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 3대혁명소조원들의 권한이 가장 극에 달했던 시기는 1970년대말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사이였습니다. 1970년대 중반은 북한에서 혁명원로라고 불리는 항일투사들이 고령화되면서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던 시기였습니다. 혁명 1세대에서 2세대로의 이행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세대교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수령의 후계 문제였습니다.
동구라파사회주의 나라들은 물론 중국, 쿠바를 비롯한 모든 공산국가들에서 볼 수 없었던 왕족사회같은 후계 세습이 북한에서 김정일에 의해 서서히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주체라는 어휘에 가리워진 북한식 권력세습이 진행되기 시작하였지만 그렇다고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습니다.
사상혁명, 기술혁명, 문화혁명 이 3가지 혁명으로 김정일 후계 세습을 위한 정치적인 총공세가 중앙당 조직지도부와 선전선동부의 연합작전에 의해 거행되기 시작하였고 김정일에 의해 1974년 당의 유일사상체계확립의 10대 원칙이 발표되고 3대혁명소조운동은 철두철미 김정일의 후계자 세습을 위한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당시 중앙기관은 물론 지방 당기관과 행정기관의 간부들은 일제시기 반일운동을 한 항일투사들, 전쟁노병들이 많았고 오랜 간부 생활에 몸에 배인 관료주의와 형식주의, 기관본위주의 등 낡은 사업 방법에 빠져 국가를 위한 창발적인 사업보다는 자리지킴이나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리고 법을 우선적으로 준수해야 할 당, 국가, 경제기관 관료들이 법질서를 어기는 사업풍토가 만연되고 있었습니다. 김정일이 3대혁명소조운동을 발기하고 직접 지휘하면서 3대혁명소조는 당과 행정의 상부조직처럼 막강한 힘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3대혁명소조운동은 발기초시기에는 현직 당일꾼들과 행정일꾼으로 극한되었지만 점차 공산대학 졸업생, 일반대학졸업생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당중앙의 친위대, 돌격대’, ‘현대판 암행어사’라는 칭호에 걸맞게 현장에 파견된 3대혁명소조원들은 담당한 기관기업소와 단위의 책임간부들에 대한 통제와 감시를 강화했습니다. 당정책관철과 당의 유일사상체계확립의 10대원칙 관철이라는 칼자루를 쥐고 현장에서 맹활약하는 3대혁명소조원들에 의해 많은 간부들이 책벌을 받고 해임철직되었습니다.
당시 지방당과 중앙당에 존재하던 신소과는 문제를 상급기관에 보고하지 않고 오히려 신소자들이 '복수‘로 피해당하기 일쑤였으나 3대학명소조 사업부의 직보선은 그대로 김정일에게 보고되어 엄한 책벌이 뒤따르자 전사회적으로 3대혁명소조에 대한 두려움이 커져갔습니다. 한 지방당 간부가 3대혁명소조에 반감을 가지고 친척인 중앙당간부를 내세워 맞서보려 했으나 오히려 3대혁명소조를 거슬리는 행위는 김정일에 대항하는 것과 같다는 결론이 나면서 3대혁명소조의 권위는 더욱 승승장구하였습니다.
김정일의 정치적인 신임으로 3대혁명소조사업부는 당시까지 존재하던 북한사회의 위계질서를 새로 바꾸어 놓았고 행정간부들은 물론 당간부들도 현지에 파견된 3대혁명소조원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3대혁명소조원들 중에서 기존의 당일꾼들과 공산대학졸업생들은 당원이어서 해당 단위의 당생활총화에도 마음대로 들어갔으나 갓 대학을 졸업한 젊은 대학생들은 당원들에 대한 통제를 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3대혁명소조사업부에서 비당원 소조원들도 당원들에 대한 장악통제를 할 데 대한 지시가 내려오면서 일부 대학생소조원들이 담당기관의 당생활에 간섭하면서 이 문제가 중앙당 3대혁명소조사업부를 통해 김정일에게 보고되었습니다.
