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동포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난 시간 김정일 정권이 1998년과 1999년 사이 남포시와 양강도에서 보위사령부를 내세워 강행한 검열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오늘도 지난시간에 이어 양강도에서 강행되었던 보위사령부의 검열에 대해 상세한 이야기를 계속하려고 합니다. 보위사령부 검열에서 살아난 인물들 중엔 혜산강철공장 지배인도 있었는데 당시 58세로 이름은 강승모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혜산강철공장은 1980년대 말 양강도 당위원회가 철강재 문제를 자체로 해결하기 위해 혜산시 검산동에 세웠습니다. 지방마다 강철생산기지들을 내올 데 대한 김일성의 방침에 따라 양강도 당국은 1988년에 시작해 1990년 초에 완공했습니다. 혜산강철공장이 신설되게 된 데는 김정일의 측근이었던 당시 양강도당 책임비서 염기순의 역할이 컸습니다. 1935년생인 염기순(廉基淳)은 군복무를 마치고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하였고 김정일과 함께 공부를 한 간부였습니다.
대학 졸업 후 노동당 조직지도부 지도원으로부터 조직지도부 부부장으로 승진했습니다. 이후 1977년부터 강원도당 책임비서, 1988년부터 1991년까지는 양강도당 책임비서 겸 인민위원장으로 별 탈이 없이 승진의 길을 걸어 온 인물이었습니다. 1974년 김정일이 노동당 조직지도부 부부장직을 맡고 있을 때 염기순도 함께 조직지도부에 근무하였는데 당시 염기순은 꼼꼼하고 과묵한 성격으로 일처리를 잘하였습니다. 이렇게 김정일의 눈에 들었고 그 덕에 부부장으로 승진할 수 있었습니다.
북한에서 '혁명전적지 관문도시'라고 불리는 양강도 혜산시는 도로와 철도가 발달하지 못해 외부로부터 지원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특히 양강도 일대의 혁명전적지들을 개발하고 건설하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철강재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습니다. 양강도당 책임비서로 부임된 염기순은 강철공장 건설을 발기하고 중앙에 도움을 요청하는 제의서를 올렸는데 김정일이 쉽게 비준해 주었습니다. 강철공장 준공식을 가지던 날 염기순은 "내가 양강도에 남긴 가장 큰 업적"이라고 자랑을 했습니다.
양강도 인민들 속에서 염기순은 너그럽지 못한 간부로 인식돼 있습니다. 하지만 김정일은 염기순의 꼼꼼하고 한번 집착하면 끝장을 보고야 마는 성격을 높이 평가해 1991년 12월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승진시켜 제 수하에 두었습니다. 김일성 사망 후 염기순은 조직지도부 1부부장에서 본부당(노동당 본부) 책임비서로 승진해 북한의 권력서열 2위까지 올랐습니다. 그런데 푸른제 명칭 러시아 군사학교에 유학했던 군 간부들의 반란사건에 염기순의 아들도 연루돼 처형되었습니다.
해군사령부에서 복무하던 아들은 북한의 중요한 군사비밀은 물론 염기순이 보관하고 있던 노동당 내부 비밀자료들까지 몰래 열람해 러시아 정보기관에 넘긴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피할 길 없었던 염기순은 독극물에 의한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염기순의 최측근으로 혜산강철공장 지배인이었던 강승모는 보위사령부 검열의 첫 번째 표적이었습니다. '고난의 행군'시기 강승모는 공장의 직원들과 가족들을 먹여 살리면서 긴급한 철근생산 과제를 수행하느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고난의 행군' 시기 양강도는 식량문제 해결을 위해 산림자원을 마구 훼손해 수많은 통나무를 중국에 헐값으로 팔아먹었습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공장의 기계설비들까지 중국에 고철(파철)로 팔고 대신 사료용 강냉이 가루를 식량으로 사들였습니다. 혜산강철공장 역시 생산한 강재의 일부를 중국에 팔고 대신 식량을 들여왔습니다. 단순히 식량만 들여 온 것이 아니라 철근생산에 필요한 설비와 용광로를 돌릴 콕스도 수입해 들였습니다. 노동자들의 식량은 자체로 해결하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이를 위해 노동자들 스스로가 수매소들에 방치된 고철을 유휴자재 모으기 운동으로 거두어들이도록 했습니다. 양강도 무역관리국을 검열하던 보위사령부는 혜산강철공장에서 중앙의 비준이 없이 중국에 강재를 팔아먹은 자료를 수집하게 됐습니다.
