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에 계신 동포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러분들은 아마도 강연회 때마다 '백두혈통'이라는 말을 지겹도록 들어야 할 것입니다. 민간에서는 '백두혈통'이라는 말 대신 '백두산줄기'라는 표현을 더 많이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말이겠지만 북한에서 잘 살자면 뭐니 뭐니 해도 '혈통'으로 이어지는 줄기를 잘 타고 나야 합니다. 북한에는 백두산줄기와 낙동강줄기, 한나산(한라산)줄기, 그리고 최근 새로 등장한 후지산줄기가 있습니다.
줄기에 따라 사회적 출신성분을 규정하고 규정된 혈통에 토대해 주민들을 차별하는 나라가 오늘날 인권불모지인 북한입니다. '백두산줄기'는 김일성과 항일투쟁을 했다는 집단으로 '백두혈통'이라 불리며 인민들의 머리위에 군림한 독재집단입니다.
'낙동강줄기'는 '6,25전쟁'에 참가해 공을 세운 인민군의 후손들입니다. '한나산(한라산)줄기'와 '후지산줄기'는 '고난의 행군' 이후 만들어진 혈통입니다. '한나산 줄기는 김정일 정권의 폭압과 굶주림을 못 이겨 한국으로 탈북한 사람들의 가족들입니다.
'후지산줄기'는 김정은이 등장한 이후 '째끼'라고 불리던 총련(조총련)계 사람들입니다. 김정은의 어머니인 고용희는 재일본 조선인 출신입니다. 고용희 가문은 소문난 친일파로 '후지산혈통'에서도 제일 질이 나쁜 집단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일성 시대까지만 해도 백두산줄기는 만경대혁명학원과 금성정치대학, 김일성종합대학 등 북한의 최고 교육과정을 거쳐 당과 정부, 군의 고위간부로 출세했습니다. 그러나 김정일 시대를 거치며 백두산줄기는 점차 사멸됐습니다.
김일성의 권력을 물려받은 김정일은 1997년부터 2000년 초까지 소위 '심화조' 사건이라는 걸 조작해 김일성의 최측근들을 닥치는 대로 숙청했습니다. 그 여파로 북한에서 한다하던 백두혈통은 대부분 척결돼 사라졌습니다.
김정일의 사망으로 김정은이 집권한 후 북한에서는 제2의 '심화조' 사건이 터졌습니다. '장성택 처형 사건'을 의미하는데 사실상 장성택 처형사건은 '심화조' 사건과 마찬가지로 김정일의 측근들을 몰아 내기 위한 김정은의 음모였습니다.
'심화조 사건'과 '장성택 처형사건'을 겪으며 북한에서 '백두혈통'은 김일성 일가에게만 주어진 유일한 특권이 됐습니다. 김정은의 곁에 남아 있는 최현의 아들 최룡해나 황순희의 가족들은 자신들이 '백두혈통'이라는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정일이 '심화조' 사건으로 제 아버지인 김일성의 측근들을 모조리 숙청한 사건도 그래, 김정은 역시 '장성택 처형'으로 아버지인 김정일의 측근들을 송두리째 뿌리 뽑은 사건들의 배경에는 다 기구한 역사적 비극이 내포돼 있습니다.
김정일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김일성의 측근들부터 숙청해야 했던 원인은 그들이 사사건건 김정일의 정치를 김일성과 비교하며 파벌을 형성했기 때문입니다. 권력의 발목을 잡는 선대수령 측근들의 결집이 두려웠습니다.
김정일 측근들이 장성택을 중심으로 결집하면서 새로 권력을 잡은 김정은의 정치에 걸림돌이 된 것도 결국 '장성택 처형'을 재촉했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과거 우리나라의 봉건세습은 반드시 새 권력자에 의한 선대세력의 숙청으로 이어졌습니다.
