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초대국가수반 김두봉의 숙청(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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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3대세습이 숙청의 대가로 이루어진 공포정치의 산물이라는 것은 해방 후 김일성이 측근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오늘부터 2회에 걸쳐 해방 후 조선신민당 당수로, 조선공산당과 합당한 이후에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김일성종합대학 초대 총장으로 활동하였던 김두봉의 숙청에 대해 이야기 해드리겠습니다.

김두봉은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에서 1889년에 태어났습니다. 어린시절부터 일제의 침략에 대한 적개심이 강했던 그는 일본인들이 세운 학교 입학을 거부하고 단신으로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와 기호소학교와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19살 나던 1908년에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한글(조선어)를 연구하던 그는 1910년 8월 일제의 강제합병조약으로 한일 완전합병이 선포되자 애국적인 동료들과 비밀결사단제인 대동청년단을 조직하였습니다.

그는 1910년에 나라를 빼앗긴 망국의 설움으로 울분에 차있는 우리 동포들을 계몽하기 위해 설립된 한국고전문학과 국사연구 기관인 광문회에 입사하여 잡지 ‘청춘’ 편집을 맡았습니다. 1910년 일제는 이완용 등을 앞세워 그해 8월 22일 강제 합병조약을 체결하고 8월 29일 한일 완전합병을 선포했습니다. 국권이 피탈되자 김두봉은 안교재, 남형우, 신배부, 이경희 등 동료들과 함께 비밀결사단체인 대동청년단을 조직하여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1913년 대동청년단이 일본 경찰에 적발되어 관련자들이 검거됨으로써 활동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배재학당을 중퇴해야 했습니다. 배재학당을 자퇴한 김두봉은 당시 최남선이 운영하던 광문회(光文會)에 입사하여, 한글을 연구하며 회보와 잡지 ‘청춘’ 등을 편집했던 것입니다. 이때부터 한글학자로도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 국어학자로 유명하였던 스승인 주시경 선생과 함께 국어사전을 만들기 시작했고 그가 갑자기 사망하자 그의 뜻을 계승하여 국어사전인 ‘조선말본’을 완성하였습니다. 한글학자로 유명해진 김두봉 선생은 1917년 모교인 보성고등보통학교 국어교원(교사), 휘문고등보통학교, 중앙고등보통학교 등에 국어초빙교원(교사)으로 근무하였습니다.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이 발발하자 그는 학생들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시위에 참여하였고 일제헌병이 그를 체포하려고 하자 상해로 망명하였습니다.

김두봉 선생은 상해에 가서도 한글학자로서 독립정신 배양을 위한 출판활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재 신채호 선생이 주필로 있던 '신대한신문'(新大韓新聞) 편집위원을 맡았고, 1919년 7월 7일 개회된 제5기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습니다. 1924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고, 그해에 상해에 있던 조선인(한인)교민학교인 인성학교의 국어교원으로 초빙되었습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났던 1929년에 한국독립당에 입당한 그는 그 다음해인 1930년 11월에 상해에서 열린 광주학생독립운동 1주년 기념식에서 안창호, 오의순 등과 함께 강연회에서 연설을 하여 참가자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하였습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일본인 학생들이 조선(한국) 여학생들을 희롱하면서 일어난 한국과 일본인 학생들 간의 충돌을 시작으로 벌어진 학생大시위 운동이었습니다. 이 운동은 광주를 거점으로 서울을 거쳐 전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김두봉 선생은 조선독립을 위하여 한국독립당과 조선혁명당 한국광복동지회의 등 애국적인 독립단체들을 망라하는 통일전선 결성에 앞장섰고 1935년에 한독당의 이유필, 송병조, 조선혁명당의 최동오, 한국혁명당의 윤기섭, 신익희, 의열단의 한일래, 박건웅, 한국광복동지회 김규식, 의열단 단장 김원봉 등과 함께 한국민족혁명당을 결성하였고 중앙집행위원 겸 조직부장의 직책을 맡았습니다. 당시 총재는 김규식, 당서기는 김원봉이었습니다.

