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동포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이 시간에도 지난시간에 이어 보위사령부 검열기간에 양강도 보천특산물식당 강 책임자가 당했던 인권유린행위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체포되어 혜명분주소에서 혜산시 성후동 답사숙영소에 이관되기 전에 임시로 조사받으러 가있던 곳은 혜산시 혜신동에 위치한 보위사령부 혜산초소 구류장이었습니다.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이 혜산초소의 부소장으로 복무하던 이영일을 통하여 당시의 조사내용에 대해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저와 같은 김일성종합대학 생물학부 졸업생이며 저의 후배였습니다.
보위사령부 검열성원들은 식당건물을 사들이는데 든 돈의 출처와 중국 사사여행기간에 중국 조선족들로부터 빌린 돈이 대한민국 안기부에서 받은 '검은 돈'일 수 있다는 단서를 받아내려고 조사기간에 잠을 재우지 않고 조서를 받아냈습니다. 그리고 식당에 자주 출입하던 간부들과의 유착관계도 따지고 들었습니다.
식당건물과 관련된 문제는 명백한 증거가 있어 별문제가 없었고 중국 조선족 사업가들의 돈을 빌린 문제도 증인자료가 명백해지면서 당장 석방될 것 같았지만 오히려 성후동에 위치한 답사숙영소에 이관되자 강 책임자도 절망하였습니다.
당시 보위사령부 검열기간에 체포된 사람들을 처형하기 직전에 감금한 장소가 바로 이 답사숙영소였습니다. 보위사령부에 이관되어 며칠이 지나서야 그곳으로 다시 이관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남편과 가족들은 매일이다시피 답사숙영소 주변을 빙빙돌면서 혹시나 먼 곳에서 눈이라 마주치지 않을까 기대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헛수고에 불과했습니다.
강 책임자가 석방되고 나서 자세한 내용을 남편에게 말하고 나서야 당시 답사숙영소에서의 조사과정을 알 수 있었습니다. 보위사령부 검열성원들은 '사람새끼를 만들어 줄려고 해도 조사에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으니 죽을 수밖에 없겠다'면서 으름장을 놓기도 했습니다. 밤 12시가 지나서 족쇄를 채우고 호송차에 태워 답사숙영소에 데리고 갔는데 그가 처음 들었던 방은 7층에 있는 호실이었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북한 각 지역에서 백두산답사를 오는 답사생들이 들어야 할 곳이 보위사령부에서 처형을 기다리는 사형자들의 감방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가 감방에 들어서니 박정숙과 홍옥을 비롯한 몇 명의 피의자들이 자정에도 잠을 자지 못하고 정자세로 앉아 있었습니다. 한잠도 못자고 정자세로 앉아 있기란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 고통을 잘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도 하루가 아니라 며칠씩이나 그런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 허리와 목, 팔다리 등 온몸이 다 쑤셔나게 아파납니다. 그래도 정자세는 괜찮은 편입니다. 한 번씩 조사를 받으러 나갔다가 돌아와서 검열성원이 "이년이 아직도 정신이 덜 들었어, 무릎 꿇고 바로 앉아!"라고 하면 두 무릎을 꿇은 자세로 장시간을 버텨야 하는데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
무릎관절이 빠져 나올 것처럼 아프고 혈액순환이 잘 되지 않아 어느새 다리는 저리다 못해 통증이 심해지다가 감각마저 없어집니다. 자세가 조금만 흐트러지면 보위사령부 요원들이 "이 쌍년이 반항해?"라고 고함을 지르며 다시 끌고 나가서 조사실에서 고문을 하였습니다. 검열성원들의 눈에는 조사를 받는 그들이 사람이 아니라 짐승 한가지였습니다. 발로 얼굴을 마구 걷어차는 것은 물론 무릎에 나무봉을 끼우고 어깨를 눌러 '무릎뽑기 고문'을 하였고 벽을 마주해서 세워놓고는 머리를 벽에 부딪치게 타격하기도 하였습니다.
강 책임자가 감방에 들어서니 박정숙과 홍옥의 얼굴은 시퍼렇게 멍이 들고 부어있어 처음에는 누군지 분간하기 어려웠습니다. '이제는 죽었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눈물이 앞을 가렸다고 합니다. 감방 밖의 다른 조사실에서 고문을 하면서 들려오는 비명소리는 온 복도를 쩡쩡 울렸고 그 소리가 날 때마다 온몸이 공포에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박정숙과 홍옥은 중국에 있는 조선족 친척집을 다니면서 공업품(공산품)을 차판으로 들여다가 장사를 하던 여성들이었습니다. 1966년생인 박정숙은 당시에 나이가 33살이었지만 장사머리가 남들보다 뛰어나 혜산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20대 후반에 벌써 중국에서 물건들을 가져다가 팔기 시작하였고 점차 물건을 화물자동차로 넘겨다가 팔 정도로 유명해졌습니다.
