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위사령부검열과 보천특산물식당(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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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동포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김정일의 지시로 1999년에 강행된 양강도 보위사령부검열로 처형된 사람, 추방된 가족,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간 기관장 등 너무도 많은 주민들이 죄 없는 죽음을 당하다 보니 아직도 북한의 모든 도시와 농촌에 그 공포가 남아 있습니다. 오늘은 1990년대 말에 양강도에서 소문난 식당으로 잘 알려져 있었던 보천특산물식당에 대한 보위사령부검열에 대해 이야기를 해드리려고 합니다.

평양시에 개성특산물식당, 평안남도 특산물식당, 함경북도 특산물식당 등 각도와 직할시 특산물식당이 있듯이 양강도 혜산시에는 도내 각 군을 대표하는 특산물식당들이 있습니다. 혜산시에 있는 보천특산물식당, 삼수특산물식당, 풍서특산물식당, 대홍단특산물식당 등 군을 대표하는 특산물식당은 1990년대 중반에 생겨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경제난과 식량난으로 도인민위원회 급양국과 시군인민위원회 급양부 산하의 식당들이 원자재 부족으로 문을 닫게 되자 개인들이 운영하는 협동식당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보천특산물식당 책임자는 인민군 여성군관출신의 강 모씨였습니다. 처음에는 혜장동의 개인집에서 협동식당을 운영하던 강 책임자는 식당을 크게 확장하기 위해 보천군 인민위원회 정남위원장을 찾아갔습니다. 보천군은 혜산시에서 북쪽으로 약 40km, 백 리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군 간부들이 자주 평양출장을 가곤 하였는데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이 열차에서 먹을 음식준비였습니다. 그리고 도당에 회의를 하러 올라오면 매끼 먹는 문제가 큰 걱정거리였습니다. 강 지배인은 군 간부들의 이 고충을 다 해결하겠다고 정남위원장에게 약속을 했습니다.

외할아버지가 항일혁명열사로 토대가 좋은데다가 아버지도 오랜 당 간부여서 어디에 가나 그를 도와주겠다는 사람은 많았습니다. 정남위원장이 혜산시에 보천특산물식당을 내올 데 대한 문제로 군당책임비서에게 제의서를 올리자 이미 책임비서는 다 알고 있다며 승인하였습니다. 강 책임자의 아버지는 보천군당책임비서와 오랜 당 간부 생활을 한 막역한 사이였습니다.

보천특산물식당문제가 승인되자 강 책임자는 혜산시에서 가장 위치가 좋은 곳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중국과 북한정부가 무역을 위해 건설한 혜산장백다리에서 가장 가까운 곳을 찾던 중 도보위부장이 살다가 당시에 도인민위원회 박 부위원장이 살고 있는 탑성동의 독립주택이 그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번 마음먹으면 무조건 해내고야 마는 성격을 가진 그는 박 부위원장을 만나 그 건물을 주면 아파트 2세대분의 주택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한 달여 만에 그 건물을 손에 넣게 됩니다.

큰 방 4개와 주방, 창고가 있고 마당에는 한번에 8대 정도의 차가 주차할 수 있는 이 건물은 도보위부에서 보위부장의 사택으로 지었던 주택입니다. 그런데 국가보위부에서 이 주택이 국경과 가깝다는 이유로 이사할 것을 지시하여 결국 도인민위원회 박 부위원장이 이 건물로 이사 와서 살았습니다. 이 건물을 식당으로 만들자니 박 부위원장이 장가를 간 아들과 분가하려고 요구하는 두 칸짜리 아파트 2 세대 분을 주어야 하였습니다. 이 건물교환을 위해 강 책임자는 당시 남편의 친척이 살고 있는 주택을 팔아 박 부위원장의 가족에게 아파트를 마련해주고 대신 그 친척가족과 함께 살면서 식당 직원으로 채용하였습니다. 그 친척은 베개봉여관에서 요리사로 있다가 지배인까지 하였던 분이었는데 전국요리축전에서 만두를 잘 만들어 전국적으로 소문이 났던 고급요리사였습니다. 그가 보천특산물식당의 만두요리를 전문적으로 맡았습니다. 건물도 손에 넣어 보란 듯이 보천특산물식당 간판을 달았고 일본에서 요리를 하다가 귀국한 재일교포 귀국자 요리사 2명을 식당요리사로 채용하였습니다.

중국과 무역을 하기 위해 평양과 각 지역에서 몰려온 무역쟁이들은 세관과도 가깝고 음식 맛이 좋았던 이 보천특산물식당의 기본 손님(주고객)이었습니다. 평양메밀냉면과 대홍단 감자농마국수, 단고기국밥, 비빔밥, 구운 교자, 짜장면, 일본식 물고기회밥인 스시, 사시미, 발쪽찜, 등 요리 가지만 해도 30여 가지가 넘었고 술과 맥주도 중국에서 넘겨받아 영업에 이용하였습니다.

