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혁명소조운동과 문화혁명

김정일 위원장의 생일인 '광명성절'(2월16일)을 앞두고 성·중앙기관 예술소조 종합공연이 열렸다고 조선중앙TV가 보도했다.
김정일 위원장의 생일인 '광명성절'(2월16일)을 앞두고 성·중앙기관 예술소조 종합공연이 열렸다고 조선중앙TV가 보도했다. (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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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동포여러분! 지금은 이 방송을 듣고 계시는 북녘동포여러분들 중에 ‘공산주의 이상촌’이라는 말을 믿는 사람은 없으리라 봅니다. 김정일이 후계자로 등극하여 자기의 정치지반을 확대하고 세습의 정당성을 강조하던 198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당국은 인민정권에 3대혁명을 더하면 공산주의라며 사상혁명과 기술혁명, 문화혁명에 대해 강조하였습니다. 사상개조, 사상투쟁을 동반하는 사상혁명을 통해 당의 유일적 지도체제를 확립하고 사회주의 경제건설노선관철을 위한 기술혁명에서 3대혁명소조원들이 선봉대, 돌격대로 활약하도록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상혁명, 기술혁명과 함께 생산문화, 생활문화를 확립을 위한 문화혁명관철을 위한 3대혁명소조원들이 역할이 강조되었습니다.

3대혁명소조운동이 시작되던 1970년대에는 소조원들이 3급기업소에서 연합기업소 등 큰 규모의 단위들에 파견되었으나 점차 지방산업공장들과 협동농장들에도 파견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각도 중앙병원들과 시군인민병원들에도 3대혁명소조원들이 파견되면서 그 파견범위가 확장되었습니다. 평양의학대학과 지방의 각도 의학대학을 졸업한 대학생들이 병원 3대혁명소조원으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리고 협동농장들에도 의학대학을 졸업한 대학생들이 3대혁명소조로 파견되었는데 현장에서는 그들을 ‘문화소조’라고 불렀습니다.

병원에 파견된 3대혁명소조원들은 환자들에 대한 진료는 할 수 없지만 병원에 부족한 의료설비제작이나 기초수액인 링게르주사약과 포도당주사약, 약초를 원료로 한 회충약 제조 등 기술혁신에 관여했습니다. 협동농장에 파견된 문화소조들은 생산문화, 생활문화확립을 강조하면서 작업현장들과 선전실, 그리고 농촌부락을 깨끗하게 관리하도록 하는 일에 적극 개입하였습니다. 야외에 설치된 위생실(화장실)들이 어지러운 문제에 대해 농장관리위원회에 지적하여 시정하도록 하였고 의학상식을 작업반모임시간에서 보급하기도 하였습니다.

문화혁명은 의학대학을 졸업한 소조원들만 해야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의학대학을 졸업한 대학생소조는 병원이나 협동농장들에 집중적으로 파견되었지만 공장기업소들에는 이들이 거의 파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공장기업소들에서는 의학대학 졸업생이 아닌 소조원들이 문화혁명을 주관해야 했습니다. 최근 김정은에 의해 재조명되기 시작한 3대혁명소조원들의 활약상이 부각되면서 문화혁명수행을 위한 소조원들의 활동도 북한의 언론매체들에 실리고 있습니다. 지난 2018년 11월 14일 노동신문에도 ‘생산문화, 생활문화 확립에 깊은 관심을 돌리시여’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는데 그 내용을 보면 김정일에 의해 1980년대에 진행되었던 문화혁명수행과정에 대해 엿볼 수 있습니다. ‘고귀한 지침’이라는 소제목으로 소개된 기사내용에는 김일성이 중앙당 3대혁명소조사업부 간부들에게 공업부문에 파견된 3대혁명소조의 사업방향을 가르쳐주면서 문화혁명수행에도 커다란 힘을 돌릴 데 대하여 강조한 내용이 실렸습니다. 기사내용에는 김일성이 ‘공장, 기업소들의 문화혁명에서 중요한 것은 생산문화와 생활문화를 세우는 것이라며 생산문화를 세운다는 것은 공장의 모든 설비를 알뜰하게 거두고 공장을 공원과 같이 잘 꾸린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 내용이 소개되었습니다. 그리고 생산문화를 잘 세워야 질 좋고 알뜰한 제품이 많이 나오며 노동자들이 흥겹게 일할 수 있다며 생산문화를 세우는 사업과 함께 생활문화를 확립하는 사업도 중요하게 내밀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하였습니다. 생활문화 확립을 위하여 노동자들의 합숙과 살림집을 문화적으로 꾸리는 사업도 중요하다는 것이 북한당국의 주장이었습니다.