새벽녘이나 낮 시간에 드물게 보위사령부 검열성원들이 자리를 비워 감시가 느슨해지는 경우에는 잠깐씩 몸을 움직여 강직된 근육을 풀기도하고 서로 소통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소통방식은 말을 주고받으면 들킬 위험이 있기에 손가락으로 방바닥에 글을 쓰는 방식이었습니다. 박정숙은 자기가 장사하는데 든 거액의 밑천이 남조선 안기부에서 대준 것임을 실토하라고 강요당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여성은 자기는 자기 돈으로 장사를 하면서 밑천을 마련하여 장사를 한 것인데 어이가 없다면서 눈물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박정숙의 동생 박정옥은 언니가 체포되자 '잠수'를 탔습니다. 언니가 물건을 넘겨오면 도소매군들에게 팔아 넘기던 동생을 보위사령부에서 잡으려 했지만 어디에 가서 숨었는지 찾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동생의 남편인 박금철이는 갓난 애기를 데리고 혼자 집을 지켰습니다. 보위사령부 검열성원들은 박정숙과 동생 박정옥의 집까지 가택수색을 하여 돈을 모두 압수하였습니다. 보위사령부 검열이 시작되었을 때 금철은 집에 있는 수십만 원의 중국 위안화를 잘 아는 지인에게 맡겼는데 그 지인이 겁이 나서 보위사령부 검열조에 그대로 가져다 바쳐서 오히려 그 죄가 더 커졌습니다. 보위사령부 검열에서 박정숙은 공개처형 당하기 전 공개재판에서 그의 죄행에 대해서 '공업품 소다를 식용소다로 넘겨다가 팔았다'고 했지만 이것 역시 거짓이었습니다. 박정숙은 죽기 전에 감방에서 그런 혐의에 대해 억울하다고 호소하였지만 변호사제도가 바로 서있지 않는 북한에서는 그의 말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처형된 홍옥도 40대 초반의 용모가 단정한 여성이었습니다. 그는 심양에 자주 다니면서 의복류들을 가져다가 팔았습니다. 보위사령부는 그에게도 장사밑천이 남조선안기부에서 대준 것이라며 중국에서 접촉했던 사람들을 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장사를 하여 자수성가한 대판장사꾼에 불과하였습니다.
강 책임자에게도 보위사령부 검열성원들은 식당건물에 사는데 들어간 돈의 출처를 자세히 조사하였고 중국에서 사사여행을 하면서 만났던 사람들에 대해 따지고 들었습니다. 식당을 사들이면서 남편의 친척이었던 전 베개봉호텔 지배인이 자기의 집을 내놓고 식당에 들어와서 요리사로 일하였는데 보위사령부 검열성원들은 그도 만나서 자세한 조서를 받아갔습니다. 고급요리사 경력을 가진 그는 아내와 함께 식당에 들어와서 만두를 빚는 일을 담당하였습니다. 북한의 전국요리경연에서 만두를 출품하여 그의 이름을 딴 '용후만두'가 상을 받을 정도로 요리에 조예가 깊었습니다. 그는 베개봉호텔 요리사에서 지배인을 거쳐 나이가 환갑이 지나자 은퇴하여 집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그는 호텔지배인을 하다가 차 사고로 한쪽다리를 절단하고 의족을 하고 있어 다니는 데는 불편해하였습니다. 용후지배인의 부인은 보천특산물식당 남편의 외삼촌어머니(외숙모)의 언니여서 식당건물을 사들이면서 자기 집을 내놓고 식당에 들어와 함께 살았지만 보위사령부 검열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불안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강 책임자는 그에게 앞으로 더 좋은 집을 해결해 주기로 약속하고 식당에서 함께 지내면서 일을 도와 달라고 부탁하였고 용후지배인 내외는 식당건물이 워낙 큰데다가 방들도 여러 개가 되어 뒷골방, 간부들이 식사하는 방에 거처하였습니다.
보위사령부 검열성원들은 용후지배인에게 찾아와 보천특산물식당 강 책임자가 뒷골방에서 접대하곤 하였던 간부들에 대해서도 자세히 조사를 하였습니다. 박정숙과 홍옥이 처형되기 며칠 전에 보위사령부 검열성원들은 "너희들이 함께 있으니 서로 조사를 피할 방법을 토론하는 것 같은데 이젠 서로 독감방에 가두어 두고 더 엄하게 조사를 해야 하겠다"며 강 책임자만 남기고 둘은 끌어내서 다른 방에 가두었습니다.
강 책임자에게는 한잠도 재우지 않고 조서를 받아내는 '부엉이 고문', 벽을 마주하고 종일 세워두는 '말뚝쥐 고문' 등 고통스러운 고문을 들이댔습니다. 박정숙이나 홍옥처럼 얼굴이 멍이 들 정도로 고문을 당하지 않은 데는 그의 외할아버지가 열사릉에 안치되어 있는 항일투사였던 것이 크게 좌우된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조사과정에서 적선(대한민국 안기부 돈을 받은 행위)이 밝혀지지 않았고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인정되어 석방되었습니다. 체포할 때처럼 석방되는 날에도 새벽에 검열성원들이 그를 데리고 식당에 왔습니다. 그들 중에는 양강도 보위사령부 검열을 총책임졌던 보위사령부 7처(국경처)부처장 김종은이도 함께 왔습니다. 그는 남편에게 "부인이 군관제대군인이어서 아직 사회생활이 익숙하지 않은데다가 나가자 정신만을 가지고 있어 잘 조절하도록 옆에서 도와주라"는 말을 남기고 가버렸습니다.
당시에 석방된 사람들 중에 다시 잡혀간다는 소문이 돌았고 감방에서 혼이 났던 강 책임자는 보위사령부 검열기간에 식당문을 닫고 피신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는 남편과 함께 밤에 몰래 먼 친척이 사는 양강도 갑산군의 시골에 들어가서 약 한 달 동안 보위사령부 검열이 끝날 때까지 숨어 지냈습니다.
지금도 북한은 김정은의 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보위사령부가 검은 마수를 뻗치고 주민들은 물론 고위급 간부들도 감시, 구금, 처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독재의 공포정치가 심해질수록 민심은 더욱 멀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김정은과 북한정권은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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