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동포여러분! 1963년에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1964년부터 중앙당에서 일하면서 권력세습의 야심을 품었던 김정일은 당시 북한의 2인자인 박금철 부수상을 숙청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고 결국 1967년에 갑산파는 북한정치권력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북한에서 ‘항일혁명 1세대’라고 부르는 김일성의 최측근이었던 최현, 김일, 백학림, 오진우, 전문섭 등을 사촉하여 박금철 부수상을 비롯한 갑산파들을 반당반혁명종파분자로 몰아 숙청한 김정일의 모략과 이 숙청사건을 둘러싼 중국과 구소련당국의 움직임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1960 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북한에서는 그 누구도 김일성의 후계자로 김정일이 된다고 생각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혁명선배국가였던 소련이나 동유럽국가들, 그리고 중국을 보았을 때 그 어느 나라에서나 공산당 총비서나 국가수반이 자기의 권력을 자식에게 물려준 사례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욱이 공산주의 사회라고 하면 인류의 마지막 사회라고 생각하면서 권력후계세습을 왕이 지배하던 낡은 봉건사회의 유물이라며 비판해왔기에 후계자가 한 가정에서 대를 잇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정일은 벌써 20대 중반의 나이에 중앙당 조직부 지도원으로 일을 시작하면서 후계자의 꿈을 꾸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빨치산 1세들에게 박금철을 비롯한 갑산파의 ‘반혁명종파행위’에 대해 알리고 김일성에게 그 위험성을 강조하면서 결국 1967년 5월 4일부터 8일까지 5일동안 비공개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제15차전원회의가 열리게 됩니다.
전원회의 안건과 토의내용은 녹음테이프로 3급기업소 당비서 이상 간부들에게만 공개되었습니다. 공개된 내용은 북한에서 처음으로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 문제가 중요한 의제로 등장하였고 이를 위해 갑산파들을 대거 숙청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북한의 혁명역사교과서들에서는 4기 15차 전원회의를 반당반혁명종파분자들을 제때에 숙청하여 전당을 수령의 혁명사상, 주체사상으로 일색화하는 데 있어서 획기적인 전환의 계기를 마련한 역사적인 회의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전원회의에서 부수상인 박금철을 비판한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박금철 동무는 당 조직비서로서 도당책임비서들을 비롯하여 군당 책임비서 등 당 중앙당에서 비준하는 인물을 등용·배치·해임·철직시키는 사업을 하면서, 당 책임비서 자리를 자기의 측근자로 배치해서 추종자를 꾸려놓고 봉건유교사상까지 주입시키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박금철 동무는 갑산 공작위원회에서 사업할 때 친분이 있던 원상정동무를 황해북도 도당 책임비서 자리에 등용해서는 그에게 목민심서라는 반동적인 책을 주면서 그걸 가지고 학습하라는 등 봉건적인 사상을 주입시켰습니다.
그리고 그가 일제강점기에 갑산위원회에서 반일투쟁을 하다가 체포되어 15년 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징역살이를 할 때 변절하여 결국 권영벽, 이제순 등 많은 혁명가들이 처형되었고, 권력을 이용해서 고향인 갑산에 큰 양옥집을 짓기도 하였고 자기의 아내를 혁명가의 아내로 만드는 연극을 만들도록 하였으며 자기의 딸을 경락연구소에 배치하여 김봉환박사의 연구를 도우면서 의학박사로 만들었다는 것이 전원회의에서 박금철에 대한 비판 내용들이었습니다.
