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들의 말로(1) -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시 외곽의 공동묘지에 있는 초라한 차우셰스쿠 묘지.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시 외곽의 공동묘지에 있는 초라한 차우셰스쿠 묘지. (RFA PH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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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오늘날 인류사회에서 가장 잔인하고 반인민적인 독재자를 꼽으라고 하면 김정은이 단연 첫 자리에 차지한다는 사실은 청취자 여러분들도 잘 아실 거라고 봅니다.

그리고 지구상에 21세기에 들어와서 가장 지옥 같은 독재국가를 꼽으라면 북한이 유일합니다. 영국의 인터넷 홈페이지인 ‘월간 독재자(Dictator of the month)’에 실린 역대 독재자 순위에서 김일성과 김정일, 김정은이 파쑈 독일의 히틀러, 구소련의 스탈린, 중국의 마오쩌둥, 유고슬로비아의 요세프 브로즈 티토, 일본 도조 히데키, 루마니아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이라크 사담 후세인, 필리핀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등과 함께 가장 높은 순위에 속한 독재자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몇 시간에 걸쳐 이 독재자들의 반인민적이고 반인륜적인 행위들에 대해, 그리고 그들의 마지막 처참한 말로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오늘 첫 시간에는 김일성과 가장 친분관계가 깊었고 북한에도 자주 와서 김일성의 독재수법을 배워 루마니아를 지옥 같은 세상으로 만든 대가로 인민의 준엄한 심판을 받았던 전 루마니아 대통령이자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니콜라이 차우셰스쿠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도 인터넷으로 ‘니콜라이 차우셰스쿠의 최후’라고 검색하면 1989년 12월 루마니아 인민들로부터 심판을 받아 부인 엘레나 차우셰스쿠와 함께 총살당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김일성보다 나이가 6살 어렸던 니콜라이 차우셰스쿠는 1967년 12월부터 루마니아 국무회의 의장을 시작으로 대통령, 공산당 총서기 등 주요직책을 역임하면서 42년 동안 독재자로 군림했었죠.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니콜라이 차우셰스쿠는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의 학대를 피해 수도 부쿠레슈티로 갔고 공산당에 입당하였습니다. 그 후 파업과 공산당 선동분자로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면서 열렬한 공산주의자로 전락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루마니아에 공산국가가 세워지면서 니콜라이 차우셰스쿠에게는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1965년 루마니아 초대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게오르기우데지가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서기장이 된 니콜라이 차우셰스쿠는 자기의 반대세력들을 탄압, 학살하면서 권위적인 독재자의 본색을 드러냈죠.

그리고 북한과 중국을 방문하면서 북한의 8월 종파숙청,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통해 대대적인 숙청으로 독재체제를 구축한 김일성과 모택동의 행보를 본 니콜라이 차우셰스쿠는 그 숙청수법을 루마니아에도 적용했습니다.

니콜라이 차우셰스쿠가 북한을 방문해 배운 정적 숙청수법 중에는 도청수법이 있죠. 지구상에 주민들을 상대로 도청이 마음대로 하도록 허용되는 나라는 북한이 유일합니다. 국가보위부에 존재하는 도청부서들은 간부들이나 체제위험인물로 인정되는 사람에 대해서는 집이나 사무실들에 도청기를 설치하여 동태를 항시적으로 감시하고 있죠. 그리고 유선전화는 물론 손전화마저 도청하면서 적대적인 인물들을 감시통제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대다수 나라들에서는 도청을 못하게 법으로 규정하고 있어 만약 누가 도청을 한 것이 밝혀지면 그가 대통령이라도 감옥에 가야 합니다. 북한의 도청수법을 그대로 답습한 니콜라이 차우셰스쿠는 전국의 1,000여 개의 도청 기구를 내오고 여기에 300만대의 도청기를 보급해 주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게 했습니다. 북한의 보위부처럼 루마니아에도 동네와 직장들에 잠입해 서로 감시를 하도록 하였고 의심되는 사람들은 무자비하게 잡아들여 처형했습니다.

감시인원을 늘리면서 주민들을 감시, 통제하는데 국고가 탕진되어 경제도 점차 어려워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루마니아를 경찰국가라고 비난한 것은 우연한 말이 아니었죠. 니콜라이 차우셰스쿠가 북한을 방문하고 나서 루마니아에 도청수법 이외에도 대집단체조, 인민궁전 등을 도입했습니다.

