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혁명소조원 입당문제

 2013년 '전국 3대혁명소조 열성자회의'가 27일 평양에서 열렸다고 조선중앙TV가 보도했다. 전국 규모의 3대혁명소조 회의가 열린 것은 1984년 9월 이후 처음이다.
2013년 '전국 3대혁명소조 열성자회의'가 27일 평양에서 열렸다고 조선중앙TV가 보도했다. 전국 규모의 3대혁명소조 회의가 열린 것은 1984년 9월 이후 처음이다. (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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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혁명소조운동이 발기되어 전국 각지로 대학생 소조원들이 파견된 지 10년이 넘던 1984년까지 기간에 이 운동에 참가한 인원이 10만 8천여명을 넘었고 그 가운데서 1만 1600여 명이 노동당에 입당하였습니다. 그리고 1명의 공화국영웅과 23명의 노력영웅이 배출되었으며 국기훈장 제1급을 수여받은 인원만 해도 1,124명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1984년 9월 23일자 노동신문에 알려지면서 전국의 대학들에서는 졸업을 앞둔 대학생들은 3대혁명소조원으로 파견되기를 희망하였습니다. 특히 군복무를 하지 않은 직통생들에게는 노동당에 입당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1987년에도 저의 학급인원이 24명이었는데 6명의 제대군인을 제외하면 18명이 직통생이었습니다. 그 중에 5명이 대학 박사원에 입학하고 나머지 13명이 3대혁명소조원이 되었습니다. 북한에서는 군복무를 하지 않고 대학에 입학한 대학생들을 직통생, 군복무를 하고 대학에 온 학생들은 제대군인대학생이라고 부릅니다.

대학 졸업년도인 1987년 2월 어느 날 담임교원이 불러서 교수의 사무실로 갔습니다. 대학졸업을 앞둔 대학생들에 대한 ‘개별담화’였습니다. 대한민국과 달리 북한에서는 대학을 졸업하는 대학생들은 본인이 취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서 배치해 주는 기관에 파견되는 방식이어서 졸업 전에는 대학졸업생들의 의사를 이런 개별담화를 통해 요해하게 됩니다.

담임교원이었던 이익재교수는 대학 전과목이 최우등이었던 저에게 박사원에 가는 것이 어떠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박사원은 한국의 대학원과 같습니다. 박사원기간에 석사를 거쳐 박사과정을 거쳐 대학교수나 연구사가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성적을 A, B, F 등 영어로 표기하지만 북한에서는 최우등, 우등, 보통, 낙제로 분류합니다. 자기의 실력을 믿고 김일성종합대학 박사원을 졸업하고 김대 교수로 되는 것도 좋은 선택이었지만 저는 3대혁명소조원으로 파견되는 것이 희망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당시 대학을 졸업한 직통생들이 노동당에 입당하기 위해 3대혁명소조원으로 파견되기를 희망한다는 것을 잘 아는 교수는 저의 희망에 수긍하면서 개별담화 보고서에 그렇게 저의 의사를 기록하였습니다. 이런 개별담화 보고서들은 학부당위원회에 보고되고 이것이 대학을 거쳐 내각 사무국 김일성종합대학 대학생배치과에 집합되면 내부 토의를 거쳐 결정됩니다.

소조파견이 결정되던 날, 남들은 군복무 10년을 하면서 힘들게 하는 노동당 입당을 약 3년의 3대혁명소조기간에 할 수 있다는 기쁨이 저의 마음을 설레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지에 내려오니 그런 분위기는 순간에 사라져버렸습니다. 저의 대학동창의 아버님이 제가 파견된 강원도당의 간부였는데 그가 하는 말이 ‘지난 기간에 2만여 명이 넘는 3대혁명소조원들이 노동당에 입당하면서 당중앙에서는 당의 질적강화를 내세우면서 입당을 제한하도록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제가 소조원으로 파견된 그 시점 이전까지만 해도 직통생 3대혁명소조원들의 절반이상이 노동당에 입당하였지만 내부지시로 10%이하로 제한하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대학에서 중앙당 비서국 공인도장이 찍힌 3대혁명소조원 파견장을 받을 당시까지만 해도 강원도에 파견되면 원산시의 ‘먹을 알’이 있는 기업소에 배치받아 입당하는 것을 꿈꾸었던 저는 새롭게 계획을 다시 짜야 했습니다. 강원도당에서 근무하는 친구의 아버님은 원산시에서 입당하자면 경쟁이 심할테니 오히려 농촌지역에 나가면 더 입당하기에 유리할 것이라고 하였고 결국 강원도에서도 교통환경이 나쁘고 휴전선이 가까운 김화군에 나가기로 결심하고 친구의 아버님을 도움으로 김화군에 배치받게 되었습니다.

