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동포 여러분, 2019년과 2020년에 북한을 탈출해 대한민국에 입국한 탈북민 200여 명을 대상으로 진행된 연구조사에서, 그들 중 70%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북한에서 손전화기를 사용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들은 당시 사용한 진달래, 푸른하늘, 아리랑 손전화기들은 밀수로 들어온 중국 손전화기와 품질이 유사할 정도로 나쁘지 않았다고 증언했습니다. 북한에서 초기에 출시되었던 손전화기는 막대기식, 밀기식이었고 그 이후로 접이식, 화면접촉수감식이 나왔다고 합니다.
전세계에서 손전화기가 처음으로 개발되어 출시된 것은 1983년이지만 당시의 손전화는 무게가 1.3kg이었습니다. 대한민국에는 서울올림픽이 진행된 1988년에 처음으로 국내에 출시되었습니다. 당시의 대한민국의 손전화기 역사를 기록한 마이크로택 9800X는 무게가 350g정도였습니다. 지금의 지능형 손전화기가 150g에서 200g인데 비하면 배로 더 무게가 나간 셈이죠.
대한민국에서 손전화기가 출시되어 사용하기 시작한 이후 20년이 지난 2009년 12월에 평양을 중심으로 북한에 손전화기가 일반인들에게 보급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최근 북한을 탈출해 대한민국에 입국한 탈북민들은 김정은 시대에 손전화기가 보급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나 북한에서 처음으로 손전화기를 도입한 시점은 전 세계가 손전화기 붐이 불고 있던 1995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북한은 나진선봉 경제특구를 내오면서 외국 투자자들의 해외통신을 보장해주기 위한 차원에서 타이(태국)의 록슬리(Loxley)그룹, 대만의 챠롱 타이웨어 앤 케이블(Charoong Thai Wire & cable), 핀란드의 텔테크(Teltech) 등 여러 외국회사와 무선전화봉사를 위한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당시의 북한의 조선체신회사의 합영회사로 등장한 동북아전화통신회사는 1998년에 나선 시에 무선호출 1,500회선과 휴대전화 500회선을 설치하여 개통하였죠. 이것이 북한 최초의 손전화기 봉사 서비스였습니다. 물론 당시 가입자는 외국인 투자자들로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이 소식이 평양 주재 외국대사관들에 알려지면서 이 무선통신 서비스를 평양에도 개설해줄 것을 요구하는 외교관들이 많아지자 북한당국은 2001년에 평양에 기지국을 설치해 대사관들에 무선통신 서비스를 하도록 결정했죠. 결국 2003년 9월까지 평양시와 각도 소재지들에 기지국을 설치하여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김정일은 외화자금 마련을 위해 일반인들에게도 손전화기 사용을 허용할 데 대한 지시를 비공개로 내렸습니다. 당시 북한당국이 제시한 가격은 가입비 750유로와 전화기 구매료 약 350유로, 합치면 1,100유로를 넘었습니다. 이 돈은 달러로 1,300달러, 중국위안화로는 8,500원을 넘는 비용이었죠. 평양에서 외교관들이나 잘 사는 재포들이 처음으로 이 비싼 손전화기를 사용하려고 구매했으나 지나치게 높은 비용으로 일반주민들은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일반인들에게 외국에서 수입한 손전화기를 처음으로 판매하기 시작해 6개월이 되던 시점인 2004년 4월에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열차 폭발사고로200여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계기로 손전화기 사용을 일체 금지시키고 각 기관에 보급하였던 전화기도 회수하였습니다. 당시 국가보위부에서는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김정일을 암살하기 위해 테러에 손전화기가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이러한 조치가 취해졌다고 내적으로 지시했다고 합니다.
더 이상 북한에서는 손전화기 사용이 재개될 수 없다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애급의 오라스콤텔레콤 회사가 북한에 지속적으로 4억 달러를 투자하는 조건으로 북한의 무선통신업을 재가동하는 협약을 체결하면서 2009년에 들어서면서 북한의 손전화기 재도입 시도가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협약을 체결하면서 나온 합작회사가 고려링크입니다.
