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북인사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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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동포여러분, 오늘도 지난시간에 이어 평양시 룡성구역 룡궁1동에 있는 재북인사묘에 대해 예기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김정일의 지시로 2004년에 새로 개장한 재북인사묘에는 6.25남침전쟁시기 인민군에 의해 납치되어 북한으로 끌려가거나 자원하여 월북한 남한출신 인물들 중에서 북한정권을 위해 헌신했던 65명 사람들의 묘소가 안치되어 있습니다. 북한정권은 이 재북인사들 중에서 가장 원로 지도급에 해당하는 8명은 평양시 형제산구역에 있는 신미리애국열사릉에 안치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8명의 인사들로는 김규식, 조소앙, 조완구, 류동열, 윤기섭, 오하영, 엄항섭, 최동오 입니다. 이들은 북한의 애국열사라고 치부되는 사람들과 한곳에 안치하여 북한주민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지만 재북인사묘에 안치된 인물들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해외동포들이나 남한에서 북한을 방북한, 방북자들로 한정되다 보니 북한의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재북인사묘역에는 대한민국의 초대 국회 부의장을 지낸 김동원, 초대2기 국회 부의장이었던 김약수 등 21명의 제헌의회 의원들 그리고 2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어 국회의사당에서 의원으로 사업한 지 1주일도 안되어 6.25남침전쟁으로 북한에 끌려갔던 18명의 현역 의원들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대한민국에서 국회의원을 지낸, 북한으로 말하는 대의원으로 활동하였던 사람만 해도 40여 명이나 납북 혹은 자진 월북하였다가 북한에서 사망하였던 것입니다.

대한민국 초대 국회 부의장이었던 김동원은 김일성과 같은 평안남도 출신입니다. 그는 1884년 2월 1일평안남도대동군에서 출생하였고평안남도 평양본가에서 성장하였습니다. 그의 부친인 김대윤은 당시 평양에서 대부호로 유명하였습니다. 김동원은 1903년에 평양외국어학교 일어학과를 졸업하고 이 학교 조교수로 있다가 1906년 9월에는 일본 명치대학 법과에 입학하였고 귀국하여 1910년부터 평양 숭실학교와 대성학교 일어 교사로 근무하기도 하였습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 17일평양에서조만식 선생과 함께조선건국준비위원회평안남도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던 중에 그해 9월에 북한에 소련군이 입성하자 월남하였습니다. 월남하여 1945년 10월 5일에미군정장관의 행정고문으로 임명되었고 1947년 9월한국민주당상임위원직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1948년 5월에 서울시 용산구 한국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제헌의회국회의원에 당선되고 국회부의장에 선출되었습니다. 그리고 1950년 6.25남침전쟁중에 북한인민군에 납치되었지만 1951년 3월 20일사망하였습니다.

대한민국 2기 국회 부의장이었던 김약수는 1890년 10월 21일에 부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서울의 경성공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유학을 하였고 1918년에는 중국 남경에서 금릉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하여 영어를 배웠습니다. 1919년에 일어난 3.1독립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1920년에 귀국하여 독립운동에 나섰습니다. 김약수 선생은 사회주의 이념에 심취되어 1924년에는 북풍회를 결성하여 당시 분열되어 있던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을 결집시키는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결국 1925년에 조선공산당 창당에 앞장서서 창당대회에서 사회를 보기도 하였고 조선공산당 인사부(조직간부부) 책임자로 활동하였습니다.

1945년 8월 해방 직후대한민국에서 건국준비위원회간부로 선출되었으나이 조직에 박헌영의 공산당 계열에 의해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개편되자 좌익 진영에서 전향하여 우익 진영인한국민주당의 발기인으로 참가해 조직부장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1948년 5월 총선거에 출마하여 제헌의원에 당선되어 5월 30일국회 개회시 초대 국회부의장으로 선출되었으나 미군철수 등을 요구하다가 좌익으로 몰려 유죄판결을 받고 수감되었다가 전쟁으로 탈옥하여 월북하였던 것입니다. 북한에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겸 집행위원에 선출되었으나 1959년에는 8월 종파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죄로 숙청되어 평안북도의 외진 산골에 추방되었다가 사망하였습니다.