강원도당 3대혁명소조사업부에서 김화군 수태협동농장 3대혁명소조원이라는 파견장을 받고 원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약 80km떨어진 평강역까지, 그리고 평강역에 마중나온 협동농장 방송차를 타고 약 100리가 넘는 파견지인 수태리에 도착한 것은 1987년 6월말 경이었습니다.

수태협동농장에는 함흥공산대학 졸업생인 40살이 넘는 제대군인 대학생이 책임자로 파견되어 있었고 저를 포함하여 나머지 5명은 입당을 해야 할 직통생, 3대혁명소조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에는 3년의 소조생활을 마치고 대학에 복귀하는 3명 중에 한명만 입당을 하였을 뿐 나머지 2명은 입당을 못하고 소조를 마친다는 사실은 저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농촌에 파견되어도 입당하려면 경쟁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987년에 강원도 김화군에 파견된 3대혁명소조원 중에 제대군인 대학생을 제외하고 입당을 해야 하는 직통생 출신 소조원이 26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입당폰트는 3명이 안 될거라는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시간이 갈수록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행인 것은 강원도 김화군에 파견된 소조원들 중에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소조원이 저와 군 지방공업소조로 파견된 김훈씨, 두명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소조원들 속에는 아무래도 김대를 졸업한 우리가 입당폰트를 다 가져갈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저는 더 경계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3대혁명소조기간에 입당을 하지 못하면 대학 박사원생으로 떨어진 것보다 못하다는 압박감으로 입당을 하기 위한 힘겨운 저의 소조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담당한 단위는 전쟁으로 하나의 마을이 남북으로 갈라진 근동마을의 제4작업반과 정자동독립분조, 그리고 축산작업반이었습니다. 이공계를 전공한 저로서는 기술혁신을 많이 하는 것으로 남보다 더 두각을 나타내 입당을 하려는 야심이 생겼고 평양 인민대학습당에 출장을 올라와서 기술혁신에 필요한 자료들을 조사하여 현장에 도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돼지의 고막을 인공적으로 파괴하여 소리를 못듣게 하여 돼지의 증체율을 높이는 러시아의 기술을 도입한 ‘압축공기식 돼지고막천공기’, ‘짚신나물엑스를 이용한 새끼돼지 설사약’, ‘돼지회충구제용 쑥달임약, 등 여러 건의 기술도입을 하였습니다.

1989년에 김정일이, 소조원들이 로봇을 만들어 전시회를 열도록 하라는 지시가 떨어지자 로봇을 만드는 일에 자진하여 나섰고 김화군 원남협동농장에 파견되었던 고향친구와 함께 김화군화학공장에서 사용할 자유도가 4인 비누성형 및 운반로봇을 제작하여 1990년 2월에 평양체육관에서 진행한 ‘전국 3대혁명소조 로보트전시회’에 출품하면서 그해 4월에 만 26살의 나이에 노동당에 입당할 수 있었습니다.

생물학을 전공한 제가 동평양기계공장 주상량 기사장의 도움으로 대학습당에서 러시아설계도면을 캐치하여 노동자들에게 술과 고급담배를 제공하면서 6개월만에 완성한 로봇에 든 술만 해도 600병이 넘었습니다. 당시 노동자들은 퇴근시간에 현장에 남아 로봇 제작을 하였고 매일 일을 마치면 술을 마시고 퇴근하였는데 후에 로봇이 완성되자 주상량기사장은 ‘술로봇’이라는 별명을 달아주었습니다.

입당경쟁자들을 다 물리치고 김화군에서 그해 2명이 입당하면서 결국 13대 1로 후보당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후보당원 1년동안을 거치면 정당원으로 됩니다. 입당을 위해 3년동안 경쟁적으로 일했던 저의 3대혁명소조생활을 생각하면 지금은 서글픈 생각이 듭니다. 세상에서 가장 낙후한 사회제도인 현대판노예왕족을 위한 일당독재국가인 북한의 노동당 당원이 되겠다고 뛰어다닌 저의 청춘시절이 너무도 허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입당폰트가 적어지면서 소조파견을 희망하는 대학졸업생들이 점차 적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