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실체] 김일성 부자의 60년 독재체제와 현대판 봉건세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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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애의 노래'란 가요는 조선 중앙텔레비젼 방송이 '김정일 장군의 노래'와 함께 거의 매일 내보내는 노래입니다. 외국에서 보는 사람들에게는 북한엔 저 노래밖에 없는가 할 정도로 매우 신기한 현상입니다. 물론 전체 인민이 김정일의 동지가 되라는 강제적인 정서주입 목적이 있겠지요, 하지만 김정일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라고 해서 그처럼 매일 내보낸다는데 정말 놀랍습니다. 아무리 전체주의 국가라고 해도 모든 인민들의 음악적 취미까지 영도자, 한 사람을 닮도록 강요받고, 또 그것이 실제로 국가방송을 통해 매일매일 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노동신문들의 정론이나 기사들을 보면 김정일은 심지어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눈물을 흘린다고 합니다. 인민은 피로, 수령은 눈물로 나누는 동지애라는 것을 강조하자는 것 같은데요. 그래서 오늘 김 씨 일가의 실체에서김정일의 동지애가 과연 눈물로 이어지고 맺어온 뜨거운 인간애의 역사였는가에 대해 "정하철 사건"을 예를 들어 설명 하겠습니다.

북한정권은 김정일의 역사는 동지애의 역사였다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그런 선전 문구를 직접 개발하고 지시했던 사람이 바로 김정일의 동지, 다시 말해서 김정일의 최측근이었던 정하철 부장이었습니다. 정하철은 김일성종합대학 철학학부를 졸업하고, 노동신문사 기자에서 논설 실 실장, 부 주필, 당 역사연구소 과장, 조선중앙방송위원회 텔레비전 총국 총국장, 조선중앙방송위원회 위원장을 걸쳐 당 선전부장 및 선전비서로 임명됐던 인물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북한에는 당 조직부, 군사부, 통전부, 선전부, 국가보위부는 제1부부장직제로서, 부장직함이 공석으로 비어있었습니다. 이유는 유일지도체제 차원에서 북한 권력조직 내에서도 가장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그 부서들에 대해서만큼은 김정일이 직접 부장 직을 갖고 직접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더욱이 당 선전부는 김정일이 선전부 지도원으로부터 당 사업을 시작했기 때문에 그 업적 연장선에서, 그리고 이념국가라는 특성상 조직부에 이어 두 번째로 중요시됐던 부서였습니다. 김정일의 정하철에 대한 신임은 2000년 8월 수 십년 세월 비어있던 그런 선전부의 부장 직은 물론 비서권한까지 다 준 데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선전부장 겸 선전비서가 된 정하철의 권위를 보증이라도 하듯 김정일은 그에게 나의 동지이며 예언자라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랬던 정하철이 어느 날 밤 갑자기 본인은 물론 가족까지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가게 됐습니다. 반체제혐의라면 정하철이 김정일 동지를 배반했다고 인정하겠지만 놀랍게도 정하철은 김정일에게 너무도 초당적으로 충성했던 죄로 사라지게 됐습니다.

사건내막은 이러했습니다. 2001년 당시 김정일의 세 번째 처 고영희는 유방암을 앓고 있었습니다. 독재 권력으로도 어쩔 수 없는 불치병인지라 김정일은 측근들 앞에서 고영희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후계신호로 넘겨짚은 정하철은 김정일의 예언자라면 이 정도 앞서 나가야 한다는 성급한 마음에 2002년 2월 16일을 계기로, 고영희 우상화선전을 전국에 지시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의 어머니" "발걸음"도 바로 이때에 나온 노래입니다.

김정일도 당과 군으로 한정됐던 고영희 우상화 노래들을 들으며 후계문제와 연결시켜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말기 암에 걸린 처에 대한 연민과 배려정도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되자 김정일의 무관심 속에 후계문제는 점점 대중 속으로 퍼졌고, 당 간부들 또한 당연히 김정일의 방침을 받고 선전부장이 지시했으려니 믿고 충성 경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세 명의 아들 중 누구라고 딱히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수령의 계승성이 부각되자 과연 누구에게 대를 이어 충성해야 하는지 고위 간부들 속에서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마침내 당조직부 제1부부장 리제강이 보고를 했는데 의외로 김정일은 크게 격노하였습니다. 자기가 시퍼렇게 눈뜨고 살아있는데 누가 이런 짓을 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2004년 말 경 김정일의 동지인 정하철은 반당, 반혁명분자로 체포되었습니다. 예심 기간 조선중앙텔레젼 방송 설비를 현대화 하라고 1996년에 김정일이 준 천 만 달러 중 1만 달러를 횡령했다는 혐의도 추가되어 정치범수용소로 가족까지 모두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럼 김정일이 후계문제에 대해 왜 그렇게 민감한 반응을 보였을까요? 김일성이 사망할 때까지 부자간에 권력 갈등과 경계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부자간에도 권력은 나누어가질 수 없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 실례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제가 통전부에 근무할 때 김일성 호위를 맡았던 1호 호위국 간부로부터 직접 듣게 된 내용입니다. 1994년 7월7일 김일성이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는데 그때 왜 심장마비를 일으켰는지 아십니까? 그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날 남조선 김영삼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준비하기 위해 김일성은 묘향산초대소에서 경제일꾼회의를 소집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판문점을 넘어 오게 하려면 평양까지 철도를 빨리 놓아야 한다는 김일성의 말에 철도상은 쌀만 주면 가능하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때야 배급이 끊어진지 3개월이 넘었다는 사실을 처음 안 김일성은 경제일꾼회의를 중단하고 김정일에게 전화로 화를 냈다고 합니다. 자기가 이밥에 고깃국을 먹이겠다고 인민에게 약속했는데 어떻게 쌀 배급마저 못 주냐며, 왜 그것을 자기에게 숨겼냐고 말입니다.

북한 당 강연 자료들과 공개 문헌자료들에는 김일성이 그 날 유달리 담배를 자주 찾았다고 한 부분이 있는데 바로 그 충격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충격은 김일성이 오침을 마치고 다시 오후 회의를 준비할 때였습니다. 기다려야 할 경제부분 간부들이 김정일의 부름을 받고 모두 평양으로 소환되어 회의장이 텅 비었던 것입니다. 그렇듯 수령의 주석권한이란 상징적 의미일 뿐, 모든 권력이 아들 김정일에게 집중돼 있었기 때문에 김일성은 그 분을 견디지 못하고 심장 마비가 일어났다는 얘깁니다. 당시 아버지 김일성의 처지가 이제는 자신의 처지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제멋대로 후계자 만들기에 앞장섰던 정하철이 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하지만 그때로부터 5년 후인 2010년 김정일은 전국당대표자회의에서 26살의 어린 김정은을 서둘러 후계자로 공개했습니다. 2009년 8월 뇌졸 증으로 쓰러진 김정일은 제 아버지처럼 아들에게 수모당할 걱정보다는 세습의 대가 끊길 것이 더 두려웠겠죠.

아무튼 김정일은 이 "동지애의 노래"를 들으며 어떤 생각을 할 지 궁금합니다. 지나간 세월 속에서 사라진 정하철 같은 수많은 자기의 동지들을 생각하며 슬퍼할까요? 아니면 '동지애' 따윈 인민들에게나 필요한 감상적 충성이념에 불과한 것이라고 치부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