제멋대로 공장의 생산물을 처리했다는 이유로, 또 이 과정에 부정부패에도 연루되었을 것이라는 판단만으로 보위사령부는 혜산강철공장 지배인을 체포했습니다. 보위사령부에서 그가 어떤 고문을 얼마나 받았는지는 그 일부만 알려져 있습니다. 1999년 5월 말에 보위사령부에 체포된 강승모는 7월말에야 석방되었습니다. 애초 북한 간부의 표준이라 할 만큼 배가 나오고 체구가 80kg 이상이었는데 감옥에서 풀려날 땐 가족들이 들 것을 가지고 밤중에 몰래 데리고 나와야 했습니다.
보위사령부는 자신들의 고문만행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무죄로 판결된 간부들을 밤중에 몰래 석방시켰습니다. 석방될 땐 수감된 이후부터 있었던 내용들을 절대로 외부에 발설하지 않는다는 조건에 동의하고 손도장을 찍어야 했습니다. 강승모 지배인은 혜산시 화전협동농장과 검산동 사이 산마루에 위치한 국가보위부 비밀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보위부 답사숙영소"라는 이름으로 위장된 이곳은 가족들과 함께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갈 대상들을 임시로 수용하는 시설이었습니다.
이곳에서 강철공장 지배인은 소금물 고문을 많이 받았다고 훗날 친구들에게 실토했습니다. 소금물 고문은 국물과 밥, 지어 마시는 물에도 모두 소금을 타 심한 갈증을 유발하는 고문입니다. 갈증을 호소하면 또 소금물을 먹이는 방법이었습니다. 소금물 고문을 받으면 손발이 부어나고 변비가 와 몸을 움직이기 어려워집니다. 이때부터 가혹한 물고문이 시작됩니다. 사람을 하루 종일 물탱크에 집어넣고 하루에 수십 번씩 주전자에 든 1.6리터의 물을 강제로 마시게 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물고문을 받는 사람은 변소에도 못 가게 했습니다. 이런 고문을 3일 이상 받으면 생명을 유지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물고문이 끝나자 다음은 마른 고문이라는 걸 들이댑니다. 수감자에게 물을 주지 않는 고문인데 이 또한 견디기 어렵다고 합니다. 특히 수사관들이 계속 물을 마시는 보습을 보여줘 조사를 받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더해주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산강철공장 지배인은 밀수꾼이었던 김호철처럼 감옥에서 죽지는 않았습니다. 밀수꾼 김호철의 별명은 '호빼'였습니다.
보위사령부는 옥사한 김호철을 부관참시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혜산강철공장 지배인이 풀려나게 된 데는 공장 노동자들의 탄원이 많은 역할을 했습니다. 공장 노동자들과 가족들을 살리려고 애쓴 대가를 그들은 탄원으로 보답했습니다. 지배인의 청렴을 호소하는 탄원서들이 연속 올라오는데다 그가 중국에 고철을 팔고 대신 용광로를 살릴 콕스와 철근을 만들 설비를 들여왔다는 것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문제는 석방된 지 한주 만에 다시 보위사령부에 구금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김정일 정권은 식량문제를 해결한다며 풀 먹는 집짐승인 토끼, 양, 염소를 많이 기를 데 대해 지시했습니다. 공장마다 우리를 짓고 토끼를 기르라는 건데 이를 설명하는 과정에 지배인은 "나도 감옥에서 석방될 때 겨우 기어서 나왔는데 아내가 해준 토끼 곰을 먹고 벌떡 일어났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죄가 됐습니다. 보위사령부 내부에서 겪은 일을 절대로 외부에 발설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겼다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그는 보위사령부에 끌려 간지 3일 만에 다시 석방됐습니다. 대신 보위사령부라는 말만 들어도 눈이 뒤집히며 심각한 발작 증세를 보였습니다.
혜산강철공장 지배인은 보위사령부 검열에서 제일 많은 고문을 받았고 제일 오래 구속되었지만 끝내 살아남은 몇 명 안 되는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살아남은 그의 삶을 과연 인생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궁금해질 따름입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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