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5일은 예수가 태어난 성탄절입니다. 해마다 이맘 때 쯤 이면 남한과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국가들은 기독교의 창시자인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기위해 축제 분위기에 있지만 북한에서는 다른 인물의 탄생을 축하하고 있습니다.
성탄절 전 날인 12월 24일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첫 번 째 부인이자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의 탄생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김 씨 일가의 실체 오늘은 김정숙의 일생을 살펴봅니다.
김정숙은 일제 강점기인 1917년 12월 24일 함경북도 회령군 오산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일제의 탄압이 심했던 1922년 김정숙의 가족은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독립운동에 가담했습니다.
김정숙은 1931년 소년선봉대에 입대하고 1931년과 1932년에 추수투쟁과 춘황투쟁에 참가하는 등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 1937년에는 김일성이 작전 사령관으로 있던 중국의 동북항일혁명군에 가담해 김일성과 인연을 맺게 됩니다.
1941년 김일성과 결혼식을 올린 김정숙은 1942년 소련의 브야츠쿠에서 김정일과 김슈라를 낳았습니다. 또 1946년에는 훗날 김정은을 돌보게 될 김경희를 낳았습니다. 16살의 나이로 빨치산 부대에 입대한 김정숙은 글을 전혀 읽지 못하는 문맹이었지만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문 명사수였다고 합니다. 김정숙의 사격실력은 북한의 조선대백과 사전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1944년 조선인민혁명군 사격대회에 출전에 당당히 우승을 한 것은 물론 훗날 김일성의 경호를 담당할 정도로 뛰어난 사격솜씨를 자랑했다고 합니다.
김일성이 북한의 지도자 자리를 차지함에 따라 김정숙은 영부인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지만 그녀의 인생은 순탄치 못했습니다. 1932년 일제강점기 때 김정숙의 아버지와 오빠는 일본군에 의해 납치되어 살해되고 재산과 토지를 모두 몰수당해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됐습니다. 김일성과 결혼한 이후 김정일과 김슈라를 낳지만 김슈라는 4살을 넘기지 못하고 김일성이 근무하던 하바로프스크 바트코예 마을 우물에 빠져 죽게 됩니다.
김정숙이 네 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김일성은 김성애라는 여인과 불륜관계를 맺고 있었고 김일성은 김정숙이 네 째 아이를 출산할 때도 현장에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김정숙은 결국 1949년 9월22일 네 번째 아이를 출산하다가 아기와 함께 사망했습니다. 김정숙의 공식적인 사망원인은 출산 중 하혈과 과로 등으로 알려졌지만 김일성의 외도로 인해 병이 심해져 죽었다는 설과 임신 중 풍을 맞고 죽었다는 설이 나돌기도 했습니다.
지금 대부분의 북한 주민들은 김정숙을 북한의 국모이자 항일투사로 인식하고 있다고 북한 대학교수 출신 탈북자 김현아 씨는 말합니다.
김현아
: 조선의 어머니이다. 그러니까 국모이다. 김정숙은 항일투사였다. 김정숙의 첫 번째 업적은 김정일을 나아 기른 조선의 어머니이다. 그 다음은 여성해방투사이고...
그러나 북한 주민들에게 김정숙에 대한 인식이 이렇게 자리 잡힌 것은 김정일이 후계자로 공식 지정된 70년대 이후부터입니다.
김정숙이 사망한 후 김일성의 사실상 부인으로 자리를 잡게 된 김성애는 김일성의 총애를 업고 중앙여성동맹위원장 자리에 올라 엄청난 세력을 과시하게 됩니다. 김현아 씨의 말입니다.
김현아
: 김성애가 여맹을 이끌었다. 김성애는 정치 무대에 나서지 않았다가...70년 대 부터 여맹이 세지기 시작했다. 여맹은 강반석 여사를 따라 배우자는 운동도 벌였다... 여맹조직이 세지면서 여맹이 한참 떴다.
여맹의 세력을 확장시키던 김성애는 여맹 사무실에 걸려있던 김정숙의 사진을 떼도록 하고 그 자리에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의 사진과 자신의 사진을 걸게 하는 등 김일성 가계의 정통성을 자신에게 끌어 모으려는 노력을 펼쳤습니다.
어린나이에 생모를 잃고 계모 김성애 밑에서 자라난 김정일 이었지만 자신의 친모 김정숙을 격하 시키려는 김성애의 노력이 곱게 보일 리 없었습니다. 서대숙 전 하와이대 석좌 교수는 말합니다.
서대숙
: 김성애가 김정일을 키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성애에게도 아들이 있었다. 지금 폴란드 대사를 하는 김평일이 김성애의 아들이다. 훗 엄마와 맡 아들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김정일이 후계자로 선정된 이후 김성애를 완전히 제거했다.
자신의 계모와 이복동생들, 이른바 '곁가지'를 제거한 김정일은 자신의 친모 김정숙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김정숙 우상화 작업에 나섭니다. 서대숙 교수의 말입니다.
서대숙
: 김정일이 김일성의 계통을 김정숙과 연계해 백두산의 3대 장군이라고 내세운다. 이것은 전에 없었다. 김정일이 집권한 이후에 나온 것이다.
이후 김정일은 '항일의 여성영웅', '혁명의 어머니' 등 김정숙을 일컫는 찬양 구호를 만드는가 하면 김정숙의 이름을 딴 지역과 대학 등을 만들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과거에는 대학의 전공학과에서만 가르치던 김정숙 혁명역사를 2000년부터 전 학교로 확대시켜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 모든 학생들이 교육 받도록 지시했습니다.
북한의 예술작품에서도 김정숙에 대한 우상화 작업이 대대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미술 분야에서는 김일성과 김정숙 그리고 김정일을 의미하는 '백두산 3대 장군'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고. 영화와 연극 그리고 음악에서도 이들을 찬양하는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생모에 대한 우상화 작업은 김정일 세대에서 멈추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김정숙의 우상화를 통해 자신의 세습을 정당화 하려 했던 김정일처럼 지금 후계자로 지목된 김정은도 생모 고영희에 대한 우상화를 모색할 것이라고 서대숙 교수는 말합니다.
서대숙
: 김정일이 죽거나 활동하지 못하게 되면 고영희에 대한 업적이 많이 내세울 것이다.
김정은의 후계 작업이 순탄하게 진행되면 문맹이었던 김정숙이 이제는 모든 북한 여성들이 본받아야 할 여성으로 추대 되는 것과 같이 기쁨조 출신 고영희도 언젠가는 위대한 여성으로 추대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김 씨 일가의 실체. 진행에 이규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