재북인사묘에는 해방 후 초대 서울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던 이춘호 박사와 초대 고려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던 현상윤 박사, 초대 국학대학 정인보 학장, 초대 동국대학교 학장 허영호 등 많은 학자들도 이곳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서울대학교 제2대 총장을 역임하였던 이춘호 박사도 6.25남침전쟁시기에 북한군에 인민군에게 납치되어 북한으로 갔으나 전쟁시기에 병으로 사망하였고 고려대학교 초대총장이었던 현상윤 박사도 1950년 9월에 북한군에 납치되어 북한에 끌려가던 중에 피폭으로 사망하였습니다.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태어난 그는 평양 대성고등보통학교,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이 대학 대학원에서 철학석사 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해방 후에는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교장을 맡았다가 이 학교가 대학교로 승격되면서 고려대학교 초대 총장에 취임하였습니다. 고려대학교 총장으로 재임하고 있던 시기에 전쟁이 발발하면서 북한군에 끌려가다가 황해도에서 폭탄에 맞아 사망하였던 것입니다.

재북인사묘에는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정계, 실업계, 사회계, 학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명망이 높았던 사람들이 북한인민군에 의해 납치되어 북한으로 끌려갔다가 사망한 사람들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국회의원, 대학총장들과 함께 이곳에는 미군정 민정장관을 지낸 안재홍,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백상규, 국방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 등 대한민국의 군부, 사회단체에서 명망이 높았던 사람들도 안치되어 있습니다.

이들 중 대부분은 1956년 7월 결성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활동하였습니다. 대한민국 출신으로 전쟁시기 납북되어 북으로 끌려가 이동하던 중 폭격으로 사망하기도 하였고 전쟁시기 북중국경지역인 자강도의 산속에 꾸려진 곳에서 북한의 이데올로기에 세뇌되어 북한의 적화통일노선을 받들고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던 사람들을 예우하고 대외에 선전하기 위해 만든 묘역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재북인사의 묘에 안치된 사람들은 모두 선생이라는 호칭이 붙어 있고, 묘비에는 돌사진을 새겨 넣었습니다. 그리고 묘비에는 북한에서 조국통일상을 탄 기록과 함께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일할 때 받았던 직위도 새겨 넣었습니다.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일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렇게 공적을 밝힌데 반해 다른 사람들은 생일과 사망일만 적어놓았습니다.

북한정권이 이렇게 재북인사묘를 개장한 이유는 지금도 북한에 생존하고 있는 재북인사들의 자녀들에게 북한체제를 옹호하고 적화통일을 위해 헌신하도록 하기 위한 격려의 뜻도 숨겨져 있으며 남한이나 해외에 있는 그들의 형제자매들이나 친척들에게 그리고 북한체제를 동경하는 용공분자들을 자기의 편으로 만들기 위한 의도도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북한정권은 이곳을 찾는 해외동포들이나 남한의 방북자들에게 김정일의 배려로 이곳에 재북인사들이 안치되게 되었다며 "고려시대인 1128년 승려 묘청이 개성에 있던 왕궁을 옮기려 했던 명당자리"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지금은 6.25남침전쟁시기 납북되었거나 자진 월북하였던 사람들이 거의 다 사망하였거나 살아있는 사람들도 90대의 고령이다 보니 그의 자녀들이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70년대와 80년대 월북한 남한 사람들 중에서 일부도 이 협의회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오랫동안 북한정권의 사상교육에 세뇌되어 북한정권의 적화통일정책을 실천하는데 일선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노동당에 충성한다는 것으로 죽어서도 이 재북인사묘에 안치되어 북한에서 말하는 ‘영생’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바라는 한반도의 공산화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그들도 더 이상 현대판 김씨 노예왕국을 위해 헛된 삶을 살지 말기를 바라면서 재북인사묘에 대한 얘기를 마치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