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실체] 시나리오 작가 리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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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노동당 통일 전선 부 대남 정책과 연락소 부원이었고 김정일을 두 차례나 접견한 일급작가였던 장진성 씨가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60년 독재 체제와 현대판 봉건 세습에 대한 진실과 배경을 밝힙니다.

북한에서 가장 유명한 시나리오 작가라면 조선 영화 문학창작사 사장 리춘구를 꼽습니다. 그는 1942년 4월 12일생으로서 북한에선 김정일과 동갑 나이로 알려져 있습니다. 리춘구와 김정일의 첫 인연은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당 선전 선동 부를 맡고 있던 김정일은 수령영화 창작 지도를 위해 조선예술영화촬영소에 자주 나갔었습니다. 그때 리춘구는 김일성 종합대학 어문학부 창작 과를 갓 졸업한 새내기 시나리오작가였습니다. 김정일은 시나리오 작가들과의 회의에서 제안할 것이 없는 가고 물어봅니다.

노 작가들이 다들 충성경쟁을 위한 제안만을 하자, 김정일은 젊은 작가들도 이야기해보라며 리춘구를 지목하게 됩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리춘구는 아무리 젊은 작가들이 좋은 작품을 써도 영화로 실현되자면 너무 많은 절차를 거쳐야 하고, 더구나 영화주제를 빼앗기는 경우도 있다며 젊은 작가들의 처지를 토로했습니다. 김정일은 '시나리오가 준비되면 자기에게 직접 가져오라.'며 함께 영화를 만들어보자고 말합니다. 리춘구의 첫 영화 '열관리 공'은 그렇게 나오게 됐습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리춘구는 "남들보다 좀 튀는 사람"이란 딱지가 붙게 되고, 나중엔 조선 영화 문학 창작 사에서 가장 실적이 나쁜 작가로 몰리게 됩니다. 한상순, 백인준, 김희봉, 리종순과 같은 종전의 유명 선배작가들이 그를 싫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리춘구는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지시를 위반한다'는 내용으로 당 조직 부에 신고편지를 쓰게 됩니다, 당 조직 부의 검열을 받은 조선 영화 문학 창작 사는 그때부터 젊은 작가들의 시나리오를 년 중 몇 편씩 의무적으로 필름에 담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리춘구는 선배 작가들에게는 악동으로, 후배 작가들에게는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랬던 리춘구에게 뜻밖에도 좋은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북한에는 당 선전 선동 부 산하 조선영화문학 창작사와 군 소속 4,25영화문학 창작사 두 개만 있었습니다. 그렇듯 비좁았던 영화환경에 신상옥 영화 촬영소라는 것이 새롭게 생겨나게 됐던 것입니다. 신상옥 씨는 김정일의 지시로 북한에 납치된 남한의 유명한 영화 감독입니다. 김정일은 신상옥 감독의 평양정착을 위해 수백억을 들여 신상옥 영화촬영소를 지었고, 국내 최고의 작가, 연출가, 배우들을 거기에 총 망라시켰습니다.

평양시 대동강구역 문수 동에 위치한 신상옥 영화촬영소는 신상옥 감독 탈북 이후 조선중앙방송위원회 TV총국으로 전환됐습니다. 신상옥 촬영소는 당시 시나리오작가, 연출가, 배우들에겐 서로 가고 싶어했던 꿈의 직장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김정일의 관심이 비상하게 높았던 곳이었고, 외국영화사들과의 합작으로 외국출장을 자주 갈 수 있었던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체영화 이론의 구속을 거부했던 신상옥 씨만의 독특한 영화 철학으로 작가나, 연출가, 배우들이 편하게 영화창작에 몰두할 수 있어서였습니다. 조선영화문학 창작사 유명 작가들이 신상옥 영화촬영소로 옮겨가자 리춘구는 일약 조선영화문 학창작사 창작실장으로 승진하게 됩니다. 그러나 리춘구는 승진한 것만큼 당의 비판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신상옥 영화촬영소 영화만 인기였고, 조선영화문학 창작사, 4.25영화문학 창작사 영화들은 누구도 관심을 돌리지 않을 때였습니다. 당 선전선동부의 대부분 영화 예산도 신상옥 영화창작단에 집중되어 다른 창작사들은 필름마저 부족한 형편이었습니다.

