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초대국가수반 김두봉의 숙청(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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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동포 여러분! 구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에서 자행되었던 정치권력 유지를 위한 정적 숙청은 항상 죽음을 동반하였습니다. 소련공산당 서기장이었던 스탈린의 정치적인 반대파 세력들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소련군정이 스탈린의 지휘 하에 북한을 강점하고 김일성을 내세워 반대파세력들을 제거하였던 당시 소련에서 역시 숙청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스탈린이 1953년 사망하기 전까지 숙청으로 죽인 사람의 인원수는 천여만 명에 달할 정도였습니다.

소련공산당에서 반대파로 몰린 정치인들은 반당반혁명종파분자로 몰려 희생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산당 내에서는 ‘내가 너를 죽이지 않으면 네가 나를 죽일 것이다’라는 원칙을 내세웠기 때문에 살 가망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소련공산당과 북한을 강점한 소련군정에 의해 북한의 정치권력을 거머쥘 수 있었던 김일성은 스탈린이 하는 숙정정치를 그대로 답습하였습니다. 지난 시간들에서 김일성이 현준혁과 조만식, 무정 등 반대파세력들을 반당반혁명종파분자로 몰아 처형한 것은 그들을 살려두면 반드시 복수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김일성보다 나이도 많았고 지식수준도 높았던 김두봉 선생이 해방직후에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김일성종합대학 초대총장 등 김일성보다 더 높은 직책에서 활동하였던 것은 그의 반일애국활동 업적은 물론 저명한 조선어학자로서의 명성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는 남북분단을 막으려는 김구를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진행된 남북의 첫 회담이었습니다. 당시 남북연석회의는 ‘남북조선 제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와 ‘남북조선 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 ‘4 김씨회담’이라고 부르는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의 회담 등 3차례의 회담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북한을 대표하여 김일성과 김두봉, 남한을 대표하여 김구와 김규식이 참가하여 진행한 4김씨회담을 봐도 당시 북한에서 김두봉의 영향력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정권은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를 ‘남북조선 제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대해 언급할 뿐 김두봉이 이름이 상기되어야 하는 ‘4김씨회담’에 대해서는 감추고 있습니다.

당시 이 연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김구가 북한의 최고 권력자였던 북조선로동당 위원장 김두봉에게 편지를 쓴 것만 봐도 김두봉의 영향력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자가 포함된 그의 편지내용을 의역하면 ‘김두봉 선생께서 오랫동안 품어온 뜻과 조선반도의 분단책임을 해결코자 현안 해결의 연대 책임을 다할 성의와 열정으로 남북 지도자회담을 빠른 시일 안에 성취시키기를 간청한다’는 내용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김일성에 의해 6.25남침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49년에 평양에서는 남한을 침공하여 통일하려는 적화통일을 목적으로 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이 형성되었습니다. 1949년 6월에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에는 남북한 노동당을 비롯한 71개 정당·사회단체 소속 704명이 참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 북한을 대표하여 김두봉, 김일성, 허가이였고 남한을 대표하여 박헌영, 허헌, 김삼룡이었습니다.

그때로부터 1년이 지난 1950년 6월 25일 스탈린과 모택동을 찾아가 전쟁승인을 받은 김일성이 6.25남침전쟁을 일으키자 김두봉의 입지는 더 커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것은 중공군의 참전이었는데 중국공산당은 북한에 79개 보병사단과 12개 공군사단, 16개 포병사단, 10개 공병사단, 10개 전차연대 등 모두 합치면 200만~300만 명에 이르는 군병력을 동원하였습니다. 정전협정이 체결되던 1953년 4월부터 7월까지는 일시에 130만 명의 병력이 투입됐다고 하니 6.25전쟁이 남북한 전쟁이 아니라 중국과 유엔군사이의 전쟁이라고 말하는 북한전문가들의 이야기도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중국 연안파 출신인 김두봉의 북한 내에서의 권위는 상승하였고 전쟁 전 기간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자격으로 매년 신년사를 발표할 정도였습니다. 북한주민들은 신년사라고 하면 김일성이나 김정은이만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그 당시에는 김두봉이 신년사를 했다는 사실로도 그의 위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후에 김일성은 북한정권 내에서 중국 연안파출신들이 세력이 커지자 그들을 배제하려 하였고 연안파의 지도자격인 김두봉은 이에 반발하였습나다. 그는 김일성이 당내에서 독재체제를 구출하려고 한다고 계속 비판하였고 여기에 일부 소련파들도 합세하였습니다. 김두봉이 숙청된 계기점을 '8월 종파사건'으로 보는 일부 전문가들의 견해도 있습니다. 1956년에 벌어진 ‘8월 종파사건’은 6.25남침전쟁이 정전으로 휴전된 상황에서 북한정권 내 권력재편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하자 소련공산당 서기장으로 선출된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에 대한 개인숭배사상을 강하게 비판하였습니다. 소련에서 벌어진 개인숭배 배척투쟁은 북한 내에도 큰 영향을 미치었으며 김일성의 개인독재를 반대하는 움직임이 눈에 띄게 활발히 벌려지게 되었습니다. 1956년 6월, 김일성이 북한 정부대표단을 이끌고 5개년 경제개발계획 수행을 위한 원조요청을 위해 하기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을 방문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연안파와 소련파의 고위간부들은 김일성을 권력에서 밀어내기 위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소련파와 연안파로 구축된 반김일성 세력은 김일성이 50일간 유럽해외순방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결집하였고 그가 귀국한 직후 열린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의 독재와 개인숭배에 대해 맹비난을 퍼부었습니다.

6월부터 유럽을 방문하고 돌아온 김일성이 8월 30일에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개최하였는데 여기에서 연안파 최창익, 윤공흠 등이 김일성의 개인독재를 비판하였으나 박금철을 비롯한 국내파들과 빨치산파들이 김일성을 옹호하면서 팽팽한 분위기가 고조되었습니다. 연안파와 합세하기로 하였던 소련파들은 불리해지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침묵을 지켰고 결국 연안파 성원들은 반당, 반혁명 종파분자로 숙청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출당 당한 윤공흠과 서휘, 리필규 등은 문화선전부 부상이었던 김강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김일성의 개인독재가 판을 치는 8월전원회의 결정에 실망한 소련정부는 부수상 미꼬얀을, 중국정부는 국방부장 팽덕회를 급히 평양에 보내 김일성에게 결정을 취소하라고 압력을 가했습니다. 그 자리에서는 동의하였던 김일성은 그들이 북한을 떠나자 다시 반대파숙청에 더 열을 올렸습니다. 소위 ‘8월 종파사건’이라고 불렸던 이러한 숙청작업은 1958년 3월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었던 김두봉은 이들이 이런 모의를 한 사실을 알지 못하였지만 연대적인 책임을 지고 숙청되게 됩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70세의 고령이었습니다. 그는 고령의 나이라는 이유로 사형은 모면하였으나 평안남도의 산골 오지 한 농장으로 추방되어 감시를 받으며 어렵게 살다가 1961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김두봉을 가장 큰 정적으로 여기고 언젠가 숙청하려고 했던 김일성이 그때로부터 자기의 충견이나 마찬가지인 최용건을 김두봉 대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 앉히고 수상이라는 직책을 사용하면서 개인 독재를 더 강화해 나갔던 것입니다.

북한의 3대 세습이 정적숙청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김두봉과 같은 반대파 숙청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으며 김일성에 이어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져 오는 북한의 숙청정치는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북한정권이 주민들에게도 공개하지 못하는 숙청 정치의 진실을 이야기 해드리는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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