봉건시대 우리나라의 왕조들은 후계자를 선택한 뒤 반드시 양반가문에서 후계자의 아내를 선택 했습니다. 이런 세습과정은 후계자를 등에 업은 장인가문의 부정부패와 과도한 권력행사를 촉발해 백성들은 물론 반대파 양반들의 분노를 촉발시켰습니다.
일찍이 봉건세습을 꿰찬 김일성은 1970년대 초 김정일을 후계자로 내세우면서 '조선노동당 역사 연구소'를 만들고 여기에 제노라(내로라)하는 역사학자들을 모두 끌어들였습니다. '조선노동당 역사연구소'에 대해 알고 있는 북한 주민들은 극히 드물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에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던 저의 동창생 한명도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 부를 졸업한 후 '조선노동당 역사연구소'에 뽑혀갔습니다. 김일성 종합대학 철학과 박동근 교수도 '조선노동당 역사연구소'의 권위 있는 학자입니다.
철학박사이며 역사학자였던 박동근 교수는 김정일이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부에서 공부하던 시절 '신라의 3국통일 문제를 다시 검토할 데 대하여'라는 논문을 대필해 준 학자입니다. 김정일의 후계과정에도 많은 기여를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김정일이 박동근 교수를 특별히 아껴 준 것은 단순히 자신의 논문을 만들어 준 은혜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박동근 박사는 과거 우리나라의 봉건시대 귀족양반 가문의 후계문제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자였습니다.
김일성 종합대학을 졸업하고 '3대혁명소조생활'이 끝날 무렵 저는 평양에 올라와 있던 그 친구와 청류관에서 맥주를 마시게 됐습니다. 술에 약했던 그 친구는 맥주 몇 잔을 하더니 외부에서 발설하지 말아야 할 비밀을 저한테 이야기했습니다.
저도 몹시 궁금했는데 박동근 교수와 함께 그 친구는 '조선노동당 역사연구소'에서 이조 봉건시대 5백년 역사의 세습과정을 전문 연구한다고 했습니다. 김일성 일가가 제일 궁금했던 점은 이조 봉건시대 5백년간의 세습 유지였다고 합니다.
자신들은 '조선노동당 역사연구소'에서 이조봉건시대 5백년간 세습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을 연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친구의 이야기를 통해 저는 그때 벌써 김일성 일가가 봉건적인 세습을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친구의 이야기 중에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이조 봉건시대 세습의 가장 큰 약점이었습니다. 이조 봉건시대 왕이나 왕의 후계자 배필은 반드시 양반 가문에서 뽑았는데 이런 것이 훗날 반드시 화근이 되었다는 얘기였습니다.
양반가문에서 왕비를 선택하면 왕비의 친족들이 정치에 개입하며 나중에 왕까지 배신한다는 사실 이었습니다. 김일성이 소위 '백두혈통'이라는 수많은 빨치산 동료들의 후손들을 외면하고 김정일의 아내로 평범한 가정출신을 선택했던 원인도 이 씨 봉건시대 세습과정에서 나타난 결함들을 충분히 고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워낙 바람둥이인 김정일은 일생동안 수많은 애첩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나 그런 애첩들 중에 빨치산 후손들은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김정은 역시 '백두혈통'을 거부하고 리설주라는 평범한 가정의 여성을 아내로 선택했습니다.
김일성으로부터 시작된 봉건세습이 어느 때 끝장날지 장담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런 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김일성에서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세습봉건 왕조가 아직 찾지 못한 비밀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인민대중의 분노입니다. 과거 우리나라 역사에서 무너진 봉건 왕조들의 사례를 살펴보면 가혹한 수탈과 탄압에 항거한 인민대중의 투쟁이 반드시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저는 북한의 김 씨 세습정권이 결코 오래 갈 수 없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김정은의 가혹한 수탈과 공포정치를 제가 직접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북조선에 계시는 인민 대중의 분노를 잘 알기에, 그리고 시대를 거스르는 김일성 일가의 반인륜적인 통치 행태를 잘 알기에 이렇게 장담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자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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