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동포 여러분! 북한당국은 주체사상 이외의 다른 사상이나 종교이념들에 대해서는 불온사상, 퇴폐이념, 반동철학 등으로 매도하면서 관련도서들은 모두 회수하고 유포를 철저히 막아왔습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최근에는 천주교 등 여러 종교들에 대해 표면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 듯이 대외적인 선전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북한정권이 천주교인들의 자유로운 종교활동상징으로 내세우고 있는 장충성당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북한당국은 1988년 6월 30일에 ‘조선천주교인협회’가 결성하면서 같은 해 10월에 평양시 선교구역 장충1동에 장충성당을 세웠습니다. 평양시 중구역 외성동에서 대동교로 대동강을 건너가면 선교구역 선교2동이 있고 이곳에서 새살림거리를 통과해서 서쪽으로 약 1.5km 정도의 도로 우측에 장충성당이 보입니다. 장충성당이 전쟁 전에 북한당국이 폐쇄하였던 대신리성당 자리에 북한천주교인들의 헌금으로 건립되었다는 것이 북한당국의 주장입니다.
1934년 2월에 평양시 동쪽의 평야(平野)에 세워진 대신리성당의 원래 이름은 처음 설립할 당시에는 ‘선교리(船僑里)성당’으로 불렸습니다. 선교리성당은 설립 후 명칭이 여러 차례 바뀌었습니다. ‘선교리성당’은 처음에는 단층 기와집이었으며 본당은 성당 소속의 부설 학교인 동평학교 건물과 잇닿아 있었습니다. 선교리성당은 ‘신리(新里)성당’으로 명칭을 바꾸었고 광복되기 1년 전인 1944년 7월에는 ‘대신리(大新里)성당’으로 개칭되었으며 김일성의 반종교정책으로 1949년에 폐쇄될 때까지 ‘대신리성당’으로 불렸습니다.
1988년 3월에 시작된 공사는 약 반년 동안의 건설공사를 마무리하고 1988년 10월 9일에 완공되었습니다. 북한당국은 당시 약 500평인 이 성당건축공사에 든 건축비용이 30만원이었는데 그 중에 북한정부가 10만원을 지원해주고 나머지 20만원은 신자들의 모금으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과연 북한에 그 당시 천주교인들이 공개적으로 자기를 드러낼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그런 돈을 모금하는 것이 가능 했는지는 청취자 여러분들이 가늠해보아도 의문이 많을 것이라고 봅니다.
조선천주교협회는 1991년에 장충성당을 소개하는 인쇄물을 통하여 “아름다운 도시 평양에 자리잡은 장충성당,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굳센 믿음의 상징마냥 일어선 성당은 천주님을 만유 위에 높이 공경하려는 우리 신자들의 힘에 의하여 1988년 3월 말에 착공하여 불과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완공되었다. 연건축면적은 2,000평방미터이고 수용능력은 200명 정도이다. 오늘 장충성당은 북반부 천주교인들의 신앙생활의 거점으로 되고 있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장충성당은 큰 강당형 건물로 정면 중앙에는 재단과 제의실, 성가대석, 고해소, 각종 성화와 성물 등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내에는 사제관이 있고 협회 사무실이 마당 옆 같은 구내에 있습니다. 대한민국이나 다른 나라들의 성당들과 마찬가지로 장충성당에도 세례대장을 구비하고 있습니다. 세례대장은 카톨릭신자들이 세례를 받은 후에 본인의 이름과 세례명, 소속교구와 본당, 세례장소 등을 기록한 대장입니다. 지난 2011년에 남한의 한 천주교 사목자가 북한을 방문하여 장충성당에서 이 세례대장을 보고 사진도 찍어오기도 하였습니다. 이 대장에 등록된 천주교 신자는 약 300여 명이며 이들 중에 70~80명은 매주 미사에 참석하고 있으며 큰 축일에는 200여명이 미사봉헌에 참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북한당국은 장충성당을 건립하고 나서 천주교인 찾기 사업을 추진하였다고 밝혔습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북한당국이 조선천주교인협회를 결성하고 지방조직을 확대하면서 각 지역에서 자신이 천주교인임을 숨기고 살던 신자들을 찾는 사업을 공문까지 만들어 말단 행정조직이며 생활단위인 인민반에까지 내려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 기간이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라고 주장하는데 당시에 북한에서 살았던 저로서도 금시초문입니다. 북한당국은 대한민국과 일본, 미국 등 다른 나라에서 북한을 방문하면서 장충성당을 찾는 천주교인들에게 이 같은 내용을 강조하고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노동당의 반종교정책을 숨기고 더 많은 인도적인 지원을 끌어내기 위한 술책에 불과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주장입니다.
