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김정일 경호원이었다-이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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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궁금증을 풀어드립니다.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북한 지도자의 생활은 외부세계에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북한주민도 모른다고 합니다. 아니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표현이 맞겠습니다. 오늘은 김정일 친위대원의 수기 “나는 김정일 경호원이었다”의 저자인 탈북자 이영국 씨를 통해 북한지도자의 일상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이 책을 쓴 이영국 씨를 간단히 소개 하겠습니다. 이 씨는 1962년 생으로 함경북도 무산군 무산읍에서 태어났습니다. 1978년 조선노동당 조직지도부 5과 대상으로 선발돼 당중앙위원회 호위부 6처에서 김정일 위원장의 경호원으로 10년간 근무했습니다. 그리고 군제대후 탈북해 남한행을 시도하다 체포돼 정치범 수용소인 제15호 요덕관리소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수용소에서 출소한 후 다시 탈북해 2000년 5월 남한으로 갔습니다.

기자: 경호원이 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영국: 경호원은 원래 1977년부터 했는데 조직지도부에 원래 간부과가 있었어요. 중앙당 간부를 선발하고 했는데 그 안에 간부 5과를 만들었어요. 김정일 경호원을 뽑기 위해서요. 지방 학교 한 개 군에서 10명 정도 밖에 못 올라갔어요. 그런데 마지막 최종합격자는 1명이었어요. 뽑는 과정이 한 1년 걸렸어요. 신체검사를 군에서 하고 정신상태 부모가 노동당에 입당했는가 등을 봤어요. 가족관계 8촌까지 따져서 체력, 정신상태, 성격, 품행을 보고 시, 도 중앙당에서 사상검열 하고 올라가서 1978년 5월에 가니까 군복을 입히더라고요. 그때는 김정일 경호원이 될지 몰랐지요. 처음에는 놀랐죠. 사상교육을 6개월 받았고 태권도, 가격, 경호사업 등 훈련받고 1년 뒤인 1979년 1월 1일 본청사(북한노동당 청사)에서 김정일이 직접 하얀 신발하고 하얀 옷을 입고 머리는 북한으로 말하면 깍두기 머릴 하고 나와서 배치하고 그때부터 우리가 경호를 했죠.

기자: 1978년 5월 당시 나이가 어떻게 됐나요?

'나는 김정일 경호원이었다'의 저자 탈북자 이영국 씨. 사진-이영국 씨 제공
'나는 김정일 경호원이었다'의 저자 탈북자 이영국 씨. 사진-이영국 씨 제공

이영국: 17살이었어요. 만 17세가 돼야 되는데 난 5학년 1학기 다닐 때예요. 북한은 9월 1일 학기가 시작되니까 저는 한 학기를 못 다녔어요. 합격자가 없으니까 나이가 좀 안 돼도 보낸 거예요. 저는 어린 나이에 갔어요.

기자: 17살 때 1년 교육받고 경호원이 되신 겁니까?

이영국: 6개월 기본 교육을 받았고 근무에 투입됐어요.

기자: 경호원은 특별훈련을 받고 오랜 복무를 한 사람이 할 것 같은데?

이영국: 아니죠. 우리가 경호원 뽑을 때 5과에서 뽑힌 것은 처음이에요. 내가 갔을 때는 김정일 경호하는 것이 한 25명 정도밖에 없었어요. 그 다음 김정일이 1979년 1월 1일 중앙당에 나오면서 그 다음부터 200명씩 뽑고 했어요. 그때는 호위사령부에서 나와 지켜줬거든요. 우리를 선발하면서 호위사령부 밀어내고 부대가 커진 겁니다.

기자: 정식 부대 명칭은 뭡니까?

이영국: 명칭은 당중앙위원회 호위부 6처. 우리는 밖에선 호위부란 말을 안 쓰고 6처란 말을 했어요.

기자: 만 18살에 김정일 위원장을 처음 본 거군요.