그 후 조선의용대 편집위원, 조선독립동맹 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42년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를 결성하고 중국 팔로군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김일성이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 1941년에 소련으로 도망쳐서 해방될 때까지 소련군 군인으로 복무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1944년에 중국 연안에 있던 한인촌의 조선청년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1945년 2월에는 군관양성소로 개조하였고 이 학교 명칭을 다시 조선혁명군정학교로 개명하고 교장으로 취임하였습니다.

역사전문가들은 1940년대 김일성은 소련에 피해있었지만 김두봉 선생은 중국 연안에서 교육사업과 한글연구만 한 것이 아니라 항일투쟁 제1선에서 일본군과 싸웠다고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김두봉 선생은 일제의 패망과 함께 의용군 4개 대대를 인솔하여 중국 연안에서부터 4천 7백여리나 되는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1946년 2월에 신민당 당수를 역임하면서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지만 그해 8월 소련군정의 압력으로 김일성의 북조선공산당과 합당하여 북조선노동당 통합창당을 결성하였습니다. 그리고 통합창당된 북조선노동당 위원장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맡았습니다.

당시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들과 위원들의 명단을 소련군정이 스탈린에게 보냈는데 그 보고서가 1990년대 구소련이 붕괴되면서 대한민국에 넘겨져 그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 보고서에 따르면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은 5명이었는데 연안파는 김두봉과 최창익 2명이었고 국내파는 주영하 1명, 소련파는 허가이 1명, 항일빨치산파는 김일성 1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중앙당 위원은 43명이었는데 김일성의 빨찌산파는 4명인데 비해 김두봉의 연안파는 12명에 달할 정도로 그 세력은 막강하였습니다. 빨찌산파인 김일성과 김책, 안길, 김일은 해방 전 소련에서 군복무를 하였던 인물들이었고 연안파는 중국에서 팔로군과 함께 일제와 싸웠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북한정권이 1948년 9월에 정부수립을 선포하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는 국호를 정식 발표하였고 중앙인민위원회 상임위원회를 구성하면서 상임위원장으로 김두봉을 선출하면서 그를 북한의 국가수반처럼 대우한 것은 소련군정과 소련공산당의 기획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김일성보다 23살이나 나이도 많고 일본군과 제1선에서 싸운 그의 업적과 8만 명의 조선의용군을 거느린 조선독립동맹의 조직자였다는 사실은 무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김일성이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전쟁을 일으키면서 서울을 함락한 인민군이 남으로 진격하지 않고 서울에서 3일동안 머물고 있었던 것에 대해 김두봉의 연설내용을 근거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키기 이틀 전인 6월 23일 김두봉을 개성시 송악산일대에 배치되어 있던 인민군 제6사단에 내려 보냈습니다.

김두봉은 당시 6사단 소속의 제13연대, 제14연대, 제15연대 대대장급 이상 군관모임에서 시국강연을 하였는데 연설내용의 일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남녘동포를 해방시켜야만 합니다. 이제 부득이 해방전쟁을 개시하게 되는데, 일주일 동안만 서울을 해방시킬 것입니다. 서울은 남조선의 심장입니다. 그러므로 심장을 장악하게 되면 전체를 장악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거기서 남조선 국회를 소집하여 대통령을 새로이 선출하고 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 정부가 통일이 되었음을 세계만방에 알리면 어느 외국도 우리를 간섭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해방전쟁의 본분을 망각하지 마시고 맡은 임무에 충실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도 다 아시는 것처럼 전쟁시기 중국군이 참전하면서 중국 연안파 출신의 김두봉과 연안파들은 세력이 더 강해졌으나 전후 반종파투쟁이 벌어지면서 숙청되게 됩니다. 다음시간에는 김두봉 선생의 숙청 전말을 자세히 얘기해드리기로 약속드리며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