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할 수 없는 김정일의 결혼사진

0:00 / 0:00

북녘 동포 여러분, 사람은 태어나면 백날 사진, 돌 사진, 그리고 생일 때마다 기념해 생일사진을 찍게 되고 인생의 중대사인 결혼식에는 결혼사진을 남깁니다. 청취자 여러분들도 아무리 어려운 처지일지라도 결혼을 하면서 남긴 사진을 보면서 두고두고 추억하고 있을 거라고 봅니다.

그러나 김일성은 물론 김정일도 결혼을 했지만 공개된 사진이 없습니다. 김일성은 김정숙과 결혼할 당시는 일제강점기 빨치산활동을 하던 시기였고 후처인 김성애와 결혼할 당시는 전쟁 중이어서 사진을 남길 수 없었지만 김정일은 사정이 달랐습니다.

김정일은 생존에 5명의 부인과 살면서 3남 4녀, 7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이 중에 정식 부인, 북한 말로는 본처(本妻)는 단 한 명, 김영숙이었고 김정은의 엄마인 고영희를 비롯해 4명은 동거녀였습니다. 북한에서는 이런 여성과 짝을 이룬 불륜 부부를 가리켜 8.3부부라고 하죠. 그런 김정일에게는 결혼식의 의미가 중요하지 않았죠. 김정일은 본처인 김영숙 외에 8.3부부들인 홍일천, 성혜림, 고영희, 김옥 등과 동거했고 그 외에도 만수대예술단 배우들과 조선예술영화촬영소 배우들을 비롯해 수많은 여성들과 동거했다는 사실은 지금에 와서는 비밀이 아닙니다.

김정일은 25살 나던 1966년에 김일성종합대학 동창이었던 홍일천과 몰래 동거하면서 그 다음해에 김혜경을 보았고 3년 후인 1969년에는 자기보다 나이가 5살이나 많은 영화배우 성혜림 사이에 맏아들 김정남을 보게 되었습니다. 김정일의 맏딸인 김혜경은 현재 만나이로 54살이지만 여전히 공개되지 않고 있습니다.

김정일은 1990년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으로 임명되고 1991년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되는 시점에는 김일성을 꼭두각시로 내세운 제1인자로 자리매김하면서 숨겨왔던 첫 사랑인 홍일천을 내세우기 시작했습니다.

홍일천은 1991년 9월에 김형직사범대학 학장으로 임명되었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1993년 1월부터는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북측본부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리고 1996년에는 10월에는 교육대표단 단장으로 일본에 있는 조총련 산하 조선대학교를 방문하면서 국제적인 언론에 노출되기도 했습니다.

김정일의 첫 사랑인 홍일천이 일본을 방문한 시점인 1996년은 북한주민들이 고난의 행군으로 가장 어렵던 시기였고 그 당시는 김정일이 홍일천과 이별한 후 성혜림, 김영숙, 고영희로 이어진 여러 여성과의 만남과 이별이 이어지던 시기였습니다. 김정일의 두 번째 동거녀인 배우출신 성혜림은 김정일이 본처인 김영숙과 정식 결혼한 이후 정신분열증에 걸려 앓게 되면서 당시는 모스크바에서 치료를 받던 시기였습니다.

김정일의 정식 부인으로 만났던 김영숙은 김정일에게는 3번째로 만난 여성이었습니다. 성혜림과 동거하면서 4년 뒤인 1973년 김정일은 김일성 집무실 타자수였던 김영숙과 결혼하여 1975년에는 김설송, 1976년에는 김춘송 두 딸을 보았습니다. 홍일천과 성혜림의 존재를 몰랐던 김일성이 김정일에게 자기가 서기실에 데리고 있던 김영숙과 정식 결혼을 하도록 권유했다고 합니다. 당시 김정일의 나이는 32살, 김영숙의 나이는 37살이었습니다.