이영국: 처음 봤죠. 사진은 1년 전 올라갔을 때 그때 경호부대 안에 사진이 김일성하고 김정일 하고 두 개 걸려있었어요. 사진을 보니까 예쁘더라고요. 실제 본 것은 1979년 1월 1일 처음 봤죠.

기자: 당시 김 위원장의 위상은 어느 정도였나요?

이영국: 내적으로는 후계자였지만 북한 사회에는 1982년 10월 10일 처음 후계자로 텔레비전을 통해 직위를 공개 했어요. 그전에는 우리 경호원들밖에 몰랐죠. 중앙당 간부들이나 알고요. 만수대예술단, 피바다가극단 등 예술분야 사람들이 좀 알고 그리고는 비밀이었기 때문에 사회에서는 몰랐어요.

기자: 일반 고위층 경호와 후계자 경호는 다를 것 같은데 어떤 식으로 경호가 이뤄집니까?

이영국: 특이한 것이 김일성은 공개적 했다면 김정일은 경호원 몇 명 외에는 호위사령부도 모르고 김일성도 모르게 특이하게 비밀이 많았어요. 당자금 가지고 경호부대를 운영했으니까 호위사령부 자체가 몰라요. 김정일이 우리에게 팔에다 마크를 주면서 친위대라고 했어요. 나의 경호원들은 나의 친위대다라고 방침이 떨어졌어요. 나의 친위대라는 말을 많이 했어요. 경호원들은 김정일이 말한 것을 매일 밤 학습을 해요. 우리가 들은 것도 보고를 하고요. 그런 학습을 많이 했어요.

기자: 소수의 정예요원으로 생활을 했을 텐데 당시 경호원 규모가 어떻게 됩니까?

이영국: 처음에는 250명에서 300명 정도 됐어요. 그때는 중앙당 청사 김정일이 있는데 한 250명 정도 있었고 김영숙과 사는 김정일 관저에 50명 정도가 지키고 해서 한 300명 있었어요. 그리고 1982년 김정일이 후계자로 공표됐을 때부터 부대가 한번에 1천500명 씩 늘었어요. 왜냐하면 김정일 별장이 있는데 거기엔 정각, 수영장, 승마장, 회담장, 등산길, 헬기장, 백사장이 있는데 야구장만해요. 그런 것이 북한에 14개를 건설하면서 부대가 그렇게 커졌어요.

기자: 처음 시작 5과에서 시작했을 때 경호원의 위상도 다른 부대원과는 틀렸을 텐데 지급장비나 복장이 어땠나요?

이영국: 틀렸어요. 우리는 천을 독일에서 사다 썼어요. 이북에서 생산한 것은 호위총국, 호위사령부에서 입었지만 우리는 한 벌 두벌이 아니고 킬로로 수입해서 우리에게 공급했어요. 천 자체가 가볍고 몸에 붙지 않고 부드럽고요. 우리가 그런 수입산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어요. 무장장비는 무력부나 호위사령부에서는 NK자동소총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 것은 빤짝빤짝 하고 거기다 “김정일 동지를 목숨으로 호위하자” 구호를 총에 마크해 넣고 일반 부대는 총을 메는 끈이 천이지만 우리는 가죽이었어요. 우리는 한 개 분대가 12명인데 250발짜리 탄통을 한 기관총 이것은 무력부에서는 한 개 중대에 있는 것이지만 우리는 사거리 1000미터짜리 기관총이 한 개 분대에 하나 있었어요. 또 75미리, 45미리 발사관이 분대에 한 개 있었고 투척기가 하나 있었고 한 개 소대에 휴대용 60미리 박격포가 있었고 무장장비를 보면 한 개 소대가 무력부의 한 개 대대급에 대비되는 무장장비를 우리가 가지고 있었어요.

궁금증을 풀어드립니다. 오늘은 북한 지도자의 경호에 대해 10년간 김정일 위원장의 경호원이었던 이영국 씨와 얘기 나눴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