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 시간에는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김경희는 1946년 5월30일생입니다. 원래 남동생 김만일이 있었는데 1948년 경 지금의 평양시 중구역에 있는 당 창건기념관에서 익사하였습니다. 당 창건기념관은 일제 때 사업가였던 박정식의 개인저택이었습니다. 해방 후 박정식은 김일성에게 자기 저택을 선물하였고, 그 인연으로 박정식은 북한 초대 재정상으로 임명됩니다.
훗날 김일성은 6.25남침 준비를 위해 박정식의 위장월남을 추진했고, 북한군의 서울 점령 이틀 전 그는 북한간첩으로 사형 당합니다. 그의 맏아들이 바로 북한 내각 체육상이었던 박명철 위원장입니다. 김경희의 동생 김만일이 익사한 연못은 현재 당 창건기념관 정원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고 이후 김일성이 그 연못을 당장 없애라고 지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김경희와 김정일의 형제애는 남달랐다고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버지 김일성은 바쁜 국사로 늘 밖에서 살았고, 대신 계모인 김성애의 손에서 자라야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김일성이 장성택과의 결혼을 반대할 때 김경희 편을 들어준 사람도 김정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때 김일성은 김경희와 동갑인 장성택이 신분상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부에 다니던 그를 원산경제대학으로 내려 보냅니다. 하지만 김경희가 주말마다 직접 차를 몰고 원산으로 내려가자 김정일은 저러다 차 사고라도 날까 두렵다며 김일성에게 안 좋은 신분이면 좋은 신분으로 만들면 되는 것이라고 설득하여 결혼허락까지 받아냅니다. 그 약속대로 김정일은 장성택의 출세는 물론 그의 형 장성우를 3군단장, 평양시 위수사령관으로 승진시켜줍니다.
그렇듯 김정일이 몹시 아끼는 김경희였지만 늘 오빠에 대한 불신이 컸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김일성이 김정일의 과도한 권력남용에 대한 불만과 고민을 늘 딸에게 털어놓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쩌면 김경희는 김일성, 김정일 부자간의 권력 갈등과 대립의 가운데서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그는 일찍이 권력 야심을 버리고, 당 경공업부 부장업무에도 거의 무관심했습니다. 한마디로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었던 권력의 잔인한 속성을 목격하면서 그냥 여자로 살고 싶었던 김경희였을 것입니다. 아니 김경희는 거짓이 만들어낸 신격화 나라를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자기 삶까지도 조작하려는 권력에 반항하고 싶었던 고집스런 인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특히 그 권력의 중심이었던 김정일과의 갈등은 아버지 김일성의 죽음을 계기로 더 첨예해졌습니다. 김일성 사망 이후 추모기간 때 김경희가 김정일에게 마구 소리 지른 일화는 북한 간부들 속에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현장에 있던 조선중앙방송위원회 기자가 그 사실을 외부에 발설했다가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그런 김경희여서 김정일과 동석하는 현지시찰에서도 불쑥 부정적인 발언을 하여 주위를 경악케 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회의에서 모든 참석자들이 김정일을 향해 일어서서 만세를 부를 때 유일하게 앉아있기도 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 김정일 경호원들이 김경희를 에워싸자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며 퇴장하여 모두를 당혹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사건 이후 당조직부가 가택연금 결정을 내렸는데 이에 반해 김경희가 자살을 시도하여 봉화진료소에서 한동안 입원치료를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남한이나 외국 언론에서는 김경희가 프랑스에서 유학중이던 친딸 장금송이 2006년 부모의 결혼반대 문제로 고민하다가 자살하자 알코올 중독, 우울증이 왔다고 했는데 사실 김경희는 그 이전부터 심각한 정신질환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김일성의 딸, 김정일의 여동생이란 이유로 김 씨 신격화의 첫 희생물이 돼야만 했던 김경희, 권력의 유일화를 위해 항상 기획되고 연출된 삶만 살도록 강요받아야 했던 그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다 가졌어도 가진 보람과 행복을 전혀 느낄 수 없는 인생의 허탈감과 함께 부자의 권력 갈등과 대립에서 권력의 자괴감까지 들었을 것입니다.
남은 여생이나마 자기 삶을 살고 싶었던 김경희여서 애절하게 사랑했던 평범한 남자도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북한 주민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가 김성호입니다. 김성호는 1957년, 1982년 차이코프스키 국제음악 콩쿠르 영예상, 특등상, 수상자이며 1978년 차이코프스키 국제음악콩쿠르 바이올린 부문 종신 심사위원으로 추천받은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이며 평양음악무용대학 기악학부장 백고산의 제자였습니다.
김성호는 차이코프스키 국제음악콩쿠르에서 심사평가상을 받은 후 제2의 백고산으로 맹활약하다 갑자기 사라졌는데 그 이유가 김경희의 음악가정교사가 됐기 때문이었습니다. 1992년 당시 김성호에게는 평양음악무용대학 예비학부 피아노교수 리진희라는 애인이 있었는데 그 여성은 제가 탈북하기 전까지도 홀로 살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김성호를 그리며 기다렸지만 그 이후부터는 죽은 그의 영혼까지 사랑하며 홀로 지내는 여성이었습니다. 김성호를 납치 살해한 인물은 장성택입니다. 장성택은 1996년부터 시작된 사회안전성 "심화조사건"의 실제적 책임자가 된 후 제일 먼저 김경희의 정부인 김성호부터 체포하였습니다. 죄명은 그가 로시아 유학 당시 동구권 유학생들로 이루어졌던 반체제 조직에 가담하고 활동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김성호가 행방불명되자 김경희는 이 짓을 할 인물은 장성택 밖에 없다며 김정일을 찾아가 눈물로 애걸했지만 그때는 이미 김성호가 사형되고 난 후였습니다. 그 사건을 계기로 김경희는 장성택과의 별거에 들어갔고, 김정일과 동행하는 현지시찰에서까지 공개적 으로 장성택에게 망신주기를 한 일화도 있습니다. 최근 북한은 김정은 후계선언과 함께 김경희를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대장으로 임명했습니다. 물론 김경희의 독자적 활동은 물론, 공개적인 대외활동도 아직 제한된 채 말입니다. 이는 김경희의 공식직함 부풀리기를 통해 생존해 있는 김 씨 일가의 정치적 지위와 위상을 인위적으로 부각시키려는 의도일 뿐입니다.
하지만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이 해외활동 중 가끔 3대 세습에 대해서까지 비난의 목소리를 표출하는 것은 고모 김경희와 이어진 깊은 신뢰와 지지가 힘이 되어주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대외적으로는 온 나라의 일심단결을 과시하지만 정작 자기 일가 속에 뿌리박힌 모순도 좀처럼 해결할 수 없는 김정일인 것입니다.
0:00 / 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