이 지상낙원이라는 선전을 믿고 들뜬 마음으로 북송선에 몸을 실었던 사람의 수는 약 10만여명이나 됩니다. 20여년간 계속 됐던 북송사업에 대해 재일북송피해자가족협회 이태경 회장을 통해 알아봅니다.

이태경: 첫번째는 후회했다. 두번째는 북송 재일교포라고 해서 남조선이 고향이라고 해서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가 (북한에서)탄압을 받았다.

재일북송피해자가족협회 이태경 회경은 일본에 살다가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북송선을 탔을 나이가 당시 10살이었습니다. 청소년기와 장년기를 북한에서 모두 보내야 했는데요. 현재는 탈북해서 남한에 살고 있습니다. 먼저 북송 재일교포 사업이 무엇인지부터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재일북송교포는 1955년 2월 당시 북한 외무상 남일이 6.25전쟁에 따른 북한의 노동력 부족 현상을 해소한다며 재일교포의 귀환을 추진했고 이들의 생활을 최대한 책임질 것을 대내외에 공식 천명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이후 북한적십자사와 일본적십자사가 1959년 8월 13일. 인도 캘커타에서 만나 재일교포북송협정을 체결했습니다. 그리고 같은해 12월 14일 재일교포 1진 975명을 실은 북송선이 일본 니가타 항을 출발합니다. 이후 25년간 모두 150여차례에 걸쳐 재일교포 10만여명이 북한으로 갔습니다.

이태경: 어떤 사람들은 북송재일교포들도 그래요. 우리가 자발적으로 갔다고 그래요. 국제적십자사 하고 일본적십자사 통해 승인 받고 다시 한번 다짐 받고 갔잖아요. 그러니까 이사람들이 다 자발적으로 갔다고 하지만 난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속아서 간 것도 자발적으로 간 것인가? 이것은 사기다. 유괴다. 이런 겁니다. 속아서 간 것을 유괴라고 하는데 일단 북한에 가서는 다 억류돼 살고 있죠. 인권법에도 그렇게 돼있어요. 자기 나라를 떠날 권리도 있고 돌아올 권리도 있다 이렇게 돼있는데 우리는 한국이 고향이고 일본이 고향인 사람도 있는데 왜 그런 사람을 안보내는가? 또 조총련에서도 그랬어요. 일본인들 가면 3년이면 다시 돌아올 수 있게 한다고 했어요.

이태경 씨는 많은 사람이 사실을 잘못 이해하는 부분에 대해 답답함을 토로했습니다. 분명 일본에 살다가 북송선을 탔던 사람들은 거짓에 속은 피해자들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흔히들 북송선을 탄 사람 고향은 대부분 남한인데 왜 그렇게 대거 북한으로 갔는지 또 북송선을 탄 것은 전혀 강제성이 없었고 자발적이었다고 말합니다. 사실 당시 60만명의 재일교포 95 퍼센트가 이남 출신이었고 북한이 고향인 사람은 0.5퍼센트밖에는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태경 씨의 말처럼 북송선을 타기전 스스로 간다는 다짐을 받고 배를 탔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당시 상황이 어땠는지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요. 참고로 이태경 씨 부모님의 고향은 경상북도 경주입니다.

이태경: 한국이 그때 얼마나 힘들었어요? 생활하기 힘들고 하니까 우리 삼촌이 오지말라 고향이 별거 있나 잘살면 고향이지 이런 편지가 와요. 그래서 우리 아버지가 가지 못하고 눌러 앉아서 일본에서 장사를 시작했거든요. 그런데 일본의 발전을 보게 되면 55년도부터 74년까지 최고로 발전했다잖아요.북송사업이 60년대니까 그만하면 그때는 성장기에 들어섰을 때죠. 그때는 좀 살았죠. 이따금씩 고향에 돈도 보내주고 하니까 좋았죠. 그러니까 오지말라는 편지도 했겠는데 또 그때 당시는 한국에는 이승만 정부가 들어서 굉장히 정치적으로도 불안했어요. 그래서 한국이 나쁘고 북한이 좋다. 이런 선전을 할 굉장히 좋은 시기였죠.

지금 젊은 세대는 지난 과거 북송재일교포가 있었다는 사실을 잘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가슴아픈 일은 절대 다수에게 잊혀지거나 잘못 기억되고 있는 것이라고 이태경 씨는 말합니다.