현재 김일성과 김정일의 시신이 보관되어 있는 금수산태양궁전이 김일성의 생일 65돌이 되던 1977년에 건설되었고 당시의 명칭은 금수산의사당, 혹은 주석궁전으로 불렸습니다. 북한을 방문하여 주석궁전을 본 니콜라이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의 수도인 부쿠레슈티에 초대형 집무실을 건설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700여 명의 설계가들이 설계에 달라붙었고 책임(수석) 설계사로 안카 페트레스쿠(Anca Petrescu)가 임명되었습니다. 이 건물은 높이가 85m, 길이가 270m, 너비가 240m입니다. 루마니아에서 현재 이 초대형 건물을 인민궁전 혹은 국회궁전(Palatul Parlamentului)이라고 부릅니다. 건물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이곳을 방문한 관광객들은 1시간동안에 전체 건물의 5%도 볼 수 없었다고 할 정도입니다.

1971년에 북한을 방문한 니콜라이 차우셰스쿠는 김일성경기장(당시 모란봉경기장)에서 진행된 대집단체조를 보고 놀랐고 루마니아에도 이 같은 집단체조를 창작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북한의 집단체조 안무가들과 전문가들이 루마니아에 가서 그들의 집단체조 창작을 도와주었고 배경대와 다양한 장이 펼쳐지는 대 집단체조가 루마니아에도 탄생했습니다. 1971년 방북 당시 김일성과 니콜라이 차우셰스쿠 사이에 했던 담화내용이 공개돼 두 독재자들 사이의 친분관계와 오갔던 대화내용들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죠.

루마니아는 1980년대에 북한과 같은 독재체제로 감시와 통제, 인권탄압을 일삼고 우상화정책과 선전선동에 들어간 막대한 자금을 탕진해 경제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80년대 말에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동유럽 국가들의 공산체제 붕괴와 때를 같이하여 루마니아 자유민주혁명이 발생하였습니다.

1989년 12월 16일 루마니아의 국경도시인 티미쇼아라에서 첫 민중시위가 발생했고 시위대를 진압하려고 발포한 포탄과 총탄으로 사상자들이 발생했습니다. 12월 21일에는 수도 부쿠레슈티에도 민중집회와 시위가 확산되면서 전국으로 반정부 투쟁이 퍼져나갔습니다. 군인들과 경찰들도 인민의 편에 서서 니콜라이 차우셰스쿠의 ‘ 위대’ 보안군과 격렬하게 싸웠습니다.

12월 23일 오후 6시에 농업박물관에 숨었던 차우셰스쿠 부부는 체포되었고 그 이틀 뒤인 12월 25일에 총살형에 처해졌습니다. 구 루마니아 공산당 당사 앞 광장 인근에는 당시 혁명시위과정에 희생된 277명의 시신이 안치된 ‘혁명영웅의 묘역’이 있습니다. 희생자의 대부분이 20대 청년들이었죠. 그들의 피의 대가로 42년의 공산독재, 경찰국가였던 루마니아가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변모될 수 있었습니다.

12월 25일 성탄절(크리스마스)에 차우셰스쿠 부부는 처형되었지만 그의 두 아들과 딸은 처형되지 않았습니다. 맏아들 발렌틴 차우셰스쿠(Valentin Ceaușescu)는 정치인이 되어 후계자가 되기를 바라던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고 핵물리학자로 되었고, 딸 조이아 차우셰스쿠(Zoia Ceaușescu)도 수학을 전공한 자연과학자(이공계 학자)로서 아버지의 독재정치방식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처형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둘째아들 니쿠 차우셰스쿠는 형과 누나처럼 아버지의 독재에 대해 반항하지 않았고 공산당 주요직책에 올라 후계자 수업을 받았기에 징역 20년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도 루마니아 인민들에게 직접적으로 인권탄압을 했거나 처형한 적이 없다는 것이 고려되어 징역 5년으로 감형을 받았습니다.

니콜라이 차우셰스쿠가 처형되면서 가장 놀랐던 것이 김일성과 김정일이었습니다. 당시 루마니아는 미국영화를 비롯해 외부의 소식들을 주민들에게 어느 정도는 허용했습니다. 김정일은 이것을 차우셰스쿠의 가장 큰 실수로 보고 외부정보의 완전한 차단을 지시하였고 현재 지구상에 북한주민들만 우물 안의 개구리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시간들에는 역대 독재자들의 말로를 이어서 얘기하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서 마칩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