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북인사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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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동포여러분, 지난시간들에 말씀드린 대성산혁명열사릉과 혜산혁명열사릉, 신미리애국열사릉은 김일성과 소련극동군 산하 88저격여단에서 소련군으로 복무했던 북한에서 말하는 소위 ‘항일투사’과 그 자녀들, 북한노동당과 정부의 요직에서 활동한 사람들의 묘소가 안치된 곳입니다.

이와는 달리 6.25남침전쟁시기 북한으로 넘어가 노동당 정책을 받들어 일하였던 남한출신들만 따로 안장한 묘소가 바로 재북인사묘입니다. 오늘부터 2회에 걸쳐 이 재북인사묘가 어떻게 생겨났으며 여기에 묻힌 사람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인지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재북인사묘에 대해 이야기 하려면 우선 재북인사에 대해 알아야 할 것입니다. 북한정권은 재북인사에 대해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민족적 량심을 지켜 리승만괴뢰도당을 따라가지 않고 공화국을 찾아온 사람들이다”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들이 자기가 원해서 월북한 사람보다 북한인민군의 납치에 의해 북한에 끌려간 사람들이 더 많다는 사실입니다. 김일성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에 전쟁을 일으키고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면서 당시 대한민국의 정계, 사회단체 대표자들, 과학자, 예술인들을 납치하기 위한 공작을 벌리도록 지시하였습니다. 당시 북한에서는 이 공작의 명칭을 일명 ‘모시기공작’이라고 불렀습니다.

북한정권은 이들에게 공산주의 이념교육과 김일성의 혁명역사교육 등 세뇌교육을 강요하였습니다. 전쟁기간에 북중국경지역인 자강도의 깊은 산골에 몰아놓고 무장인원들이 그들의 신변보호를 위해 존재한다고 하였지만 사실 그들은 오히려 감시병이었고 재북인들이 도주하면 언제든지 사살까지 할 수 있는 인민군 군인들이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자진 월북자와 강제 납북자들을 통틀어 재북인이라고 부릅니다.

재북인들 중에는 전쟁시기에 북한군에 피랍되어 가던 도중에 폭격으로 사망한 사람도 있고 해방 후 북한정권을 위해 활동하였던 고위간부들도 있으며 과학계와 문화계에서 근무한 인텔리들도 있습니다. 대한민국 초대 감찰위원장이었던 역사학자 정인보 선생과 해방 후 고려대학교 초대총장이었던 현상윤 선생은 1950년 9월 15일에 황해북도 서흥군에서 납치도중에 폭격으로 사망한 사람들입니다.

북한정권은 전후에 재북인들을 북한의 국가건설에 활용하기 위해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를 조직하고 이들을 이 조직에 망라하여 활동하도록 하였습니다. 1956년 7월에 결성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는 남북통일문제를 기본 활동과제로 삼았습니다. 이 협의회는 해방되어 1948년에 대한민국에 설립된 통일촉진협의회의 전통을 이은 단체라고 자기의 사명을 표방하였지만 북한 노동당의 통일정책을 대변하는 하수인조직에 불과하였습니다.

김일성은 1957년 10월에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의 최고위원들과 상무위원들을 만난 자리에서《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는 조국통일위업에 적극 이바지하여야 한다》는 제목의 담화문을 발표하면서 이 단체의 활동방향에 대하여 강조하기도 하였습니다.

납북자들 중에는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 대한적십자사 부총재를 역임하였던 백상규 선생이 1957년 12월에 병환으로 사망하면서 북한정권은 그의 장례식을 사회장으로 치르고 그의 유해를 평양시 룡성구역 룡추동에 안치하였습니다. 이것이 재북인사묘의 시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는 전시에 사망한 재북인들의 시신들을 이곳에 이장하려고 전국각지를 다녔습니다. 황해북도 서흥군에서 전쟁시기 폭격으로 사망한 정인보, 현상윤 선생의 묘소는 논으로 변한 지역에 묻혀 있어 농작물 가을이 다 끝나고 나서 형체도 없는 묘소를 겨우 찾아 유해를 발굴하여 이장하였습니다.