1956년 8월 종파사건으로 쏘련파와 연안파가 제거되고 북한 노동당과 내각의 기본 실세들은 갑산공작위원회 출신의 국내파인 갑산파와 소련 88저격여단의 소련군 출신들인 김일성의 빨찌산파가 득세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66년 10월에 갑산파도 빨치산파도 아닌 김일성의 막내동생인 김영주가 중앙당 정치국 후보위원 겸 당조직비서로 임명되자 갑산파들은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습니다. 노동당 대남담당비서였던 갑산파의 리효순은 김영주에 대하여 ‘우리가 눈보라 속에서 언 감자를 먹고 있을 때 김영주는 어디서 무엇을 했는가’며 비난하였고 갑산파 내에서는 박금철을 차기 북한의 지도자로 내세우기 위한 행동에 착수하였던 것입니다. 중앙당 선전비서였던 갑산파의 김도만은 <일편단심>이라는 영화를 만들어 박금철의 존재를 널리 알렸습니다. 일편단심은 박금철이 일제에게 체포되어 감옥생활을 할 때 그의 부인이 절개를 지킨 내용을 주제로 한 박금철의 반일투쟁역사를 선전하기 위한 영화였습니다. 이러한 과정들은 김정일에게 있어서 정치권력 후계야욕의 큰 걸림돌이 될 소지가 강해 결국 무자비한 숙청의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인 2013년에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있는 윌슨센터가 1967년 당시 중국정부가 북한에서 자행된 갑산파 숙청에 대해 강한 불쾌감을 표출한 데 대해 공개하였습니다. 윌슨센터가 공개한 외교문서는 당시 북한주재 루마니아 대사관이 1967년 7월 28일 본국에 보낸 전문으로, 그 전날에 중국 대사관측과의 한 간담회 내용이었습니다.
간담회에서 중국측 고위 외교관은 박금철과 리효순, 김도만 등 '갑산파 3인'의 숙청 사실을 루마니아 대사관 관계자들에게 확인시켜주었고 부수상인 박금철이 김일성에 대해 불만을 가지게 된 동기에 대해서도 설명하였다고 합니다.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로 말하면 박금철을 비롯한 국내 반일애국투사들이 일제를 반대하여 목숨을 내걸고 싸울 때에 과거 반일운동에 참가했던 박금철로서는 김일성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출세한 김영주에 대한 불만과 북한의 국가건설 성과들이 모두 김일성에게 돌아가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갑산파의 주장이 당연하다면서 갑산파를 두둔하기도 하였습니다.
윌슨센터가 공개한 외교문서에는 북한주재 루마니아대사관에서 본국에 보낸 1967년 8월 3일자 외교전문에 박금철이 숙청되어 농촌에 추방되어 갔다는 내용도 담겨져 있었습니다. 윌슨센터의 제임스 퍼슨 연구원은 "박금철은 자신이 김일성의 후계자로 더 적격이라고 여기고 자체적인 우상화 작업을 했다"면서 "김일성으로서는 이를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고 여겼을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박금철을 중심으로 한 갑산파들이 북한주민들의 생활향상을 위한 경공업제품생산과 투자를 늘릴 것을 요구하면서 김일성이 내놓은 '국방건설과 경제건설 병진노선'에 반발한 것도 숙청의 이유로 되었을 것이라고 언급하였습니다.
그러나 박금철은 숙청되어 농촌에 가서 일반인으로 산 것이 아니라 정치범관리소에 감금되어 처형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박금철을 중심으로 북한의 정치, 경제의 모든 분야를 휩쓸었던 수십여 명의 갑산파들은 하루아침에 숙청되어 정치범으로 전락되어 처형되거나 외진 농촌에 추방되어 감시와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북한에서 1967년 반당반혁명종파사건으로 알려진 갑산파숙청사건은 김정일의 권력세습을 위한 정치적인 대숙청이었으며 이를 계기로 북한정권은 김씨 일가의 노예왕족 독재사회를 위한 체제구축에 광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갑산파 숙청으로 그 다음해인 1968년 4월 15일, 김일성의 생일이 북한의 국가명절로 지정되었습니다. 그 어느 나라에서도 그 나라의 지도자 생일을 명절로 지정한 나라는 북한이 유일합니다.
김정일은 그 이후에 권력세습을 위해 자기의 삼촌인 김영주를 숙청하였고 그 아들인 김정은은 고모부 장성택과 의붓형인 김정남을 살해했습니다. 보시는 것처럼 북한이라는 김씨 왕족 독재정권은 세상에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피로 얼룩진 숙청의 무덤 위에 세워진 반동적인 정권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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