소문이 나자 벌떼처럼 찾아든 사람들은 다름 아닌 간부들이었습니다. 군 간부들이 도에 회의를 하러오면 식사는 물론, 며칠씩 회의를 할 때면 숙소처럼 이용하기도 하였습니다. 특산물식당은 군에 속해 있으면서도 당 소속은 혜산시 당에 속해있어 당원인 강 책임자에게는 시당 간부들도 공짜손님이었습니다. 간부들은 돈을 안 내고 먹는 것을 응당한 것처럼 생각하였고 장사를 아무리 열심히 하여도 직원들에게 노임을 주고 군인민위원회 급양부에 수입금을 바치고 나면 적자나기가 일쑤였습니다. 이 적자는 그대로 강 책임자 가족의 빚으로 남았고 다음날 영업을 위해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야 했습니다. 오죽했으면 강 책임자의 남편이 그런 간부들에게도 마구 욕을 퍼부어 가정싸움이 나기도 했습니다.

도당에서는 중앙에서 간부들이 내려오면 전용열차에 음식을 가져다 달라고 요구했고 평양에 올라가는 도중식사도 준비하도록 강요하기도 했습니다. 도검찰소와 도보안국의 검사들과 보안국 간부들도 자주 식당에 와서 뒷골방을 찾았습니다. 뒷골방은 간부들이 다른 일반 주민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꺼려서 별도로 뒷문으로 들어가서 식사하도록 만들어 놓은 방이었습니다.

더 가관인 것은 도보안국의 경제 감찰처의 검열이었습니다. 국가에서 대주는 것이 없이 모두 시장에서 암거래로 원자재를 구매하여 운영하는 식당에 대해 무슨 검열이 그렇게 많은지 영업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습니다. 검열이 오는 날이면 우선 그들에게 장부들을 보여주어야 하고 푸짐한 식탁을 차려주어야 하였습니다.

만약 식탁에 값이 나가는 물고기 회나 소고기요리, 갈비찜 등이 오르지 않으면 책임자는 다음날부터 매일 도보안국 경제감찰처에 불려 올라가서 문건을 놓고 조사를 받아야 합니다. 그게 싫어서라도 돈을 아끼지 말고 음식대접을 잘 해야 했습니다.

검찰소에서도 여기에 뒤질세라 빈번히 식당에 찾아와서 공짜음식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래도 검사들은 여러 번 공짜를 먹다가도 드문드문 회수품을 대신 주는 방식으로 값을 치르곤 하였습니다. 밀수꾼들에게서 회수한 비닐박막, 천류, 양초, 빙초산 등 다양한 밀수품들을 몰래 가져가서 팔아서 식사비용을 대체하라고 하였습니다. 도당과 도인민위원회, 도검찰소, 도보안국 등 권력기관의 간부들은 중앙에서 고위간부들이 양강도에 내려오면 자기 집으로 요리들을 가져오도록 강요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간부들은 자기의 돈을 내는 것이 아니라 도 도매상사나 상업상사에서 물건을 받아다가 팔아서 그 비용을 대체하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고난의 행군으로 북한주민들이 굶어죽고 병들어 죽게 되자 미국과 유럽연맹에서는 쌀과 영양가루, 먹는 기름, 영양과자를 지원하였고 남한에서는 쌀과 결핵약, 미역 등 많은 지원물자들을 보내주었습니다. 이 지원품들에는 비매품이라는 글자가 찍혀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주민들에게 돈을 받지 말고 공급해주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북한정권은 이것을 각종 상사들에 넣고 주민공급을 하지 않고 이렇게 자기들이 필요할 때마다 소비하였던 것입니다.

도이칠란드 등 유럽나라들의 관계자들이 지원한 물자들의 공급실태를 알아보려고 북한에 들어오면 그때에는 주민들에게 무상으로 공급하는 척 흉내만 내기도 하였습니다. 도이칠란드에서 북한주민들에게 공급하라고 보내준 소고기들은 간부들의 공짜식사 비용으로 식당에 제공되어 요리에 이용되었습니다. 남한에서 보내준 미역이나 콩기름도 이렇게 간부들의 배를 채웠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북한주민들도 점차 알게 되었고 보위사령부 검열에서 이 문제가 상정되었습니다.

보천특산물식당이 양강도에서 이름이 날정도로 유명해지고 무역쟁이들을 비롯한 많은 평양손님들이 이 식당에 쏠리자 평시에 여기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다른 식당책임자가 보위사령부 검열성원들에게 신소를 하였습니다. 보위사령부검열이 시작되자 간부들도 식당에 나타나지 않았고 일반 주민들도 식당출입을 삼갔습니다. 보위사령부 검열이 시작된 지 한 달이 되자 혜산시의 거의 모든 특산물식당들은 영업이 중단될 정도로 손님들의 발길이 끊겼고 직원들도 출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1999년 6월 어느 날 새벽 사복차림의 보위사령부 검열관 두 명이 식당에 들이닥쳤습니다. 그들은 '보천특산물식당 강 책임자는 오늘부터 보위사령부 검열을 받게 되었다'며 당장 함께 조사받으러 가자고 하였습니다. 평시에는 그 무엇도 무서운 것이 없던 강 책임자는 사시나무 떨듯 한 자세로 따라 나섰고 그때로부터 무시무시한 조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가족면회도 허락하지 않고 어디에서 조사받는지도 가족에 알려주지 않고 시작된 조사는 거의 한 달이 걸렸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보천특산물식당 강 책임자가 보위사령부검열을 어떻게 받았는지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