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과 미송환 국군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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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궁금증을 풀어드립니다.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한반도에 1950년 전쟁이 발발한 이후 68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아직도 휴전상태인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갈라졌고 이산가족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전쟁 중 포로가 된 국군문제는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로 남겨졌습니다. 오늘은 6.25전쟁과 국군포로에 대해 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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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은 3.8선을 넘어 기습 남침을 감행하였다. 소련제 탱크 T 34를 앞세운 북한군은 전쟁발발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였다.

한국역사박물관이 만든 6.25전쟁 교육영상을 들으셨는데요. 이처름 전쟁은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됐습니다. 당시 김일성은 소련의 스탈린, 공산화된 중국의 마오쩌둥으로부터 남한 침공에 대한 허락을 받고 무기와 병력지원을 받아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에 남한으로 밀고 내려갔습니다.

남한의 이승만 대통령은 갑작스런 북한의 공격에 대해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고 미국 주도하에 열린 유엔 회의에서 역사상 최초로 군대 파견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7월 1일 미군 참전을 시작으로 16개국이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이때 전세계 6개 대륙에서 파견된 다국적 군은 193만 여명이었습니다.

동영상: 국군과 유엔군은 8월 초 낙동강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하여 북한군과 맞섰다. 9월 15일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의 허리를 자르고 본격적은 반격에 나섰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어 6.25전쟁은 휴전상태로 들어갔다.

밀고 밀리는 공방전은 3년 1개월 간 계속 됐고 결국 종전이 아닌 휴전으로 막을 내립니다. 폐허로 변해버린 한반도는 서서히 복구가 돼 제모습을 찾았지만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가족을 잃은 아픔과 다시 만날 수 없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전쟁포로가 된 후 북한 땅에 억류된 국군포로입니다.

군가 영양가: 인생의 목숨은 초로와 같고 조국의 앞날은 양양하도다.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아~! 아~! 이슬 같이 죽겠노라.

6.25전쟁 당시 낙동강 최후 저지선 전투에서 국군이 불렀던 군가입니다. 이렇게 젊은 병사들은 동족상잔의 비극에 몸을 던졌고 치열한 전투에서 살아돌아온 병사도 있었지만 북한에 포로가 된 국군의 수도 많았습니다. 지난해 7월 저희 RFA서울지국이 취재했던 탈북한 국군포로 위로 행사 잠시 들어보시죠. 귀환 국군포로 허재석 씨입니다.

허재석 : 38년동안 굴 안에서 석탄 캐는 일만 했습니다. 석탄을 캐면 받치는 동판이 있는데 무게만 75kg입니다. 하루에 보통 3동판을 캤습니다. 국군포로 대부분은 탄광에 있었습니다. 내무성 산하 건설대가 있어서 거기서 국군포로를 관리했습니다.

지난 2000년 탈북해 고향으로 돌아간 서 씨는 북한에서 겪어야 했던 일들에 대해 자세히 증언했는데요. 최근에는 귀환 국군포로 소식을 접할 수가 없습니다. 피랍탈북인권연대 도희윤 대표입니다.

도희윤: 가장 큰 원인은 이분들이 생존해 계신다면 연령대가 거의 80살이 넘습니다. 북한의 남자 평균 수명이 60-65살입니다. 그렇다면 이분들은 거의 15년을 더 사셔서 생존해 계신다는 겁니다. 북한에서 영양상태도 안 좋고 마음이 편해야 하는데 감옥 아닌 감옥에서 사신다는 것이 너무 어렵죠. 또 한 가지는 저희가 2010년경까지 83명 정도의 국군포로가 귀환했는데 그 이후에 북한에서 이분들에 대해 관리를 철저히 했습니다.

80여명이 넘는 증언이 있지만 정작 북한당국은 국군포로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북한전문가 이훈 씨입니다.

이훈: 국군포로들이 거기서 왜 다들 결혼해서 살 수밖에 없었는가 하면 북한체제 재건을 위한 방책이었던 겁니다. 그 당시 북한은 국군포로는 없고 북한에 귀화했다고 했습니다. 실제 북한에서 광산이나 외곽에 소개시키면서 현지 여성과 강제결혼을 시켰어요. 그렇게 북한 주민을 만든거죠. 북한은 노동력이 필요했고 국군포로는 그런 과정을 겪은 겁니다.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은 또 대를 이어 벌어지고 있습니다. 탈북한 허재석 씨는 국군포로 당사자였지만 북한에서 태어난 그들의 자녀도 광산에서 일하며 차별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은 아버지를 원망하게 되고 그런 자녀를 보면서 아버지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습니다. 탈북한 국군포로 가족 김현서 씨 입니다.

김현서: 북한에서는 많이 원망했어요. 빨리 죽으라고까지 했어요. 왜냐하면 그렇게 사회적으로 손가락질 받고 남들은 나보다 못한 친구들도 대학가고 군에가고 또 여자들은 시집도 잘가고 하는데 우리는 그런 것을 엄두도 못 내니까요. 얼마나 원망하고 살았는지 몰라요. 왜 저런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이렇게 고생을 하는가?

기자: 지금은 어떠세요?

김현서: 여기 와보니까 너무 맘 아프죠. 그때 일을 생각하면 정말 부모님한테 죄인이죠.

8남매 중 4번째로 김 씨는 아버지에 대한 좋은 기억이 없습니다. 대화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어디서 어떻게 인민군에 포로가 됐는지 조차 그 내용을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김현서: 제일 많이 한 것은 저희는 광산에서 일하면서 아버지를 원망 했으니까 남조선 가족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오빠들도 군대도 못가고 먹고 살기도 너무 힘드니까 우리는 아버지를 원망한 것이 잘 먹이지도 못하면서 왜 이렇게 자식을 많이 낳았나 이거였어요. 그러니까 아빠가 하는 말이 내가 통일이 되면 뭘 가지고 가겠는가 아무것도 없지 않는가. 통일의 선물이라는 것이 너희들을 한달구지 싣고 가는 것이다. 고향에 선물은 너희다. 그런 얘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김 씨에 따르면 탈북해 남한에 사는 국군포로 자녀들은 98세대 300여명 입니다. 이들은 아버지가 국군포로였다는 이유만으로 출신성분의 불이익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남한에 갔을 때는 어떤 보상을 받지 않을까 기대도 있었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이들을 구제할 수 있는 법적근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김현서: 그러니까 왜 그렇게 되냐하면요. 아버지가 6.25때 전사한 것으로 됐잖아요. 아버지는 6.25때 전사했는데 우리는 그 다음에 낳았고요. 국방부에는 우리를 국군포로 자식이라고 인정을 했지만 아버지 호적에 올라가지도 못하고 있어요. 일반 탈북자는 북한에서 배우고 왔다고 어디가서 직업이라도 구하고 국방부 나가서 강의도 하고 하는데 우리는 못해요. 하지만 우리보고 하라면 더 잘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노예처럼 살던 사람들인데 우리를 안보강의를 하게 해달라 그러면 우리가 배우지 못해서 말을 못한다고 하면 일주일이나 교육을 해주면 우리가 배워서 사회에 기여를 하겠다 이런 말도 했거든요.

매년 6월이면 다시 찾아오는 아픔을 극복하고 언제쯤이면 환하게 웃을 수 있을지 김 씨는 아버지의 위패가 모셔진 곳을 찾아 그리움을 달래고 왔습니다.

김현서: 1년은 12달이지만 항상 6월을 기다리거든요. 6월에는 현충원에 찾아가면 아버지와 같이 한국에 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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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증을 풀어드립니다. 오늘은6.25전쟁과 국군포로에 대해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