자기의 오른팔이라며 3대혁명소조원들의 편에서 김정일은 소조사업부의 손을 들어주었고 비당원 3대혁명소조원들을 대대적으로 입당을 시킬데 대한 지시를 내렸고 화선입당을 통해 현지에서 입당하는 사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김정일의 지시로 3대혁명소조원들에게는 김일성의 배지(초상휘장)도 별도로 제작되었습니다. 붉은 깃발에 김일성의 초상이 중심에 있고 깃발 하단에 ‘3대혁명소조’라는 글을 새겨 넣었던 것입니다. 현장에서는 3대혁명소조 휘장을 단 소조원들이 지나가면 일반 노동자들은 물론 간부들도 인사를 했고 우쭐해진 소조원들은 더운 허세를 부리는 일들이 사회적으로 만연해졌습니다.
1974년에 공식적으로 3대혁명소조운동이 활성화된 시기로부터 13년이 지난 시점인 1987년에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3대혁명소조원으로 파견되었습니다.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1987년 5월에 3대혁명소조원으로 배치되는 저의 심정은 하늘을 찌를 듯 하였습니다. 10년 군복무를 해도 노동당에 입당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3년동안의 소조생활을 통해 입당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제가 배치 받은 곳은 강원도 3대혁명소조사업부였습니다. 당시에도 사회적으로 3대혁명소조의 권위는 막강하였고 소조기간에 입당하는 사람들이 많아 마치 소조로 파견만 되면 입당을 다 하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1980년대에는 현직 당일군들이나 행정일군들은 3대혁명소조 파견에서 제외되고 공산대학 졸업생들과 일반대학 졸업생들을 위주로 파견되었습니다. 1970년대보다 1980년대에는 3대혁명소조원들의 평균 나이가 젊어졌습니다. 그러나 3대혁명소조원들의 권한은 여전하였기에 입당을 하기 위하여 3대혁명소조 파견을 기대하는 대학생들이 많았습니다.
3대혁명소조 파견은 중앙당 소조사업부에서 정한 비율에 따라 각도에 배치되었고 다음 해당 도당 소조사업부에서 자기 도내에 있는 연합기업소와 각 시, 군 기관기업소들에 파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대학에서는 중앙당에서 하달한 당중앙위원회 비서국 공인이 찍힌 3대혁명소조원 파견장을 가지고 해당 도당위원회 3대혁명소조사업부에 접수하면 며칠 동안 기다려 자기가 파견될 기관기업소를 할당받게 됩니다.
대학당위원회에서 받은 파견장을 강원도 도당 3대혁명소조사업부에 1987년 5월 29일에 제출하였고 거의 3주일 동안 여관에 머물면서 파견지가 결정되기를 기다렸습니다. 원산 개선여관에는 전국 대학들에서 모여온 대학생 3대혁명소조원들로 붐비었습니다. 도당 소조사업부에서는 대학생들을 통제할 수 있도록 여관방들도 정해주었고 매일 도당에 와서 대기하도록 하였습니다. 당시 강원도에 친인척이 없어 저는 대학 한 학급 동창 전모 씨에게 부탁하여 그의 아버님의 도움으로 3년동안 생활하기 좋은 곳으로 배치를 받으려고 편지를 한 장 가지고 내려왔습니다.
도당 행정부 간부였던 친구의 아버님은 자기 아들의 부탁 편지를 받고 나를 극진하게 대해주었고 우리가 모르는 비공개내용도 알려주었습니다. 그 내용은 김정일이 3대혁명소조원들이 몇 년 사이에 거의 2만여 명이 입당하였기에 질적 강화를 위해 입당을 제한하도록 내부 지시를 하달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입당을 하려면 원산시나 문천시, 통천군 같은 큰 도시나 지역보다 법동군, 김화군, 창도군 같은 교통이 어려운 곳에 배치 받아야 입당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진다고 하였습니다.
도당 간부인 친구 아버님의 권유로 강원도 김화군으로 갈 것을 결정하였고 결국 6월 22일에 도당 3대혁명소조사업부에서 강원도 김화군 수태협동농장 3대혁명소조원이라는 임명장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저의 3년간의 입당을 위한 3대혁명소조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다음시간에는 3대혁명소조원들의 조선노동당 입당 문제에 대하여 제 입당하던 일을 설명하면서 이야기하고로 하고 오늘은 여기에서 마칩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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