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동포 여러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유럽 국가들이 소련공산당의 영향으로 공산당이 지배하는 공산독재국가로 전락되면서 많은 독재자들이 생겨났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헝가리 국가수반이었던 카다르 야노시도 소련공산당의 지원으로 헝가리 정권을 장악하고 32년 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한 공산독재자입니다.
1912년 5월 26일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지방도시인 피우메에서 태어난 카다르 야노시(Kádár János)는 16살 나던 1928년부터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쓴 공산주의 서적들을 읽으면서 공산이념에 몰입하게 되었고 만 19살이 되던 1931년에 공산당에 입당하였습니다. 그리고 33살 나던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소련군이 헝가리에 진주해 소련공산당과 구 소련정부에 의해 헝가리가 공산화되자 내무부 간부로 임명되었고 그 이후에는 헝가리 수도인 부다페스트 지역당 서기장을 역임하기도 하죠.
소련에서 스탈린이 죽고 1956년 2월에 열린 소련공산당 대회에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이었던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개인영웅주의’ 비판이 대두하던 그 시기에 카다르 야노시는 소련공산당과 구소련정부의 지지로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북한의 1956년 8월 종파사건이 구 소련의 공산당 서기장 흐루시초프에 의한 개인영웅주의에 대응해 김일성의 유일사상체계확립을 위한 전방위적인 숙청이었다면 당시 헝가리혁명은 소련공산당의 간섭에 염증을 느낀 헝가리사회주의공화국 수상이었던 너지 임레의 개혁정치와 헝가리 시민들의 자유를 위한 의지의 결과로 발생한 사건이었습니다.
1956년 10월 23일에 발발해 17일 만에 소련군에 의해 진압된 헝가리 시민혁명은 '부다페스트의 봄'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수만 여명의 헝가리 시민들은 수도 부다페스트에 세워졌던 스탈린 동상을 허물어뜨리면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습니다.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시위 진압에 나선 소련군에 맞서 헝가리군도 시민군을 지원하여 교전에 합세했으나 11월 11일 수도 부다페스트가 함락되면서 헝가리 시민혁명은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헝가리시민혁명 과정에 시민 3000여 명 이상이 숨졌고 부상자만 해도 2만여 명에 달했으며 너지 임레 전 수상을 비롯한 정부 각료들은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당시 사상자 절반 이상이 젊은 청년들과 학생들이었습니다.
소련 공산당과 구 소련정부는 헝가리에 기갑부대를 들이밀어 시민들의 시위를 무력으로 탄압하였고 저들의 앞잡이인 카다르 야노시를 수반으로 하는 괴뢰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 카다르 야노시는 헝가리 전 수상이었던 너지 임레가 앞으로 자신의 권력유지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소련군정을 동원해 처형하도록 했습니다. 결국 헝가리 내정에 대한 소련공산당의 지배를 반대하고 자유와 개혁을 지향했던 너지 임레 전 수상은 1958년 6월 16일에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카다르 야노시는 소련군의 헝가리 시민혁명에 대한 유혈적인 진압에 협조해 혁명의 지도성원들을 체포하는데 앞장섰으며 소련공산당의 전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헝가리 사회노동당 당서기장과 헝가리 국가행정권 수반인 총리직을 겸하면서 이를 이용해 권력을 장악해 나갔습니다.
민주화 시위과정에 각성된 헝가리 국민들의 자유를 바라는 갈망이 얼마나 큰가를 잘 알고 있던 야노시는 사회주의 계획경제로 인해 침체된 헝가리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시장경제 요소들을 부분적으로 도입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경공업 육성을 통한 소비재 생산 증가, 부분적인 이윤 추구 허용도 그의 신(新)경제 계획에 포함되었습니다. 또한 서방문화도 부분적으로 허용되었습니다.
카다르 야노시는 소련공산당과 소련정부의 눈에 거슬리지 않는 선에서 매우 조심스럽게 개혁을 추진해 나갔습니다. 그의 이러한 행보는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의 봄’이라고 불리는 반사회주의, 자유화 혁명을 진압하는 소련군을 도와 헝가리군을 파견한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헝가리 시민혁명이 발발했던 1956년 이후, 12년 만인 1968년에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발생한 ‘프라하의 봄’은 공산독재를 반대한 정의와 진리를 위한 시민혁명이었습니다. 헝가리에 이어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반소련, 반사회주의 시민혁명이 발발하자, 급한 소련공산당은 동유럽 공산국가들로 이루어진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5개국 군대 20만 대군을 투입했습니다.
당시 카다르 야노시는 체코슬로바키아 시민혁명 진압군에 헝가리 군을 파견하여 친소정책을 유지한다는 자신의 입장을 보여주는 한편, 자유를 갈망하는 헝가리 시민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어 부분적인 문화개방정책을 실시했습니다.
제가 북한에서 김일성종합대학 재학할 당시 동유럽국가들에 많은 유학생들이 파견되었지만 김일성은 헝가리 유학생 파견은 제한하는 정책을 실시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저와 같은 생물학부 출신 헝가리 유학생이 저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헝가리는 다른 동유럽 공산국가들에 비해 시민들의 자유화 의식이 높으며 정부도 그들의 개혁의지를 무시할 수 없어 경제분야나 문화분야에서 부분적인 자유화를 허용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정권을 잡은 초기에는 친소정책을 실시하였던 헝가리 사회노동당 서기장이자 장관회의 주석이었던 카다르 야노시는 사회주의 계획경제로 어려워진 민생을 회복하기 위해 경제개혁을 시도하려 했지만 서방국가들로부터 지원받은 외채가 불어나면서 상황은 더 어려워졌습니다. 결국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에 경제적 협력을 위해 창설된 국제통화기금인 IMF에 가입하면서 동유럽공산국가들 중에서 가장 먼저 시장경제를 도입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1956년 자유를 향한 헝가리 시민들의 민주혁명을 소련군을 앞세워 무력으로 진압하고 공산독재를 위해 정치범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해왔던 카다르 야노시 정권은 각성한 헝가리 국민들의 반공, 반소련, 자유지향의 움직임을 무시할 수 없어 1963년에는 정치범 석방 등 공산독재의 강압통치를 완화하는 정책을 실시하게 되었고 1980년대 말에는 북한이나 중국, 동유럽국가들의 공산독재 정치방식인 일당독재에서 복수정당제도를 도입한 첫 공산국가로 되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를 갈망하는 헝가리 국민들의 요구에 따라 카다르 야노시는 1988년 5월 헝가리 사회노동당 총서기직에서 사임하였습니다. 1989년 복수정당제도가 도입되면서 헝가리는 정치, 경제, 문화 각 분야에서 개혁과 개방이 활발히 진행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모든 권력에서 물러나 병환으로 자택에서 치료받던 카다르 야노시는 사망 직전인 1989년 봄에 자신이 전 헝가리 수상이었던 너지 임레의 처형에 관여했다는 사실을 고백하였습니다.
김일성과 같은 해에 태어난 카다르 야노시는 동유럽 공산독재자들 중에서 자국 내 국민들의 자유화요구에 부응해 개혁을 실시하려고 했다는 이유로 니콜라이 차우셰스쿠나 에리히 호네커처럼 인민의 심판을 받고 처형되거나 투옥, 추방 등의 처벌은 면할 수 있었습니다.
김정은과 김여정은 지금이라도 때가 늦지 않았습니다. 북한주민들이 그토록 바라는 자유와 민주주의, 개혁개방 의지를 보여주는 길만이 준엄한 심판을 면하는 길임을 명심하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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