처음에 개장하였던 재북인사묘는 고압전선이 지나가는 지역에 위치해 있었는데 2000년대에 들어와 남북한 대화가 활발해지고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지난시기에는 봉분이 있는 묘지였고 비석마저 한자가 있는 구식묘비였던 것을 돌사진이 부착된 묘비로 교체하였습니다. 혜산혁명열사릉과 신미리애국열사릉의 묘비와 꼭 같은 형식의 묘비를 보아도 북한정권의 보여주기식 정치행보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남북한 사이에 화해분위기가 조성된 이후인 2003년에 김정일은 방북자들이 오면 볼 수 있게 새로운 재북인사 묘역을 조성할 데 대한 지시를 내렸고, 2004년에 룡성구역 룡궁1동에 지금의 재북인사의 묘가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재북인사들의 묘소는 형제산구역 신미리와 룡성구역 룡추동, 삼석구역 정동에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지금의 65명의 묘소는 이때에야 한곳에 유해들이 모여져 오늘날의 재북인사묘가 생겨난 것입니다.

북한정권은 재북인사묘가 생겨나게 된 원인을 수령님과 장군님의 은혜라고 대외에 선전하고 있습니다. 북한주민 대다수가 잘 모르는 재북인사묘는 남한이나 해외에 살고 있는 동포들에게 북한의 ‘광폭정치’를 보여주려는 숨겨진 계락이 있습니다. 북한정권은 북한의 일반주민들이 접속할 수 없는 북한 대외인터넷선전매체인 ‘우리민족끼리’에서 ‘평양시 룡성구역에는 공화국의 품에 안겨 참된 삶을 누리면서 조국통일을 위해 헌신하다가 사망한 재북인사들의 유해를 안치한 묘지가 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재북인사들은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민족적 량심을 지켜 리승만괴뢰도당을 따라가지 않고 공화국을 찾아온 사람들이다. 그들 가운데는 남북협상파인사들과 《국회소장파》, 《서울잔류파》정치인들도 있으며 지난날 나라와 민족 앞에 큰 죄를 지은 인물들도 있다. 각이한 인생행로를 따라 운명의 갈림길에서 방황하던 그들이 어떻게 민족의 대하라는 격류에 합쳐졌고 어떻게 나라의 자주통일을 위한 길에 나서게 되였으며 어떻게 되여 죽어서도 영생의 언덕에 한 식솔인양 나란히 자리 잡게 되였는가. 돌이켜보면 위대한 수령님께서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재북인사들에 대하여 그들이 생존해있을 때의 사업과 생활은 물론 사후처리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극진한 관심과 은정을 돌려주시였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한없이 넓고 따사로운 위대한 수령님의 사랑과 은정이 있었기에 백상규선생만이 아니라 안재홍, 김철성, 박승호, 조헌영, 김의한, 명제세 선생을 비롯한 수십 여명의 《통협》회원들이 생전에는 행복과 영광을, 사후에는 애국지사의 값 높은 칭호와 함께 풍치 좋은 곳에 정히 안장되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성산혁명열사릉과 혜산혁명열사릉, 신미리애국열사릉은 무장인원들이 24시간 근무를 서면서 노동당이 관리하는 묘소인데 비하면 재북인사묘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관리하는 급이 낮은 묘소일 뿐입니다. 산당지기격인 재북인사묘 관리는 묘역 입구의 오른쪽에 사택을 두고 살고 있는 홍의수, 박성희 내외가 맡고 있습니다.

북한을 방문하는 대한민국 국민이나 해외동포들의 북한 관광에서 필수코스인 이 재북인사묘는 북한정권의 세뇌선전을 위한 계략이 숨겨져 있습니다. 한국독립당 부위원장 조소앙의 비서였던 김흥곤 선생이 이 묘소가 생기자 초대 해설원이 되어 방북자들에게 이 묘소가 생겨나게 된 경위와 여기에 묻힌 사람들의 경력 등을 설명하였습니다. 그가 2006년 1월에 82세의 나이에 사망하고 그 다음에는 제1대 국회의원이었던 최태규 선생이 해설사로 활동하였지만 그도 2009년 10월에 89세의 일기로 사망하여 두 사람 모두 이 묘소에 묻혔습니다.

다음시간에는 재북인사묘에 어떤 사람들이 안치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