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쁠럭불가담 운동과 중소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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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김일성에 의해 강행되었던 6.25남침전쟁으로 온 강토가 잿더미만 남았던 1950년대 전후복구건설시기와 1960년대 사회주의 공업화시기에 중국과 소련 등 사회주의 국가들의 대북 무상원조와 우대 차관, 기술협조 등에 대해서는 지난시간들에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후 중국과 소련의 갈등을 이용해 서로 경쟁적으로 대북지원을 하도록 하였던 김일성의 기회주의적인 줄타기 외교도 바닥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소련과 중국에 의존한 방위와 경제건설노선의 한계를 파악한 김일성은 결국 1960년대 말에 이르러 쁠럭불가담운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쁠럭불가담 운동을 국제적으로는 비동맹운동(非同盟運動, Non-Aligned Movement, NAM)이라고 부릅니다. 비동맹운동은 미국과 캐나다를 비롯한 북미주와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유럽국가들과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국가들, 대양주의 오스트레일리아(호주) 등 주요 강대국들이 만든 나토와 같은 국제적인 군사동맹에 속하지 않은 국가들로 구성된 국제조직입니다. 이 운동의 공동 창시자는 유고슬라비아 대통령 찌토(티토), 인도 초대 수상 자와할랄 네루, 인도네시아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 애급(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입니다.

1961년 유고슬라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창설된 비동맹 운동의 목표는 1979년 아바나 선언에서 천명한 ‘강대국이나 블록에 대항할 뿐 아니라, 제국주의, 식민주의, 신식민주의, 인종주의, 모든 형태의 외국 침략, 점령, 지배, 간섭, 패권과 투쟁하여 비동맹 국가들의 독립, 주권, 영토 통일, 안보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김일성은 1961년 9월 조선노동당 제4차대회 사업총화에서 “우리 당과 공화국 정부는 각이한 사회제도를 가진 국가들 간의 평화적 공존원칙에 입각하여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민족적 독립 국가들과 우호적 관계를 설정하며 발전시키는 것을 대외정책의 중요한 일환으로 삼고 있다”며 “우리는 조선인민의 자유와 독립을 존중하며 우리나라와 평등한 기초에서 정상적인 국가적 관계를 맺을 것을 원하는 모든 나라들과 외교관계를 설정할 용의를 가지고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사업총화보고서에서 김일성은 “우리나라는 꾸바(쿠바)공화국을 비롯하여 기네(기니아), 말리공화국 등 일련의 나라들과 외교관계를 새로이 설정하였고 인도, 인도네시아, 아랍연방공화국, 이라크 등 많은 아시아 아프리카 나라들과도 국가적 관계를 부단히 높은 단계에로 발전시키고 있다”며 “정부대표단의 동남아시아 및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방문은 이 나라들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중요한 계기로 되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앞으로도 민족적 독립과 사회적 진보를 위하여 투쟁하고 있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나라들과의 국가적 관계를 더욱 확대강화하며 더 많은 나라들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노력할 것”임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그전까지만 해도 소련과 중국, 그리고 동유럽 공산국가들에만 의존하였던 북한의 대외정책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알리는 신호였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쁠럭불가담 운동은 북한으로 하여금 소련과 중국 등 사회주의권으로부터의 종속관계 탈출을 위한 기회를 제공해 준 셈입니다. 이것은 국제사회에서 북한의 입지를 새롭게 구축하는 기회로도 되었습니다.

1956년 소련공산당 제20차대회부터 제22차대회가 열린 1961년에 이르는 동안에 중국과 소련 상호간의 갈등을 중재해 보려고 김일성이 처음에는 양국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소련이나 중국은 대국으로 권위를 세우며 원조와 차관 등 저들의 지원으로 경제적 생존을 유지하던 북한당국에 대한 홀대와 김일성에 대한 무시를 드러냈습니다.

