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들의 말로(3) – 리비아 카다피

0:00 / 0:00

북녘 동포 여러분, 2011년은 지구상에서 두 명의 독재자가 천벌을 받았던 해입니다. 한 명은 북한의 독재자 김정일이고 다른 또 한명은 리비아의 전 독재자 무아마르 알 카다피입니다.

카다피는 1942년 6월 7일에 북아프리카의 유목민족인 베르베르인 부모들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북한에서 주장하는 김정일의 출생연도인 1942년과 같은 해에 태어나 2011년 같은 해에 사망한 것으로 하여 ‘한 시대를 같이 한 두 독재자의 운명’이라는 표현이 적중할 것 같습니다.

사막의 나라 리비아의 유목민 부모의 슬하에서 성장한 카다피는 리비아의 두 번째 큰 도시인 벵가지시의 리비아대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카다피가 유년시절이었던 1951년에 이탈리아 식민지였던 리비아는 독립되었고 이드리스 1세가 이끄는 리비아 연합왕국이 탄생했습니다. 영토의 대부분이 사막으로 덮여 있는 리비아는 19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아프리카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였죠. 그러나 1959년에 유전이 발견되었고 원유생산량이 급격히 많아지면서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로 역전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아닌 구세기적인 왕정국가인 탓에, 석유수출로 나라는 부유해졌지만 부의 절대다수는 소수의 특권족속들의 소유물로 전락되었고 빈부격차가 더 심해졌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은 지금의 구세기적인 김 씨 봉건왕조국가에서 여러분들이 겪고 있는 부익부, 빈익빈의 비참한 처지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 될 것입니다.

21살이 나던 1963년에 리비아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카다피는 재학당시 동창생들과 함께 왕정타도를 목표로 혁명을 구상하게 되고 ‘자유장교단’을 결성하였습니다. 1965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카다피는 육군 통신소위로 임명되었고 1년간 영국에 유학 겸 파견근무를 가게 되었습니다. 리비아대학교, 육군사관학교, 영국 군사유학 등 최고의 고등교육을 마친 카다피는 27살 나던 1969년에는 육군 대위로 진급하였고, 당시 리비아 국왕이었던 이드리스 1세가 리비아를 떠나 터키에서 병 치료를 받고 있던 9월에, 동료 장교들과 함께 수도 트리폴리를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쿠데타에 성공하게 됩니다.

권력욕에 들떠있던 27살의 카다피는 왕조국가가 아닌 공화국을 세워 리비아 전 국민이 골고루 사는 나라를 만든다며 쿠데타를 일으켰으니 처음에는 누구나 이를 환영했던 것이죠. 쿠데타로 물러난 리비아 국왕 이드리스 1세는 왕위에서 쫓겨나 터키에 망명했고 카다피는 리비아 군 총사령관으로 리비아를 자기의 손 안에 거머쥐었습니다. 북한 같은 영원한 세습독재 정권을 꿈꿨던 카다피는 지구상에서 가장 잔인한 세습독재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북한식의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청취자 분들은 1982년 10월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을 만났던 리비아의 독재자 카다피의 평양방문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당시 저는 김일성종합대학 2학년에 재학 중에 있었는데 카다피의 평양방문 환영행사에 꽃을 들고 참가했었습니다. 자신이 쿠데타를 일으켰던 9월을 기념해 ‘위대한 9월 혁명의 지도자’라는 직함을 가지고 평양을 방문한 그의 군복차림은 북한주민들에게는 이례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당시 중앙당 선전선동부 강연과에서 나온 강연강사는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 앞에서 “리비아의 위대한 모하메드 알 카다피 9월 혁명의 지도자는 중동국가에서 유일하게 미국과 맞서 당당하게 큰소리치면서 싸우는 국가원수(元首)”, “리비아는 중동지역의 또 다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같은 존재”. “대외정책수립에서 어려움을 겪으면서 갈 길을 몰라 갈팡질팡하던 리비아 국가영도자 카다피의 북한방문은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배워 리비아를 북한처럼 변모시키기 위한 것” 등의 내용으로 연설했습니다.

