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중국정부의 대북원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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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지난시간에 중국정부가 북한의 전후복구건설을 위해 제공했던 대북 무상원조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 중국정부의 대북지원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이 혁명역사시간에 배웠던 전후복구건설을 현명하게 영도했다는 김일성의 업적은 소련과 중국 등 다른 나라들로부터 받았던 원조가 없었다면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수령의 영도가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들로부터 제공받은 원조덕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나라들이라고 계속 공짜로 북한이 요구하는 대로 원조를 무상으로 제공할 수 없었습니다.

대외원조는 돈으로 제공하는 자금원조와 물자나 설비, 기술 등을 제공하는 일반원조로 나뉩니다. 자금원조인 경우에도 원금과 이자를 모두 돌려받지 않는 무상원조와 이자없이 원금만 받는 무이자 차관, 국제평균이자보다 낮게 이자율을 책정한 우대차관으로 나뉩니다. 다른 공산권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중국정부도 전후복구건설 이후 북한에 제공하는 원조를 우대차관형식을 취했습니다.

김일성은 중국의 어려운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상원조, 각종 설비와 생필품, 차관 상환연기, 채무면제 등을 무리하게 요구했습니다. 중국 공산당도 김일성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기에 부담스럽지만 대체로 들어 주곤 하였습니다. 특히 중소분쟁시기에 중국공산당은 북한이 소련의 편으로 돌아서면 소련이 동북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다는 우려감을 드러내면서 북한을 달래서 중국편에 서게 하려고 원조요구를 기꺼이 들어주려고 노력해왔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주장입니다.

그리고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자본주의 영향에 대해 북한이 방파제역할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북한은 중국에 있어서 지정학적으로 중요하다고 중국정부는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중국공산당은 6.25남침전쟁시기에 북한에 백만 중공지원군을 보내주었고 북한을 물심양면으로 도왔지만 김일성은 모택동과 중국공산당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아니라 남한을 마지막까지 침략하여 전 조선반도(한반도)를 공산화하려는 야망을 중국당국이 들어주지 않고 미국과 정전협정을 체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청취자 여러분들도 다 아시는 것처럼 6.25남침전쟁은 김일성의 공산적화통일 야망이 불러온 남침전쟁이었고 전범자는 김일성이라는 사실은 지금에 와서는 비밀이 아닙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전쟁은 미국과 중국 사이의, 정확히는 유엔군과 중국군 사이의 전쟁이었습니다.

김일성의 불만은 전후 북한에서 진행되는 국가적인 정치행사들에 소련공산당 깃발과 스탈린의 초상화는 걸면서도 중국의 오성홍기와 모택동의 사진을 걸지 않은 것을 보고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전후 복구건설시기 중국정부의 원조로 김일성의 불만은 해소된 듯 싶었습니다.

북한의 국가적인 행사들에 초대된 중국대표도 소련대표와 나란히 주석단에 앉았고 중국 오성홍기와 모택동의 초상화도 내걸렸습니다.

그러던 1956년 8월 김일성에 의해 북한에서 강행된 8월 종파사건은 중국 공산당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1956년 8월 30일과 31일 양일간에 진행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중국공산당과 중국인민해방군 출신들인 상업상 윤공흠, 직업총동맹위원장 서휘, 문화선전부 김강 부상, 건재공업국 리필규 국장 등 4명이 김일성 우상화와 중공업 우선정책을 반대하였습니다. 그들은 숙청될 수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중국으로 도주하였고 북한당국은 중국공산당에 그들 4명을 돌려보내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중국당국은 그들을 북한에 돌려보내지 않았고 오히려 중국공산당 제8차회의 참석차로 중국에 왔던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최용건에게 김일성에게 불만을 토로하였습니다.