신상옥 감독 탈북 이후 김정일의 관심은 다시 조선영화문학 창작사로 돌아오게 됐고, 그때부터 리춘구 영광의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리춘구가 김정일의 신임을 얻게 된 중요 계기는 영화 '자신에게 물어보라'를 만들었을 때였습니다. 영화는 자기 직업 환경에 불평 많은 산골 소목장 청년이 '당신 같으면, 아니 당신이라면 딸을 이런 곳에 보낼 수 있겠는가?'고 묻자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어느 한 당 간부의 이야기입니다.

김일성은 당간부의 참된 전형을 만들었다며 기뻐했고, 그 영화에 반한 김정일은 리춘구를 포함하여 영화에 동원됐던 배우들까지 모두 외국 관광을 보내주었습니다. 리춘구는 연이어 당 간부를 주인공으로 하는 '군당책임비서'. '보증', '심장에 남는 사람'의 시나리오를 썼습니다. 남한 노래방들에서도 부를 수 있는 '심장에 남는 사람' 작사자가 바로 리춘구입니다.

그의 시나리오가 파격적이었던 것은 그 전까지 북한 영화에서는 당간부를 비판의 대상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리춘구에 의해 처음으로 당 간부가 사회의 부정인물로 형상되게 됐습니다. 물론 당 책임간부가 아니라 부 초급당비서, 부 책임비서, 이렇게 중간 영역으로 설정하긴 했지만 당시 북한 영화에서는 그것도 엄청난 시도였습니다. 시나리오 단계에서 당 선전선동 간부들이 부결하면 리춘구는 '수령님과 지도자 동지 외 누구나 비판할 수 있다. 그 외 절대인물이란 있을 수가 없다.'고 맞받아 쳤습니다. 그만큼 리춘구는 당 간부들도 피할 만큼 김정일의 신임이 컸습니다. 그는 '김일성상계관인'. '김일성 훈장', 이중 노력영웅 수상자였으며 김정일이 선물로 준 최고급 '벤츠'도 직무용과 자가용으로 두 대나 되었습니다.

김정일의 오랜 동지이며 당선전선동부 제1부부장이었던 최익규도 리춘구를 시기하다 혁명화를 갈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북한에선 김씨 일가 외 절대 신분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북한이 한해 영화예산 대부분을 쏟아 붓는 다 부작 영화가 있습니다. 김 씨 일가를 민족의 지도자로 왜곡하는 "민족과 운명"이란 영화입니다. 북한 정권은 영화의 규모를 강조하기 위해 시나리오도 리춘구 외 유명 시나리오 작가들을 총동원합니다. 김씨 일가를 민족의 구심점으로 조작하자니 영화의 대부분 주인공들이 남한이나 해외 유명 친북인사들입니다. 박정희, 전두환 전 대통령과도 친분을 맺으며 남한 정치권에 깊숙이 관여했던 홍영자라는 가상인물을 만드는 시나리오 단계였습니다. 리춘구는 홍영자의 삼각관계를 만들자고 했고, 북한의 고전적인 시나리오 작가들은 주체문학 이론을 위반한다며 반대했습니다. 나중엔 김정일이 리춘구를 직접 불러 굳이 삼각연애를 만들려는 의도를 물어봅니다. 그 자리에서 리춘구는 영화의 재미를 위해 북한 출신이 아니고 남한 출신 여성이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라고 대답하게 됩니다. 그러자 김정일은 '삼각연애나 하던 여자가 나중에 수령님을 존중한다?'고 의문을 던졌는데도 리춘구가 설득하려고 하자 아무 대답 없이 나가 버립니다.

다음날 리춘구는 모든 명예직을 박탈당하고 양강도 농장 원으로 해임 추방 당합니다. 그의 죄는 김정일의 심중에 어긋나게 감히 토를 달았다는 것입니다. 리춘구는 근 3년 동안이나 양강도에서 감자농사로 생계를 유지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 결핵을 앓고, 나중엔 급성간염으로 완전히 폐인이 되었습니다. 북한에선 결핵, 간염과 같은 전염병 환자들은 김정일을 접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김정일 접견 전에는 반드시 남산 정부 진료소에서 신체검사를 받게 돼 있습니다. 최 측근들이나 접견 자들에 대한 관리 차원에서 해마다 신체검사를 하는 이유도 김정일의 건강을 위해서입니다. 김정일 접견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곧 신임에서 멀어진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훗날 리춘구는 명예회복이 됐지만 그것은 김정일의 용서정치를 보여주기 위한 것일 뿐, 현재는 시나리오 창작에서나 모든 명예활동에서 제한된 삶을 살고 있는 불우한 운명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