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동포 여러분, 지난 시간에 북한에서 1차 5개년 계획이 1년 반 만에 조기 종료되고 1960년에 완충기가 선포되게 된 이유가 소련공산당 흐루시초프의 대북원조에 대한 불만으로 조소관계가 악화되면서 일어난 것이라는데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북한당국은 전후복구건설과 사회주의 공업화 건설을 중국보다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에 더 많이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956년 8월 종파사건을 전후로 북한당국은 중국과 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됩니다.
오늘은 당시 중소갈등, 한마디로 말하여 중국과 소련의 대립상황을 북한당국이 교묘하게 이용하면서 원조를 이끌어 냈던 양면정책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가 중국공산당에 패하고 모택동(마오쩌둥)에 의해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면서 내놓은 외교정책은 국제사회에서 자국의 이익과 가치를 스스로 추구하는 독립자주정신과 생존을 위한 확고한 안전보장의 유지, 중국 전 영토의 통일, 강력한 사회주의 국가를 위한 경제발전, 평화공존의 견지 등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중국 만주로 이주한 조선사람(한국인)이 약 39만 명이었고 이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중국공산당 소속의 팔로군에 복무하면서 국공내전에 참여했습니다. 모택동이 중국공산당의 승리와 중국 건국에서 조선사람들의 역할이 컸다고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해방이 되자 김일성은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사람들 중에 인재들을 귀국시켜 건국사업에 동원시키려고 중국정부와 교섭했습니다.
1946년 8월에 동북군정대학 동만분교에서 재학 중이던 300여 명의 학생들이 북한으로 귀국했고 길림분교에서 1947년 5월에는 50명, 7월에는 졸업생 중 100명이 북한으로 귀국하였습니다. 이들이 194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 창건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당시 소련공산당은 인민군이 창건을 계기로 북한에 소련제 무기를 제공해 주었는데 이런 이유로 중국인민해방군에 비해 북한 인민군 장비가 더 좋다는 소문이 중국내 조선족 군인들에게도 퍼졌습니다. 결국 중국인민해방군 내 조선인 병사들의 귀국열망이 높은데다가 북한당국의 요구가 있었기에 중국공산당은 조선인 병사들의 귀국을 동의하였습니다. 당시 중국인민해방군에서 북한으로 귀국한 조선인 병사는 4만 7,764명이었습니다.
중국공산당이 국공내전을 마치고 1949년부터 6.25남침전쟁 전까지 조선인 군부대 3개 사단 병력이 북한으로 귀국하였고 전쟁의 주력부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전쟁 전 북한에는 정규군이 13만 5천 명이었고 남한에는 9만 8천 명의 군경이 대치되어 있었는데 북한군에 소속된 조선족 군인들은 중국 국공내전에서 싸움을 치른 전문군인들이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미군의 인천상륙작
전으로 북한군이 위기에 처하자 모택동은 중국인민해방군 100만 대군을 북한에 보냈습니다.
북한당국은 중국의 관계에 대해 항일전쟁, 국공내전, 한국전쟁을 통해 형성된 형제적인 국가, 순치의 관계라고 칭했고 순망치한(脣亡齒寒)으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순치는 이발과 입술관계라고 뜻이고 순망치한은 입술이 상하면 이발이 시리다는 뜻입니다.
6.25남침전쟁에 중국인민해방군 개입이 없었더라면 북한은 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전후 중국의 경제형편은 매우 어려웠던 탓에 북한의 건국에 적극적인 도움을 줄 수 없었고 당시 북한당국은 중국보다 소련에 더 크게 매달렸습니다.