1956년 11월 소련군에 의해 웽그리아(헝가리)에서 정권이 교체되는 것을 통해 김일성은 중국인민해방군의 북한 주둔이 체제유지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를 가지게 되었고 중국군의 철수문제를 거론하였습니다. 문제는 중국군 철수 문제를 중국공산당과 사전 토의도 없이 유엔에 건의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모택동은 북한당국에 반발하였고 1957년 11월에 완전 철군문제가 제안되었고 1958년 10월 26일에 중국인민해방군은 북한에서 완전히 철수하였습니다.

8월 종파사건의 여독과 사전 토의 없이 중국군 철수를 유엔에 건의한 김일성에 대해 모택동은 분노했으며 그 이후 북한당국이 요청한 원조에 대해 거절, 침묵, 지연, 하향조정 등 신중한 입장을 보였습니다.

김일성은 중국과 소련이 북한의 지정학적 위치에 대해 중시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중국당국의 무상원조제공이 차관제공 방식으로 바뀌고 그것마저 지연되거나 삭감되자 북한당국은 친소정책으로 중국정부의 대북정책에 대응하였습니다.

1958년 2월 모택동은 중국 총리였던 주은래(저우언라이)를 북한에 보내어 북한에 매해, 면화 1만 톤과 철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점결탄을 제공해줄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중국지원군이 철수하기 전까지 북한군의 주둔시설 공사를 지원하기로 하였으며 압록강에 운봉수력발전소를 건립하는데 필요한 자금도 중국에서 먼저 선투자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김일성의 지시로 북한당국은 중국으로부터 더 많은 원조와 차관을 요구해 나섰습니다. 북한당국은 1958년 6월초에 중국정부에 1개의 방직공장과 2개의 종이공장을 건립해 줄 것을 요구하였고 결국 1961년 착공이후 10년 간 장기무이자차관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북한 경제대표단은 1958년 8월에 경제대표단을 중국에 파견해 공장건설과 설비제공 문제와 장기무역협정과 관련한 협상도 진행하였습니다. 중국지원군이 철수하면서 북한당국은 부족한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중국정부에 중국에서 살고 있던 조선족들을 북한 경제활동에 참여하도록 해줄 것을 제기하였고 수차례에 걸쳐 조선족들이 북한으로 이주시켰습니다. 당시 조선족이 북한으로 들어간 세대수는 1만 297가정이었고 총 인원수는 5만 2014명이었습니다.

1차 5개년 계획기간인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사이에 중국정부가 제공한 원조와 차관으로 북한당국은 운봉발전소, 평양정밀기계공장, 평양베아링공장, 방직공장, 시멘트공장 등 많은 공장을 지어주었습니다. 결국 1960년 이후 김일성은 중국과 소련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면서도 중국과의 더 가까운 친분관계를 유지하려고 하였습니다.

김일성은 당시 중국 모택동 주석의 우상화 선전과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를 지지하였고 중국의 대약진운동에 맞추어 천리마운동을 시작하였고 대외적으로 중국과 함께 반미정책으로 공조를 다졌습니다. 그러나 당시 중국정부는 소련정부가 북한에 제공하는 핵기술 관련 지원은 할 수 없었습니다. 핵무기 소유국이었던 소련은 원자력발전소 건설 및 운영에 관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북한의 기술 인력들을 소련의 두브나원자력발전소에서 기술연수를 받고 있었습니다.

김일성은 경제적 지원 측면에서는 중국과 소련 사이의 중립을 지키면서 양 국가들로부터 최대한의 원조를 제공받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과 지금 초급중학교, 고급중학교, 대학에서 배워주는 전후복구건설과 1차 5개년계획기간의 북한의 경제발전은 사실 김일성이 중국과 소련으로부터, 그리고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로부터 원조와 차관 등으로 이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영도의 현명성보다 중소갈등을 이용해 두 나라가 서로 경쟁적으로 북한에 원조를 제공하도록 하였던 구걸정책의 산물이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구걸정책은 김일성에 이어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오면서 현재 북한의 경제력은 세상에서 가장 낙후한 나라들의 반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시간에는 1차 5개년계획 이후 1960년대 북한당국이 중국정부로부터 제공받은 원조와 차관에 대해 말씀드리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에서 마칩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