이태경: 한국정부도 북송재일교포가 중요하지 않아요. 그것은 일본하고의 문제지 한국하고의 문제인가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고요.북송재일교포라고 하면 한국에서는그때 당시 빨갱이를 따라간 사람으로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 우리 아버지 경우만 하더라도 원래 한국에 오려고 했다가 60년대 이승만 반대투쟁도 있고 그리고 그때는 한국하고 조선하고 빨리 통일이 되는데 북한에 의한 통일이 된다고 했거든요. 조만간 통일될 것이다 그래서 북한에 갔다가 빨리 고향으로 제일 먼저 가겠다 그래서 갔죠. 2-3년이면 고향에 가는 줄 알았거든요. 조총련에서 그렇게 선전을 했거든요.

차별이 없으며 일자리를 보장한다는 말을 믿고 또 제일먼저 고향땅을 밟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었던 이들은 현지에서 생활은 어땠을까? 이 씨의 증언은 이어집니다.

이태경: 3계층 51개로 북한에서 분류를 하는데 최하층으로 그중에 나는 적대계급이라고 말하는데 원래는 21번째인가 23번 째가 성분 분류에서 재일교포로 중간쯤 있었는데 한 15퍼센트에서 20퍼센트가 정치범 수용소로 잡혀 갔죠. 한가족에 그때는 한 6명 정도 되는데 한명이 잡혀가면 그 가정은 전부 감시대상이 되고 혁명화구역 아니면 적대계층으로 떨어졌죠.

사실 재일교포가 북한에서 갑자기 사라져 알고 보니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갔더라 하는 이야기는 15호 요덕수용소 실태를 책으로 폭로했던 강철환 씨를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졌는데요. 남한에서는 지난 2003년 ‘수용소의 노래’란 제목으로 이어서 미국에서는 ‘평양의 수족관’이란 제목으로 출판됐습니다.

강철환 씨는 재일교포 3세로 평양에서 태어났지만 그가 9살 되던해 조총련 간부 출신인 할아버지가 정치범으로 낙인찍혀 집안이 풍비박산 난 경우입니다. 부모는 강제이혼을 당했고 어머니를 제외한 가족들은 모두 함남 요덕 혁명화 구역에 수감돼 10년동안 수용됐다가 탈북해 현재 남한에 살고 있습니다. 기자가 서울을 방문했을 때 강 씨와 인터뷰한 내용 잠시 들어보시죠.

강철환: 어릴때는 할아버지가 죄를 지었다고 하니까 할아버지가 굉장히 미웠지 왜 할아버지는 당에 죄를 짓고 우리를 힘들게 하는지.. 그런데 제가 철이 들면서 할아버지가 죄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됐어요. 이것은 북한 정권의 문제이지 할아버지의 죄가 아니다. 그때부터는 할아버지가 불쌍해 보였어요. 많은 집안에서 가장들이 그런식으로 아이들에게 몰려서 죽은 그런 경우가 많아요. 어떤 경우는 죄를 지은 당사자가 수용소로 같이 오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집안은 아이들이 아버지를 몰아 부쳐서 그 아버지가 다 죽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아이들이 커서 보니까 그게 아닌거죠.

북한에서 재일교포 1세대는 물론 그들의 자녀들까지 모두 연좌제로 피해를 봤야했습니다. 그것은 북한에서는 풀수 없는 족쇄였고 북송재일교포의 운명이었습니다.

이태경: 정말 조심하고 살았어요. 우리집 가훈이 바보가 될지언정 말을 절대하지 말라고 했어요. 바보처럼 말하지 말라는 겁니다. 안다고 해서 일본이 어떻고 자본주의가 어떻게 이런 말을 하다가는 잡혀가거든요. 우리 친구들 거기서 많이 잡혀갔어요. 우린 그런 것을 목격하고 살았으니까.

재일북송피해자가족협회 이태경 회장은 북송선을 탔던 사람들을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태경:하나는 조총련 간부들도 속았어요. 자기도 속았으며 또 많은 사람들을 속였어요. 조총련 간부들도 마지막에는 북한에서 얼마나 비참하게 죽은 지 몰라요. 맹목적으로 속았어요. 사람이란 것이 더 좋은 세상을 보자는 것이 본능인데 지상낙원이다. 마음껏 배우고 일하며 일자리도 많고 먹을 것도 많다 해서 선전에 속아서 간사람. 세번째는 강제로 간 사람도 많아요. 자기 아버지가 아들을 보낸 사람, 처녀총각이 서로 사랑해서 따라간 사람도 많고 일본인 처들은 아이들 따라 갔다고 해요. 아이들을 버리지 못해서 할 수 없이 따라간 것이 일본인 처거든요. 일본에서는 가지 말라 가면 우리 가족 족보에서 삭제하겠다고 했는데 간 사람이 일본인 처죠.

궁금증을 풀어드립니다. 오늘은 재일북송교포사업은 왜 어떻게 이뤄졌는지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