결국 첫 사랑이었던 홍일천과 두 번째 동거녀였던 성혜림은 정식 부인이 아니어서 결혼식을 올릴 수 없었고 결혼사진을 남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의 권유로 정식 결혼을 하였던 김정일과 김영숙의 결혼은 성대하게 치러졌습니다. 김씨 일가의 뒷생활에 대해서는 철저한 비밀로 붙이고 있는 북한에서 김정일의 결혼사진은 최고의 비밀로 다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평양시 보통강구역 신원동에 있는 만수무강연구소인 만청산연구원에서 근무할 당시에 같은 연구실에서 근무했던 평양의학대학 교수 출신의 류중삼 박사는 자기가 하는 연구내용을 대학친구들에게 발설한 이유로 온 가족이 정치범관리소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김정일의 두 번째 동거녀인 성혜림의 대학동창이었던 김영순 씨도 성혜림과 김정일이 동거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가족과 함께 정치범관리소에 끌려갔습니다.

김정일의 뒷생활을 알아도 안 되며 알려고도 하지 말고, 또 알고 있는 경우에는 누설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김씨 가문 내에 정해놓은 법입니다. 특히 누가 저들의 뒷생활을 안다는 것이 밝혀지면 무조건 사회와 격리시켰고 죽는 순간까지도 나올 수 없는 정치범관리소에 처넣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은 1990년대를 전후해 김정일의 지시로 관혼상제를 간소화할 데 대한 지시가 내려진 사실을 기억할 것입니다. 고난의 행군시기를 전후해 내려진 이 지시로 결혼과 제사를 간소하게 하지 않으면, 간부직 철직과 노동당 출당이 빈번해졌지만 김정일 주변은 딴 세상이었습니다.

김정일의 전용요리사였던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가 중앙당 5과의 엄정녀와 했던 결혼식이 얼마나 성대하게 진행되었는지는 그가 쓴 도서 ‘북한의 후계자 왜 김정은인가?’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그 책에는 두 장의 결혼식 사진이 있는데 그 상차림을 보면 관혼상제를 간소하게 하라고 했던 김정일의 겉과 속 다른 숨겨진 실체를 잘 알 수 있죠.

제가 직접 목격한 것 중에 관혼상제를 간소하게 하라고 했던 김정일의 거짓스러운 또 다른 사례가 있습니다. 현재 북한의 국토환경보호상인 김경준은 김일성종합대학 생물학부에서 저와 같은 학과를 다닌 동기동창생입니다. 빨치산 출신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그의 아버지 김시학은 중앙당 행정간부부 부부장을 했던 고위간부였죠. 1989년 11월 어느 날 김정일로부터 김경준의 아버지 김시학에게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저도 대학시절에 러시아대사관 정문 맞은편, 중앙당 부부장 아파트에 사는 김경준의 집에 가본 적이 있는데 그의 아버지의 서재 책상 위에는 빨간 비로도천을 깐 전화기가 놓여 있습니다. 김정일이 중앙당 부부장급 이상 간부들에게는 아무 때나 전화할 수 있게 직통전화를 놓아주었습니다.

김정일의 전화가 왔을 당시 그의 아버지는 집에 없었고 김경준이 김정일의 전화를 받게 되었죠. 김정일은 그의 나이며, 알고 지내는 여자가 있는지 등을 물었고 애인이 있다는 대답을 듣고는 “결혼은 빨리 하는 것이 좋다”며 결혼상을 선물로 내려주었습니다.

김경준의 결혼식은 평양시 보통강구역에 있는 경흥관에서 치러졌고 저희들과 함께 대학을 다녔던 동기동창 최란이 그의 신부였습니다. 최란은 당시 남산진료소 기술부원장의 딸이었죠. 김정일이 하사한 그의 성대한 선물결혼식을 보면서 관혼상제를 간소하게 하라고 했던 김정일의 겉과 속이 다른 실체를 다시금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이 결혼식상을 보면서 김정일의 결혼식은 얼마나 굉장했을까 라는 생각을 했었죠.

한 여성도 아닌 여러 여성들과 동거하면서 7명의 배다른 자녀를 둔 김정일이 모든 여성들과 결혼식을 치를 수는 없었고 본처인 김영숙과의 정식 결혼식만은 사진을 남겼지만 그 이후에도 다른 여성들과 동거하면서 정식 부인으로 맞이할 수 없어 결혼사진을 더 이상 찍을 수 없었습니다.

김정일의 정식 결혼식 사진은 본처의 존재가 사라지면서 파묻혔지만 언젠가는 그 사진도 국제사회에 공개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