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동포 여러분, 오늘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전 루마니아 차우셰스쿠의 처참한 말로에 이어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의 비참한 죽음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김정일보다 4살 나이가 더 많았던 사담 후세인은 자신의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무차별적인 숙청과 처형을 한 것으로 하여 ‘김정일과 흡사한 살인독재자’로 잘 알려진 인물이죠.
사담 후세인은 1937년 4월 28일에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에서 북쪽으로 약 180km 떨어진 지방도시인 티그리트의 한 농가에서 유복자로 태어났습니다. 사담 후세인이 태어난 후에 어머니인 수브하 탈파는 목동인 이브라힘 하산과 재혼하여 3명의 배다른 동생을 낳았습니다.
사담 후세인은 10살 때부터 의붓아버지와 의붓동생들이 사는 집에서 나와 외삼촌 하이랄라 탈파의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외사촌 여동생인 사지다 탈파와 결혼하여 2남 3녀를 보게 되죠. 사담 후세인은 1986년에는 두 번째 부인인 사미라 샤반다르와 재혼해 아들 알리 후세인을 보게 되고 53살이 되던 1990년에는 세 번째 부인인 니달 알함다니와 재혼하였습니다.
1957년 아랍사회주의 부흥당인 속칭 바트당에 입당한 사담 후세인은 1959년에 당시 이라크 대통령이었던 카셈 암살미수에 관여했다가 경호원들이 쏜 총탄에 맞아 다리에 부상을 당하지만 유목민으로 변장한 뒤 시리아로 망명하였습니다. 그가 시리아에서 망명하고 있던 시기에 이라크에서는 피고인이 출석하지 않고 진행되는 궐석재판이 열렸는데 이 재판에서 사담 후세인은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시리아에서 이집트로 망명 거처를 옮긴 사담 후세인은 카이로대학 법학부를 재학하였습니다. 1963년에 알레프 장군이 주도한 쿠데타로 카셈 정권이 붕괴되자 당시 사담 후세인은 귀국해 바트당의 농민국장이 되었고 그 다음해인 1964년에는 알레프 대통령 암살 계획을 세웠지만 실행하지 못하고 발각되어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2년 만에 간수를 속이고 탈옥하여 지하활동을 벌리면서 1968년 7월에 아흐마드 하산 알 바크르 장군이 주도한 무혈 쿠데타에 참여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죠. 바르크 장군이 쿠데타로 이라크 정권을 장악하고 대통령이 되고 1969년에 사담 후세인은 혁명지도평의회(RCC) 부의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혁명지도평의회 부의장으로, 바트당의 지도자로 된 그는 새로운 치안기관과 정보기관을 설립하였고 그 기관의 책임적인 위치들에 자기의 측근들과 친척들로 임명했습니다. 이라크에 처음으로 북한의 보위부와 보위사령부, 보안성과 같은 비밀경찰과 치안군이 생겨났고 경찰국가로 변모된 이라크에서는 숙청과 처형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또 이라크 정부의 고위 간부직에도 동향의 친인척들을 등용하면서 권력 내부에서도 반 사담 후세인 기류가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흡사 김일성이 1950년대 중반에 종파숙청을 통해 적대세력들을 숙청했던 것과도 같았습니다. 이에 반기를 든 시아파 출신 나짐 카자르 내무치안장관은 1973년 6월에 바크르와 사담 후세인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지만 사전에 유출되어 관련자 전원이 사형에 처해지기도 했죠.
쿠데타로 11년 동안 이라크를 통치하던 아흐마드 하산 알 바크르 대통령이 65살이 되던 1979년에 병환으로 사임하자 1977년에 이라크 부통령으로 임명되었던 사담 후세인이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사담 후세인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1979년 이라크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이란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입헌 군주제 국가였던 팔레비 왕조가 무너지고 새로운 이슬람공화국이 세워졌습니다. 이란 팔레비 독재국가가 시민혁명으로 무너지는 것을 목격한 사담 후세인은 1980년 9월 22일에 이란을 침공하여 이란혁명지도부를 압살하기 위해 전쟁을 개시하였습니다. 이란에서 정권을 잡은 이슬람 혁명세력의 중동지역에서의 이슬람 세력 확장에 대항하기 위해 국제사회는 이라크에 대한 군사적인 지원을 하게 되었고 이라크의 군사력은 급속히 팽창되었습니다.
