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위사령부검열과 서옥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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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동포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난시간에 보위사령부 검열로 양강도 혜산시 혜산강철공장 강승모지배인이 당했던 처참한 당시의 인권유린상황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1999년에 있었던 인민군 보위사령부의 양강도 검열 과정에서 혜산상업관리소 지배인 서옥순이 처형되던 과정에 대하여 이야기 드리려고 합니다. 혜산상업관리소는 혜산시 인민위원회 상업과의 지시를 받는 국가봉사기관입니다.

북한의 백화점들과 공업품(생필품)상점, 식료품상점을 비롯한 국영 상업망들은 모두 인민위원회 상업관리소 산하입니다. 북한의 각 지역 공업품상점들은 1980년대 초부터 인민반을 상대로 ‘상품공급체계’를 세우고 제한적으로 상품을 판매했습니다. 이는 상품 공급이 주민들의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데서 비롯된 부득이한 조치였습니다. 혜산상업관리소 역시 산하 공업품상점들과 남새상점, 식료품상점들을 관리하기 때문에 북한에서 말하는 소위 ‘먹을알이 있어 힘 있는 기관’이었습니다.

혜산시 성후동에는 혜산상업관리소의 창고들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혜산시 각 지역들에 공급할 생필품과 식료품들이 보관돼 있었습니다. 1980년대 까지만 해도 이곳 상업관리소 창고들엔 혜산시 주민들에게 공급할 상품들이 차고 넘쳤습니다. 힘없는 주민들에겐 차례지지 않고 힘 있는 자들만 독점해 왔지만 그때까지 상업관리소 창고들엔 생필품과 식료품들이 가득했습니다. 상점망에 나가는 가전제품과 피복류, 학습도구(문구)와 완구류, 부엌세간(주방도구)들이 이곳 창고를 거쳤습니다.

식료품 창고에는 큰 된장땅크(탱크)와 간장땅크들이 있었고 식용기름과 계란, 사탕, 과자 등 먹을거리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에 동유럽 사회주의가 멸망하고 그 영향으로 나중에 북한은 ‘고난의 행군’이라는 큰 위기를 겪게 되었습니다. 1990년대 초부터 상업관리소 산하 공업품과 식료품 창고들엔 상품들이 입고되지 않으면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던 1990년대 중반에 창고들은 텅 비게 됐습니다. 바빠 맞은 북한은 친척방문이라는 구실로 많은 사람들을 중국에 내보냈습니다.

중국에 가족 친척이 있는 사람들은 한 달 정도의 도강증(임시여권)을 발급해 주었습니다. 또 상업관리소 산하에 ‘수매상점’들을 만들고 중국에 친척방문을 갔던 사람들이 상업적 목적으로 반입한 식료품과 생필품, 식량을 팔도록 허가했습니다. 덕분에 ‘고난의 행군’시기 혜산상업관리소 직원들과 지배인 서옥순도 허리를 펼 수 있었습니다. 당시 혜산시에서 대판(컨테이너) 장사로 유명한 박정숙이라는 여성이 있었는데 그는 중국으로부터 북한에서 팔 상품들을 닥치는 대로 들여왔습니다.