1962년 3월에 열린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전당적으로 수정주의를 반대하는 사상사업을 강화’할 데 대한 결의가 채택되면서 북한과 소련 사이의 갈등은 더 커졌습니다. 소련정부는 북한의 자립적 경제정책을 포기하도록 강요하였고 북한경제를 사회주의 경제권에 통합시키기 위해 ‘상호경제원조회의’에 끌어들이려고 하였습니다. 북한당국은 당시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평화공존과 수정주의 정책을 반대하였던 중국에 대해 지지하는 언론기사들을 발표하면서 소련과의 갈등을 빚기도 하였습니다. 1963년 10월에 발표한 정론 ‘사회주의 진영을 보호하자’에서 북한당국은 소련당국이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경제원조를 이용하여 내정에 간섭하려 한다고 비난하면서 소련이 다른 당의 개인숭배문제제기를 중지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은 스탈린의 개인우상화 숭배사상을 반대하는 소련공산당의 수정주의 정책이 중국의 모택동과 북한의 김일성 우상화정책을 저애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소련이 붕괴되면서 지금은 일반 신문으로 되었지만 당시 소련공산당 기관지였던 ‘프라우다지’는 ‘누구의 이익을 위함인가’라는 사설에서 “자력갱생을 주제로 열린 평양경제토론회는 경제를 전혀 모르는 국제공산당 내 종파분자들과 그 추종자들의 회합”이라며 “소련과 각 사회주의국가와의 협조는 신생독립국의 자주성을 상실케할 것이라는 잘못된 사상을 전파하고 있다”고 비난하였습니다. 북한당국은 이에 반박하는 기사를 노동신문을 비롯한 북한 언론들에 실었는데 대표적인 기사가 1964년 9월 4일 노동신문에 게재된 ‘왜 평양경제토론회의 성과를 헐뜯으려 하는가’입니다. 북한당국은 프라우다지의 이 기사에 대해 근거 없고 악랄한 왜곡이라며 “공산당 및 로동당들 간에 있어서는 어떠한 특권적 당도 있을 수 없다. 큰 당과 작은 당은 있으나 높은 당과 낮은 당, 지도하는 당과 지도받는 당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최근연간의 국제공산주의 운동은 자기의 그릇된 노선과 견해를 다른 형제당들에 강요하며 이것을 접수하지 않는다고 하여 압력을 가하고 내정에 간섭하는 등 참을 수 없는 현상들이 근절되지 않고 있다”고 반발하였습니다.

개혁파로 유명했던 흐루시초프가 1964년에 실각되면서 후임자로 선출된 제5대 소련공산당 서기장은 레오니트 브레주네프였습니다. 결국 1960년대 중반 흐루시초프의 실각과 소련의 새 지도부 등장을 이용해 북한당국은 새로운 조소(북러)관계를 모색하게 되었고 이것이 북중갈등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1966년부터 근 10년간 중국에서 강행된 문화대혁명기간에 중국정부는 북한당국의 친소정책에 대해 강한 불만을 드러냈습니다. 북한당국은 1966년 9월 노동신문 등 북한언론들을 총동원해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폭력주의로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김일성은 그해 10월 5일에 진행된 당대표자회의 보고에서 조선로동당과 일본공산당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간섭을 비난하면서 ‘현대수정주의’보다 ‘좌익기회주의’가 더 위험하다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중국정부과 북한당국 사이의 비난공격은 1967년 1월 중국 공산당이 홍위병을 내세워 북한 내부에서 정변이 일어나고 있다는 내용의 대자보를 내돌렸고 이에 대해 북한당국이 항의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홍위병은 문화대혁명시기 중국공산당이 문화대혁명을 위해 만든, 대학생들과 고등학교 학생들로 무어진 준군사조직입니다.

1967년 2월에는 중국의 홍위병들이 김일성을 ‘살찐 수정주의자’, ‘흐루시초프의 제자’라는 모욕적인 어휘들을 써가며 맹비난하였고 대자보들을 베이징 거리 곳곳에 붙이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흐루시초프의 평화공존론 등장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다극화현상, 이에 반기를 든 중국 등 주변 국가들의 대외정책변화는 북한의 새로운 대외정책변화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북한당국은 비동맹운동 외교 초창기에는 중국의 비동맹 외교활동에 의존하였으나 1960년대 후반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중국정부마저 내정이 혼란상태에 빠지자 독자적인 대외정책을 표방하면서 자주외교를 들고 나오게 되었고 비동맹운동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