당시 중동지역 석유 이권을 가지고 있던 영국이나 프랑스, 그리고 카프카스 지방 등에 많은 이슬람교도를 안고 있던 구소련 정부 역시 이란에서 벌어진 이슬람 혁명세력의 중동확장을 우려해 이라크에 무기를 제공했고 사담 후세인은 미국과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여러 나라의 군수기업들로부터 화학무기와 생물무기 원료들을 수입하였습니다. 이란과의 전쟁이 한창이던 1982년에 사담 후세인이 이라크 중부 두자일 마을을 시찰하던 중 이란의 지원을 받고 있던 반 사담 후세인 파가 암살을 계획하지만 실패하게 되고 사담 후세인의 명령으로 두자일 마을주민 180여 명이 화학무기로 처형되었습니다. 당시 사담 후세인이 수입했던 화학무기가 사용된 것이죠. 결국 1988년에 이란 측이 정전을 수락하여 전쟁은 끝나게 되었습니다.
9년에 걸친 전쟁에서 이라크는 군사대국으로 변모되었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이라크 경제를 일으켜 세우려고 인접국가인 쿠웨이트에 눈을 돌렸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은 세계지도를 보면 ‘페르시아 만’, 일명 ‘걸프 만’이라고 부르는 해안으로 쿠웨이트가 막고 있어 이라크는 마치 내륙 국가처럼 보일 것입니다.
사담 후세인은 국내에서 생산되는 원유를 수출하거나 해외에서 반입되는 수입물자들이 쿠웨이트 때문에 어렵다는 이유로 1990년 8월에 쿠웨이트를 침공했죠.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반대하여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이라크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을 강행해 이라크 군은 전쟁에서 패배의 쓴 고배를 마시게 되었습니다.
사담 후세인이 집권해 이란과 쿠웨이트와의 전쟁을 일으킨데 대한 반발로 이라크의 시아파 세력이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기 위한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에 성공한 사담 후세인의 소위 ‘반역자’들에 대한 보복은 처참했습니다.
전쟁과 흉년, 국제사회의 제재로 피해는 고스란히 이라크 국민들에게로 돌아갔습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라크 국내에서는 반정부투쟁, 사담 후세인 퇴진운동이 벌어지고 자국 내 국민들의 인권을 무참히 짓밟는 독재국가들인 이라크와 북한, 이란에 대해 2002년 1월에는 당시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은 ‘악의 축’이라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2002년 10월에 비민주주의 선거방식으로 또다시 대통령에 재선된 사담 후세인은 국제테러를 정당화하면서 독재자의 살인적 기질을 드러내자 2003년 3월 20일, 미국은 유엔 안보리 결의 1441호를 근거로 이라크 전쟁을 개시하여 40여일 만인 5월 1일에 이라크 독재정권을 붕괴시켰습니다.
독재자 사담 후세인은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은신하였으나 그해 12월 13일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2006년 12월 30일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에서 처형되었습니다. 독재자 사담 후세인이 처형되게 된 죄 항목으로는 24년간의 철권통치, 북한 보위부 같은 비밀경찰을 통한 주민 학대, 동상과 초상화 등 개인 우상화로 사상의 자유를 유린한 죄, 숙청과 공개처형을 통한 공포정치, 고문 합법화 등이었습니다.
북한의 김정일 독재체제처럼 이라크에도 영구적인 독재체제를 꿈꿨던 사담 후세인은 자신을 찬양하는 노래도 200여 곡을 창작하여 부르도록 했고 군대와 경찰, 보위부 등 군사, 사법기구들을 모두 거머쥐고 현대판 독재자로 군림했지만 종말은 인민의 준엄한 심판을 면치 못했습니다. 사담 후세인의 딸들은 전쟁을 전후로 망명했지만 두 아들인 우다이 후세인과 쿠사이 후세인은 2003년에 사살되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독재자들은 준엄한 인민의 심판을 면치 못한다는 것은 역사의 진리입니다. 김일성과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진 북한의 독재체제는 세상에서 가장 반인륜적이고 반국가적이며 반인민적인 살인독제체제입니다. 김정은은 자기의 자식으로 이어진 영원한 김씨 왕족의 세습독재를 꿈꾸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고 북한주민들 모두 마음 편히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권좌에서 물러나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