2008년에 풍으로 쓰러졌던 김정일은 2009년 2월에 김정은을 공식 후계자로 등장시켰고 그 시점에 북한 내에서는 손전화기 사용을 위한 기지국설치가 진행되었습니다. 2010년에 153개의 기지국이 설치되었고 이 기지국을 통해 평양을 중심으로 평성, 남포, 해주, 사리원, 개천, 안주 등 7개 도시에 먼저 손전화기 봉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국경지역이나 분계연선지역을 제외한 평양을 중심으로 이 7개 지역이 손전화기 봉사를 시작한 것은 한마디로 시험 차원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이나 전 세계의 모든 나라들에서는 손전화기로 국제전화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다른 나라의 정보나 외국영화도 지능형손전화기로 볼 수 있지만 오직 북한만은 다른 나라와는 폐쇄된 채 북한 내에서만 제한된 정보를 주고받습니다.
김정은의 지시로 이런 지역들에서 손전화기로 외부정보를 철저히 막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검토한 이후에야 국경지역과 분계연선지역에 대한 손전화기 봉사를 시작하도록 했던 것이죠.
2011년에는 손전화기 사용자가 100만 명을 넘어섰고 2017년에는 거의 4백만 명이 가입했습니다. 그리고 2018년에는 손전화기 누적 판매량이 600만대로 알려졌고 기존의 고려링크 외에도 강성네트, 별 등 여러 무선통신운영업체가 생겨났습니다. 북한에서 더 이상 장마당을 폐쇄할 수 없듯이 주민들의 손전화기 사용을 금지시키기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주장입니다.
청취자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것처럼 북한주민들이 말하듯이 지금 북한에는 노동당과 장마당, 두 개의 당이 있다고 하죠. 그런데 장마당을 통제하려는 김정은과 노동당은 쉽게 이를 밀어붙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장마당을 통해 하루하루 장사를 해서 살아가는 북한주민들의 숨통을 막으면 그 후과는 고스란히 김정은과 노동당 지도부에 쏠리고 이것이 민주화혁명으로 폭발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를 수 없겠죠.
손전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사를 하면서 살아가는데 절실히 필요한 손전화기는 이제는 북한주민들에게도 없어서는 안될 필수품이 되었다고 할 수 있죠. 더구나 여행증명서가 있어야 타 지역으로 갈 수 있는 북한 실정에서 무선으로 대기의 전파로 북한 내에서라도 정보를 주고받는 손전화기를 김정은이 빼앗는다면 이것은 아랍의 봄처럼 독재체제의 붕괴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김정은이 모를 리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손전화기 사용자의 증가에 따른 외부정보를 막고 감시통제를 하기 위해 기구를 늘이는 방식으로 김정은은 대응했습니다. 2017년 이후에 나온 지능형 손전화기들인 아리랑171, 진달래3, 푸른하늘S1 등 새로 나오는 손전화기가 외부정부와 철저히 차단되도록 내부 장치들을 설계·제작하도록 했고 도청과 감시를 강화하도록 했습니다.
탈북민들은 대한민국에 입국하여 처음으로 지능형손전화기를 구매하여 사용합니다. 대한민국의 손전화기는 전 세계와 연결된 인터넷에 접속해 다양한 검색을 할 수 있습니다.
탈북민들이 대한민국에 입국하여 처음 검색하는 단어가 ‘소련군 출신 김일성’, ‘김정일의 부인들’, ‘김정일의 맏아들 김정남 독살사건’, ‘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등입니다.
저도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인터넷으로 이런 단어로 검색하고는 지금까지 저들을 속인 북한 노동당 선전선동부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 없었습니다. 김일성이 1941년부터 해방되던 1945년까지 소련군 대위로 복무했다는 사실, 김정일의 고향이 러시아 하바롭스크 소련군 병영 군관가족 마을이었고 정일봉과 백두밀영은 가짜라는 사실, 김정은은 김정일의 5명의 부인 중에 네 번째 부인인 고영희의 둘째아들이라는 사실, 김정은이 2016년 자기의 의붓형인 김정남을 독살해 죽인 살인마라는 진실 등을 알게 되었습니다.
김정은과 북한당국은 지금도 이러한 진실을 감추려고 손전화기도 북한 내의 정보에만 국한시키려고 하고 외부정보와 단절하려고 하지만 사람은 통제하고 막을수록 호기심이 발동하여 더 알려고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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