소련공산당 총서기인 흐루시초프는 1956년 2월에 진행된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스탈린의 개인숭배를 비판하였고 기존에 소련공산당의 대외정책을 수정하는 내용의 정책들을 발표하였습니다. 그는 ‘현 국제정세의 기본 문제’에 관한 보고서에서 스탈린의 ‘자본주의 포위론’과 ‘전쟁불가피론’을 비판하고 획기적인 ‘평화공존’을 제시하였습니다. 흐루시초프는 “제국주의가 존재하는 한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한 마르크스-레닌의 교시를 수정하여 “전쟁은 숙명적으로 피할 수없는 것이 아니며 제국주의와 평화공존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건국 이후 스탈린 의 대외정책과 국가건설노선을 추종해온 모택동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중국공산당이 흐루시초프의 수정정책을 반대했고 중국과 소련의 갈등은 극에 달했습니다. 김일성은 중국과 소련이 갈등을 빚고 있는 것을 이용하여 두 나라가 서로 대북지원을 경쟁적으로 하도록 양면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중국정부는 1958년 8월에 미군의 대만(타이완)철수를 주장하면서 금문도(金門島)와 마조도(馬祖島)를 포격하자 소련당국은 약속했던 소형 핵무기 모형 제공을 철회하였습니다. 그리고 중국당국은 1959년 8월 말에 있던 중국과 인도 국경분쟁에서 소련정부가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자 이에 대해 강하게 비난하였으며 이로서 중소분쟁은 더 첨예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중국과 소련 사이에는 10월혁명 42돌이 되는 1959년 10월에는 이념 논쟁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1960년에 이르러서는 공개적인 논쟁으로 번졌고 중국으로 하여금 새로운 국제관계를 모색하도록 했습니다.
소련과의 대립관계가 심해지는 상황에서 일본과 한국, 대만에 주둔한 미군에 대한 부담감은 더 커졌고 중국의 국가안보를 위해 북한이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에 놓인 국가라는 것이 부각되었습니다. 당시 중국정부는 소련과 주도권 다툼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으로부터 지지 획득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모택동은 지난시기에 인정하지 않았던 김일성의 북한 내 권력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1961년 7월에는 중국과 북한사이에 ‘북·중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이 체결되었고 그 이후 북중 두 나라는 국제사회에서 서로의 지지를 드러냈습니다. 소련정부는 북한이 중국과 가까워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볼 수만 없었습니다. 중국당국의 북한에 대한 원조 제공과 김일성의 친중적 태도는 오히려 소련과 북한 간의 장기원조와 무역협정 체결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이 주장입니다.
소련정부는 1961년부터 1967년까지 북한에 기술원조를 제공하는 협정과 장기적인 무역협정을 체결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소련정부가 북한에 준 원조는 제한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소련정부는 동유럽 국가나 중국, 북한 등 사회주의권 국가에 대한 원조나 지원을 함에 있어서 모든 나라들에 일률적으로 지원하는 것을 피했습니다. 소련당국은 대외원조를 제공함에 있어서 산업화가 발달하지 않은 나라에 한해서는 공장이나 중공업 발전을 위한 원조보다 경공업이나 생필품 지원을 하는 것을 원칙으로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소련정부는 중국의 북한과의 친교를 견제하기 위해 핵기술을 이용한 북한 원자력 협력을 약속했고 1962년과 1963년에 협력을 재개하였습니다.
1964년 소련에서 흐루시초프가 실각되고 브레즈네프가 총비서로 되자 북한당국은 소련 신지도부에 기대를 가지고 친소정책을 실시했습니다. 특히 1966년부터 시작된 문화혁명기간에 중소갈등은 극에 달했는데 당시 김일성은 모택동과 브레즈네프 사이의 중재를 나서기도했으나 오히려 중국당국은 이를 수정주의적 행동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이에 맞서 북한당국은 중국정부에 대해 교조주의라고 비난하기에 이르렀고 북한과 중국 사이에도 갈등이 빚어지게 되었습니다.
북한당국은 흐루시초프의 평화공존론과 개인숭배비판이 국내정치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 중국공산당의 대외정책에 동조하였으나 소련의 지원으로 친소적인 대외정책을 비난하자 중국당국을 교조주의로 매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북한당국은 소련과 중국, 어느 한 나라에 지나치는 것을 피하고 줄다리기 양면정책을 해왔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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