김일성은 중앙당 3대혁명소조사업부 간부들에게 공장, 기업소들에서 생산문화와 생활문화를 세우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리도록 하는데서 3대혁명소조원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부문별로 본보기공장을 하나씩 꾸리고 다른 공장들이 그 공장을 따라 배우도록 하도록 하였습니다.

문화혁명수행에 대한 관심은 김일성에 이어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북한당국의 주장입니다. 이날 노동신문에는 ‘값 높은 평가’라는 제목으로 김정일이 평양방직기계공장을 현지지도하면서 문화혁명수행을 강조한 내용도 실렸습니다. 이 공장은 김정일이 김일성종합대학을 다닐 때 실습교육을 받았던 공장입니다. 현지지도를 하면서 김정일은 대학실습교육기간에 대해 추억하면서 공장의 여러 곳을 돌아보았습니다. 김정일이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부 1학년에 재학 중이던 1961년 4월에 이 공장에서 실습교육을 하면서 선반을 잘 관리하였다면서 북한에서 벌리고 있는 ‘26호선반을 따라배우는 운동’은 북한주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1980년대에 김정일은 생산문화를 확립하는데 있어서 자기의 이러한 모범 사례들을 일반화하도록 하면서 3대혁명소조원들이 이 사업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었습니다.

6.25남침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0월에 세워진 이 평양방직기계공장은 북한의 방직기계 모체공장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김정일은 이 공장을 현지지도하면서 공장 구내의 나무숲과 포장도로, 휴식터 등 공장안팎이 아주 깨끗하게 잘 꾸려져 있다며 공장구내에 갖가지 나무들이 울창하니 마치 수림 속에 들어온 것 같은 감이 난다면서 생산문화, 생활문화 확립에서 거둔 성과를 높이 평가해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공구작업반에 이어 정밀가공작업반을 돌아보면서는 먼지 한 점 없이 깨끗한 작업장에서 손에 기름을 묻히지 않고 작업하는 기대공들의 모습을 보니 얼마나 좋은 가고, 평양방직기계공장은 생산문화, 생활문화수준이 매우 높은 문화혁명본보기 공장이라고 평가해주었습니다.

당시 이런 김정일의 평가로 하여 이 공장에 파견되어 있던 3대혁명소조원들은 노동당에 입당하는 특혜도 차례졌습니다. 1980년대 3대혁명소조원들 속에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문화혁명에 대한 관심과 활동이 고조되기도 하였습니다.

3대에 걸쳐 세습을 하고 있는 북한에서 김일성에 이어 김정일, 김정일에 이어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흉내내기식 사업방법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김정일이 다녀간 공장은 지금은 김정은의 발길이 이어집니다. 이런 본보기 공장들은 ‘현지교시 단위’라는 이름이 붙게 되고 우선적으로 생산문화, 생활문화 확립에 필요한 뼁끼(페인트), 회가루(석회가루), 세멘트(시멘트) 등이 보장됩니다. 그리고 화강석으로 된 대형 현지교시사적비가 세워집니다.

이런 공장들 중에 지난(2018년) 8월에 김정은이 현지지도를 한 평양무궤도전차공장이 노동신문에 소개되어 눈길을 끌었습니다. ‘전국의 본보기공장’이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실린 이 공장은 1959년 4월에 김일성이 현지시찰을 하였던 공장입니다. 당시 공장이름은 평양자동차수리공장이었고 남산고급중학교(고등학교)를 다니던 김정일도 김일성을 따라 이 공장을 방문하여 북한에서 잘 알려진 공장입니다. 그 이후에도 김정일의 여러 차례의 현지지도를 한 평양무궤도전차공장은 3대혁명소조원들이 가장 선호하는 파견단위입니다.

현지교시단위에 3대혁명소조원들이 파견되기를 선호하는 이유는 언제 김정은이 현지지도를 하면 1호 접견자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되고 이것이 장차 자기의 승급(승진)을 위한 발판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월에 이어 8월에 이 공장을 다시 찾은 김정은은 새로 만든 신형의 무궤도전차를 보면서 손색없이 잘 만들었다며 ‘이 공장은 생산문화, 생활문화가 높은 수준에 이른 전국의 본보기공장’이라고 평가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3대혁명이 공산주의의 지름길이라는 북한당국의 황당한 주장은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된 북한을 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3대혁명소조가 사상기술문화의 선봉대가 아니라 김씨 일가의 영원한 왕족세습정치를 위한 돌격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