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동포 여러분, 31년 전까지만 해도 동부독일과 서부독일로 분단되어 있던 독일은 1990년 동부독일의 공산독재 붕괴로 통일을 이루었고 지금은 세계 4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습니다. 오늘은 1912년 북한의 독재자 김일성과 같은 해에 태어나 김일성이 급사한 1994년, 같은 해에 사망한 동부독일의 공산독재자 에리히 호네커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호네커는 분단 시기 동독 주민들이 자유를 찾아 서부독일로 탈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무력을 행사하도록 했던 천인공노할 공산독재자였고 그 죄과로 체포, 수감, 재판, 망명의 어려운 시절을 보내다가 타국에서 사망한 동독의 살인독재자입니다.
에리히 호네커는 1912년 8월 25일, 독일 서부의 작은 소도시인 노인키르셴(Neunkirchen)시에서 광부이자 공산주의자인 빌헬름 호네커(Wilhelm Honecker)의 6남매 중 4번째 자녀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독일은 마르크스가 ‘공산당선언’, ‘자본론’ 등을 통해 마르크시즘을 창시하고 마르크스와 혁명동지였던 엥겔스의 ‘독일농민전쟁’, ‘독일에 있어서의 혁명과 반혁명’, ‘자연변증법’ 등 저서로 공산주의에 현혹된 많은 사람들이 공산당에 입당하여 활동하던 시기였습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해 창시된 공산주의 이론이 러시아에서 레닌과 볼셰비키에 의해 1917년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이 일어났고 그 영향은 독일에도 전파되었습니다.
고대 로마에서 노예들의 해방투쟁을 이끌었던 전설적인 검투사 스파르타쿠스의 이름을 딴, 독일 공산주의자들의 조직인 스파르타쿠스단(Spartakusbund)은 러시아 10월 혁명에 힘을 얻고 1918년 10월에 시위를 강행했습니다. 독일 공산주의자들은 1919년 1월에 독일공산당을 창당하였는데 조직 구성에서 스파르타쿠스단이 가장 규모와 영향력이 큰 것으로 하여 독일공산당 당명에도 괄호를 하고 스파르타쿠스단을 병기하기도 했습니다.
호네커는 10살의 어린 나이에 스파르타쿠스단의 산하 아동조직인 소년단에 입단하였고 14살 때에는 독일공산당 청년단체에 가입하였으며 17살 되던 1929년에 정식 독일공산당에 입당하게 됩니다. 1933년 히틀러에 의해 독일에 파쇼독재국가가 수립되면서 독일공산당 활동은 불법화 되었고 에리히 호네커는 지하활동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히틀러는 자신의 파쇼독재 권력유지에 걸림돌이 된다고 보고 공산당원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고 공산당원이었던 호네커는 1933년에 이어 1935년, 두 번에 걸쳐 체포 투옥되었고 10년의 강제노동형에 처해지기도 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구소련 군에 의해 1945년 4월에 감옥에서 탈옥한 호네커에게는 소련군이 구세주와도 같았습니다. 파쇼독일이 패망하고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 4개의 연합군이 독일에 진주했죠. 1945년 5월부터 동독지역은 소련군이 진주했고 서독지역은 미군과 영국군, 프랑스군이 진주해 독일은 동부독일과 서부독일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히틀러의 나치독일 패망과 함께 동독지역에 독일민주공화국이 창립되었고 소련공산당의 앞잡이들이었던 빌헬름 피크(Friedrich Wilhelm Reinhold Pieck)와 발터 울브리히트(Walter Ernst Paul Ulbricht)가 소련에서 동독으로 귀국하여 초대 국가원수와 제2대 국가원수로 지냈습니다.
당시 33살의 에리히 호네커는 이들의 신임으로 독일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동독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의 통합으로 이루어진 독일사회주의통일당 결성을 위해 맹활약을 하였습니다. 권력욕이 강했던 호네커는 자신을 신임하였던 초대 국가원수인 발터 울브리히트 동독 국가수반을 제거하기 위해 구 소련공산당 서기장이었던 레오니드 브레즈네프에게 축출을 건의하였고 1976년 10월에 동독 공산당 서기장으로 취임하였습니다.