북한당국은 장충성당이 건립하고 나서 1년 후인 1989년에는 북한에 약 1,200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있다고 하였고 2014년에 약 3,000명이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광복 당시에 만도 5만 5천여명의 천주교인들이 있었던 북한지역에 지금은 보잘것없이 적은 인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충성당 신도회장인 차성근 율리오는 북한의 원산과 남포, 평성, 해주 등 지방들에도 천주교하부조직이 세워져서 신자들이 지역 공소들을 찾고 있다고 강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아직도 활성화되지 못하는 카톨릭 교회의 활동에 대해 “우리 공화국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조직생활을 하고 있어 그 조직을 뚫고 들어가 선교를 하지 않는다. 현 단계에서는 신자가정들이 자기가 일하는 매 처소에서 자기를 성화해서 실천적 모범으로 사회에 봉사하고 빛이 돼서 따라오도록 하는 방향으로 포교활동을 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매주 일요일 10시가 되면 양복을 입은 남성 천주교인들과 조선옷(한복)을 입고 머리에 흰 미사포를 쓴 여성 천주교신도들이 장충성당에서 성당회장의 주례로 공소예절을 드리고 있습니다. 사제가 없는 성당이다 보니 성찬의 전례 부분만을 제외한 미사를 진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충성당의 성당회장은 김영일에 이어 지금은 김철웅 프란치스코입니다. 부회장은 정학준 시몬이고 여성회장 겸 재정부장은 리산옥 카타리나, 여성부회장 겸 홍보담당은 리어금 테레사입니다. 이들은 한국이나 일본, 미국 등 다른 나라에서 방북한 사람들이 일요일에 미사를 드리려고 장충성당을 찾으면 만나서 북한의 종교정책에 대해 설명하기도 하고 경제형편으로 어려운 북한주민들을 위한 인도적인 지원을 요청하기도 합니다.
장충성당이 건립되고 1988년 10월 31일에 서울대교구 사목연구실장 장익 신부와 로마에서 유학 중이던 정의철 신부가 교황 특사로 파견되어 장충성당에서 최초로 미사를 봉헌하였고 1989년 2월 19일에 박창득 신부, 남해근 신부, 조영희 신부 등 한국의 신부들이 미국과 캐나다에서 살고 있는 교포 신부들과 함께 장충성당에서 남과 북, 해외 카톨릭 신자 합동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1989년 7월에 북한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였던 임수경도 천주교인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문규현 신부가 천주교신자인 임수경 수산나를 데려오기 위해 평양으로 가서 장충성당에서 8월 13일 임수경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북한당국은 임수경에 대해 많은 뉴스를 내보내면서 그가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장면은 물론 그가 천주교신자라는 사실도 숨겼습니다. 이것만 봐도 북한당국의 눈가림식 종교활동을 엿볼 수 있으며 장충성당 역시 대외선전용 천주교 연극무대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북한당국이 대외선전용 연극처럼 가짜 교인들을 강제로 예배에 참여하도록 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진짜 신앙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 오백룡의 조카 오혜선의 남편이면서 영국주재 북한대사관 공사였던 태영호가 쓴 도서 '3층 서기실의 암호'에도 드러나 있습니다. 김정은과 북한당국은 더 이상 북한주민들의 자유로운 종교생활을 억제할 것이 아니라 해방 전에 존재하던 성당복원과 자유로운 천주교인들의 종교생활을 보장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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