들여 온 상품들은 모두 상업관리소 창고들에 보관했다가 장사꾼들에게 도매로 팔았습니다. 박정숙은 중국으로부터 끌어들인 식료품들 중에는 식용소다도 있었는데 한 번에 화물자동차 서너 대 량으로 들여다가 이곳 창고에 보관하여 팔 정도였습니다. 박정숙 말고도 중국을 오가며 장사를 하는 다른 사사여행자들도 상업관리소 창고에 물건들을 보관하고 팔았습니다. 상업관리소 창고들은 워낙 면적이 넓은데다 무장을 한 인민보위대가 지키고 있어 물건을 잃어버릴 걱정을 안 해도 되었습니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 길림성 장백조선족 자치현과 마주한 양강도 혜산시의 인민들은 사사여행자들이 끌어들이는 상품들과 강 건너 중국의 발전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개혁개방에 환상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은 이를 두려워했습니다. 당시 김정일 정권은 중국의 개혁개방에 대해 ‘특색 있는 사회주의는 곧 자본주의’라고 비난하면서 자신들의 체제를 ‘인민대중 중심의 우리식 사회주의’라고 선전했습니다. 개혁개방보다 ‘인민대중 중심의 우리식 사회주의’가 우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장마당에서는 중국의 ‘특색 있는 사회주의’가 ‘우리식 사회주의’의 뺨을 쳐 갈겼다는 우스개 소리가 공공연히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우리식 사회주의’가 ‘특색 있는 사회주의’네 집에 깡통을 들고 구걸질을 다닌다는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보위사령부가 혜산상업관리소 지배인 서옥순을 잡아들인 구실은 “개인장사꾼들의 상품을 국가창고에 보관해 주고 전국에 팔려나가게 함으로서 결과적으로 우리 인민들 속에 자본주의 황색바람을 불어넣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서옥순을 구속한 보위사령부는 상업관리소 창고를 빌려준 대가와 상급 간부들에게 상납한 뇌물에 대해 집요하게 조사했습니다. 여성으로서 체포된 초기 서옥순 지배인은 일부 잘못을 시인하며 보위사령부의 검열에 협조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하지만 조사과정에서 서옥순은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습니다. 보위사령부에 협조한 주변의 간부들이 밤사이 조용히 사라지는가 하면 공개적으로 처형되고 있음을 눈치 채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서옥순의 입은 꽉 닫혀버렸습니다.

서옥순은 자신만 입을 굳게 다물면 그동안 신세를 졌던 간부들이 노력을 해서 구해주리라고 믿었습니다. 보위사령부는 경제난으로 국가 공급이 제대로 안 되는 공업품과 식료품들을 자신의 낯을 내며 간부들에게는 제공한 사실을 거들었습니다. 지배인이라는 특세를 부리면서 간부들에게 발라 맞추고 두 아들을 대학에 보내 좋은 직장에 취직시킨 사연도 문제로 삼았습니다. 서옥순은 혜산시 혜산동에서도 혜산역과 마주한 ‘혁명전적지답사 기념품상점’ 아파트 3층에 살고 있었습니다.

저는 서옥순의 맏아들 김철규와 김일성종합대학을 함께 다니면서 그의 집을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집은 방 두 칸의 평범한 아파트였는데 보위사령부 검열 이후 엄청난 소문이 돌았습니다. 돈이 꽉 찬 독이 몇 개라느니, 기름도 독에 넣어두고 먹는다느니, 딸라가 몇 십만 나왔다는 근거 없는 말들이 꼬리를 물고 퍼졌습니다. 1999년 6월에 보위사령부로 끌려간 서옥순은 한 달간 몸에 성한 곳을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입을 열면 죄가 열배, 백배로 치솟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남자들도 견디지 못하는 고문을 마지막까지 견뎠습니다.

보위사령부는 한 달간 서옥순에게 온갖 회유와 고문을 다 하다가 결국은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서옥순이 얼마나 모진 여성이었는지는 당시 그를 고문했던 검열성원들이 “우리가 항복한다. 두 손을 들었다”고 공공연히 말했던 데서 잘 드러났습니다. 한 달 동안의 고문으로 아무런 소득도 없자 보위사령부는 고문을 포기하고 그녀를 감방에 방치해 두었습니다. 대신 서옥순에 대한 온갖 자료들을 날조해 내고 다른 사람들을 고문해 억지로 받아 낸 거짓 자백을 근거자료로 중앙에 제공했습니다.

그렇게 감방에서 버티길 세달, 보위사령부 검열이 끝나가던 1999년 8월 혜산비행장 등판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옥순은 다른 간부들과 밀수범 11명과 함께 공개처형을 당했습니다. 사형장에 나온 그녀의 목에는 두터운 마분지에 시커먼 먹으로 “혜산상업관리소 지배인 서옥순”이라고 새긴 팻말이 걸려 있었습니다.

사형장에 끌려 나온 그녀의 눈은 생기를 잃고 어딘가 하늘을 응시했습니다. 그녀의 눈길이 가닿은 하늘엔 당 간부로 있다가 가족과 함께 시골로 추방된 맏아들과 평양상업대학을 다니던 중 퇴학당한 둘째아들이 보이지 않았을까 저는 생각해 봅니다. ‘고난의 행군’시기 산하 직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한 여성의 운명은 이렇게 속절없이 끝났습니다. 혜산상업관리소 지배인 서옥순의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이어가기로 하며 지금까지 진행에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