1945년부터 동독의 공산당이 붕괴된 1990년까지 45년 동안 독일공산당의 최고 요직에서 활동하면서 동독 주민들을 공산독재의 압제에서 온갖 고통에 시달리게 하였던 에리히 호네커는 3번에 걸쳐 북한의 살인독재자 김일성과 만나 회담을 하였습니다.
1990년 독일이 통일되면서 당시의 비밀문서로 보관되었던 두 공산독재자 김일성과 호네커의 회담록이 공개되었습니다. 첫 만남이었던 1977년 12월 1차 회담에서 평양을 방문한 호네커에게 김일성은 “미군이 점령한 남조선을 해방하기 위해서는 국제공산주의 세력의 연대와 지지성원이 필요하다”고 피력했습니다.
그리고 1984년 5월에 동독을 방문한 김일성은 호네커에게 “북조선에서는 수십만 명의 청년들이 군복무를 하다 보니 노동력이 부족하다”, “부족한 노동력을 해결하는 방법이 생산공정의 기계화와 자동화인데 동독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구걸했습니다.
김일성과 호네커의 3차회담은 1986년 10월에 평양에서 열렸죠. 3차 회담에서도 김일성은 호네커에게 “남조선 주민들의 반미운동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면서 그들의 구호가 미군철수, 군사독재타도 등”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지금도 인터넷으로 ‘김일성과 호네커’를 검색하면 당시 공산독재 북한의 초대 주석인 김일성과 동독의 마지막 공산당 서기장 호네커가 북한과 동독의 친선기념깃발을 함께 들고 웃으면서 찍은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친선깃발에는 ‘조선인민과 독일민주주의공화국 인민사이의 불패의 형제적 친선단결 만세!’라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두 공산독재자는 당시까지만 해도 동독은 붕괴되고, 북한은 지금 같은 거지국가로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호네커의 살인독재만행은 베를린 장벽으로 탈출하는 동독인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처형이 대표적입니다. 동독과 서독의 경계를 가로막았던 장벽은 높이 3.6m, 콘크리트 장벽 길이 106km, 3겹 철조망 길이 49km였습니다. 분단장벽이 세워진 1961년부터 독일이 통일된 1989년 11월까지 사이에 동독을 탈출해 서독에 이주한 동독주민은 119만 8,298명입니다.
호네커는 동독을 탈출해 서독으로 망명하는 주민들을 반역자로 취급해 즉결처분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저는 2017년에 독일을 관광하면서 분단시기의 상징물인 서베를린 국경검문소 체크포인트 찰리의 베를린장벽박물관을 참관하였습니다. 이 박물관에는 당시 동독을 탈출하다가 희생된 동독주민 숫자가 1천 841명이라는 자료가 공개되어 있습니다.
독일이 통일된 후 호네커의 공산독재시기 동독을 탈출하다가 희생된 주민들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기 위한 특별수사부가 설립되었습니다. 430명의 수사관과 80명의 검사로 이루어진 특별수사부의 조사결과 국경지역에서 지뢰 및 총기 발포로 발생한 희생자는 584명이며 그 가운데 369명은 정조준 사격에 의해 사살되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소련이 붕괴되면서 1991년 호네커의 독일 송환을 앞두고 김일성은 호네커의 북한망명을 꺼냈다가 국제사회로부터 같은 독재자의 얕은 선심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하기도 했죠. 독일 통일 후에 동독의 공산독재자인 호네커는 베를린 주재 소련군 부대로 도피했으나 구소련이 붕괴되면서 1992년에 통일된 독일로 송환되었고 동독 탈출주민들을 사법절차를 무시하고 처벌하도록 한 즉결처분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중 1993년에 암으로 병보석을 받았던 호네커는 딸이 살고 있는 칠레로 망명하였지만 1994년 5월 29일, 김일성보다 40일 앞서서 타국에서 사망하였습니다.
자신의 고모부 장성택과 의붓형 김정남은 물론 자기의 권력유지에 걸림돌이 되는 고위 간부들마저 처참하게 죽인 김정은이 동독 공산독재자 에리히 호네커처럼 자유를 찾아 탈북하려는 북한주민들을 마구 사살하도록 지시했다는 것은 비밀이 아닙니다. 동독 독재자 호네커처럼 김정은도 피의 대가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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