북한을 방문한 카다피는 공포정치와 일당독재, 선전선동전략으로 주민들을 현대판 노예로 만들어 놓고 마음대로 권력을 행사하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반인륜적인 독재방식에 매력을 느끼고 자신을 사회주의자로 자처하면서 자유민주주의적인 방법이 아닌 프롤레타리아 인민독재방식으로 국가를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이나 대한민국을 비롯한 선진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에서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비롯한 국가 정치권력을 한번에 4~5년 임기를 하고 다시 선거를 하도록 하고 있으며 대통령도 2번 이상은 못하도록 법으로 규제하고 있습니다. 장기권력은 독재자를 낳게 되고 독재자로 되는 순간부터는 자기의 철권통치를 위해 무자비한 반인륜만행을 저지르게 됩니다.

카다피는 국호도 ‘대리비아 아랍사회주의 인민 자마히리야국’으로 승격시켰습니다. 여기에서 ‘자마히리야’는 ‘인민공동체’를 뜻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정치이념에 대해 저서 ‘녹색서’에서 직접민주주의, 아랍민족주의, 사회주의, 이슬람주의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위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아마르 알 카다피는 권력의 걸림돌이라고 생각되는 대상들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과 처형을 일삼았습니다. 쿠데타를 함께 했던 소위 ‘혁명동지’들마저도 권력세습에 걸림돌이라고 생각되면 무자비하게 숙청해 자기의 1인 독재체제를 구축했던 것이죠.

그는 나라의 석유자원을 철저히 장악해 자기의 측근들에게 부를 집중시켰고 일반 주민들에게는 그들이 불만을 해소하는 차원에서 매달 정기적인 자금을 제공했습니다.

북한보다 면적이 14배나 크면서도 인구는 북한인구의 4분의 1 수준인 리비아는 석유매장량이 많아 그것을 수출한 돈으로 주민들에게 막대한 돈을 제공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지금 탈북민들 중에는 리비아에 건설노동자로 파견되었다가 망명하여 대한민국에 입국해 살고 있는 분들이 여러 명이 됩니다. 북한당국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리비아에 의사들과 건설노동자들을 대대적으로 파견했고 그들이 번 외화로 석유를 사들였습니다.

북한 같은 독재국가였던 리비아는 그래도 북한처럼 가난한 거지국가는 아니었습니다. 석유자원이 많다보니 카다피는 그것을 수출하여 리비아 주민 1인당 한 달에 약 1천 달러에 달하는 돈을 지급했죠. 5인 가족이면 한 달에 약 5천 달러를, 국가가 일을 하지 않아도 제공한 셈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배부르다고 해서 독재를 묵인하지는 않죠.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동지역의 독재국가들에서는 ‘아랍의 봄’이라는 민주화혁명이 일어나면서 2011년 2월에 리비아에서도 반정부, 민주화투쟁이 벌어졌습니다.

카다피는 내전을 선포하고 정부군을 내세워 미사일까지 동원하여 1천여 명의 시민군들을 무자비하게 사살하자 유엔안전보장이사회 결정으로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다국적 무력이 카다피 독재정권 붕괴를 위해 군사력을 동원하였습니다. 2011년 8월에 리비아 독재정권은 붕괴되었고 카다피와 일가족은 도망자의 신세로 이곳저곳으로 피해 다녔습니다.

유엔은 모든 나라의 공항을 통해 카다피가 들어오면 체포할 것을 결정하자 리비아 국내에서만 숨어 다니던 카다피는 결국 2011년 10월 20일 하수도에 숨어 있다가 시민군에 발각되었고 한 시민군에 의해 처형되었습니다. 지금도 인터넷에 ‘리비아 카다피 처형’이라는 제목으로 검색하면 머리와 복부에 총을 맞고 처형된 당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독재자 카다피의 두 번째 부인 사피아가 낳은 7남 1녀 중 세 아들도 사살 당했고 세 명은 망명, 2명은 행방불명된 상태입니다.

42년 동안 리비아 인민들의 머리위에 군림하면서 무소불위의 독재를 해오던 살인독재자 카다피의 죽음은 김정일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카다피가 죽은 한 달 후에 김정일도 급사했습니다. 독재자들의 죽음은 이렇듯 항상 처참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만큼 그들이 손에 피를 많이 묻혔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